뤼순 박물관 로비에 고려 범종이 쓸쓸히…
  • 중국 다롄·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10.30 14: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06년 금강산 장안사 종을 일본 승려가 반출

뤼순 박물관 현관 1층에 전시되고 있는 고려 시대의 범종. ⓒ 시사저널 정락인
중국 다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이 있다. 지난 1918년 러시아 육군 장교구락부 건물을 박물관으로 개축한 ‘뤼순 박물관’이다. 중국 국가 1급 박물관으로 소장품만 해도 6만여 점에 이른다. 여기에는 고려청자 등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도 수두룩하다.

뤼순 박물관 현관에 들어서면 1층 로비에 대형 범종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 시대 금강산 장안사에서 주조된 ‘기복종(祈福鐘)’이다. 복을 기원한다는 뜻의 이 종도 세월을 거슬러 가면 상처투성이이다. 금강산에 있어야 할 종이 머나 먼 이국 땅에 있는 것이 그렇다. 기복종은 어떻게 뤼순까지 오게 된 것일까.

장안사의 유례부터 살펴보자. 장안사는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이다. 신라 법흥왕 때인 556년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했다. 고려 광종 때인 970년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성종 때인 982년에 중건했다. 문헌에는 1343년 충혜왕 때 원나라 순제의 황후인 기씨가 돈과 공인들을 보내와 무너진 건물을 중건하고 새 누각을 지었다고 적고 있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다.

다롄 노동공원을 거쳐 뤼순 박물관에 전시

그런데 개성 남대문에 있는 연복사 신주종의 명문에도 일치하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기복종은 지금으로부터 666년 전인 1346년에 만들어졌다. 원나라 순제의 명을 받은 자정원사 강금강과 좌장고부사 신예 등 원나라 장인이 고려로 들어간다. 이들은 금강산 장안사에 머무르면서 기복종을 주조했다. 고려 충목왕과 덕녕공주가 장인들이 귀국하는 길에 연복사 신주종의 주조를 부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내용을 보더라도 기복종의 원 출처가 장안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금강산 장경봉 아래 비홍교 건너편에 그 터가 있는데,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축대와 비석만 남아 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은 “고려 출신인 기황후가 고국에 뭔가 해주고 싶었던 차에 장안사에 장인들을 보낸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 후 장안사에서 559년 동안 있었던 기복종은 한 일본 승려에 의해 중국으로 반출된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인 1905년 일본 승려 아베에이젠은 다롄에 일본 사찰인 ‘히가시혼간지’를 세운다. 그리고는 그 다음 해에 포교를 목적으로 금강산에 있던 기복종을 인천을 통해 다롄으로 반출한다. 이런 내용은 기복종 하단에 있는 안내문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일본 당국이 반출을 허가했다.

현재 기복종은 종신의 높이가 2.2m이며, 직경 1.35m, 무게는 1.67t에 달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범종과는 약간 다르다. 우리의 범종은 아랫단을 수평으로 처리한 반면, 기복종은 연잎을 본떠 물결 모양으로 처리했다. 이는 중국 불교의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즉, 고려 범종과 중국 종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종의 겉 표면에는 산스크리트어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기복종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는다. 일본 사찰에 있던 종은 1958년 다롄 남산 아래의 노동공원으로 옮겨진다.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57년에는 종이 크게 훼손된다. 봉건 잔재의 유물로 판단한 중국인들이 종에 직경 약 25cm 정도의 구멍을 냈다. 지금은 훼손된 곳을 청동으로 막고 땜질한 채 전시되고 있다. 2007년 3월에 뤼순 박물관의 1층 로비로 옮겨졌다.

뤼순 박물관측은 8각으로 된 나무 받침대에 기복종을 올려놓은 후 8개 쇠기둥으로 연결된 파란색 천으로 둘러쳤다. 특별한 제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관람객들 누구라도 직접 종을 만져볼 수 있다. 종 주위에는 CCTV를 설치해 상시 감시하고 있다.

다롄 노동공원에는 가짜 기복종이 전시되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다(왼쪽). 일본 사찰은 다롄 경극단 건물로 바뀌었다(오른쪽). ⓒ 시사저널 정락인
남·북 불교계 공동으로 환수 추진 협의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은 “박물관의 관리 실태를 보면 기복종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남북한이 공조하면 충분히 반환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롄 노동공원에는 가짜 기복종이 주조되어 걸려 있다. 문화재적인 가치를 높게 사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기자가 갔을 때 가짜 기복종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3단 리본 형태의 빨간색 천으로 종을 장식했다. 종 바로 앞에는 염주 등 기념품을 진열해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누구든지 중국 돈 10위안(한화 약 1천7백54원)만 내면 10번을 타종할 수 있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반출된 기복종이 처음 걸려 있던 곳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롄 외국어대학교에서 직선거리로 2백여 m에는 다롄 경극단 건물이 있다. 이곳이 바로 옛 일본 사찰이던 ‘히가시혼간지’이다. 해방 후 일제 승려들은 사찰에서 떠났고, 지금은 실내를 개조해 다롄 경극단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실내 객석은 100여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소극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혜문 스님에 따르면 얼마 전까지 경극단 외벽에는 이곳의 내력을 담은 안내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은 없었다.

서울시 문화재찾기 시민위원회와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기복종 환수에 나서기로 했다. 이를 위해 북한 불교계와 공조하기로 했다. 혜문 스님 등은 10월20일 선양에서 조선불교도연맹 관계자들과 만나 협의를 했다. 향후 중국 다롄 시 관계자들을 만나서 범종 반환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다.

혜문 스님은 “기복종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승려에 의해 금강산에서 반출된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현재 금강산의 문화재는 일제 때 대부분 파괴되거나 유출되어 유물이 별로 없다. 다롄 지역도 일제 때 식민지였다. 우리와 중국이 항일 전통을 이어간다는 상징적인 측면에서 반환해주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 시사저널 정락인
중국 선양의 ‘요녕성 박물관’에 갔다가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발견했다. 시 정부 광장 앞에 있는 이 박물관은 희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당조·송조·원조·청조 때 동북 지역의 화폐, 도자기, 비석, 고대 지도 등 11만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3층에는 ‘요하 문명’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었다. 요하 문명은 ‘고조선의 뿌리’로 일컬어진다. 요하 유역과 발해만 일대, 만주는 고조선 문명의 발상지이다. 고조선에 이어 부여, 고구려, 발해가 차례로 일어난 우리 고대사의 중심지이다.

그런데 요하 문명을 보면 대부분 이 일대에서 출토된 유적과 역사가 중국 것이라고 적고 있다. 중국 동북공정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고대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중국의 고대 지도에는 하나같이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문물 이동을 나타내는 지도에서 동해는 없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도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이것 또한 동북공정식 역사 인식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