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만 남은 고구려 최후 격전지
  • 중국 다롄·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10.3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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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취재 / 중국 내 우리 문화재 조사탐방단, 동북공정 희생양 ‘비사성’ 찾아

중국은 고구려 비사성의 점장대 터에 당나라식 옥황전을 만들었다. ⓒ 시사저널 정락인
고구려는 한때 중국 만주 지방을 지배한 맹주였다. 고구려가 망한 지 1천3백년이 지났지만, 창대했던 문화의 흔적은 아직까지 중국 곳곳에 남아 있다.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는 이른바 ‘동북공정’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혼’까지 바꿀 수는 없다. 서울시 문화재찾기시민위원회와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지난 10월18일부터 21일(3박4일)까지 중국의 다롄(大連), 뤼순(旅順), 선양(瀋陽) 등에 흩어져 있는 ‘중국 내 우리 문화재’를 탐방했다. 기자도 시민위원 자격으로 참여했다.

중국 랴오닝 성 다롄 시내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는 고구려 최후의 격전지 ‘비사성’이 있다. 중국에서는 대흑산(6백63.1m)에 있는 산성이라는 뜻에서 ‘대흑산 산성’이라고 부른다. 중국이 고구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지명을 바꾼 것이다. 비사성도 중국 동북공정의 최대 희생양이었다. 고구려 유적 대신 당나라 유적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 실체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자.

비사성은 사면이 병풍처럼 절벽으로 둘러쳐져 있다. 오로지 서문을 통해서만 성에 올라갈 수 있어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린다. 우리는 가파른 협곡으로 이어진 남문으로 걷기 시작해 서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대흑산 입구에서 바라본 비사성은 위압적이었다. 험난한 산새에 기가 눌렸고, 그 위에 장엄하게 세워진 누각을 보면 너나없이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협곡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성을 함락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돌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좁고 긴 협곡 지대를 지나야 한다.

지리적으로 보면 비사성은 고구려 천리장성이 시작되는 고구려 영토의 출발점이었다. 수·당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점으로 보면 가장 서쪽에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 내부로 진입해 수도인 국내성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해상 방어의 최전선 기지이며,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비사성은 크고 작은 격전을 여러 번 치렀다. 그중에서도 수나라 양제가 614년에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군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저항했고, 수나라군은 비사성을 넘지 못했다. 30년이 지난 후인 645년에는 당나라가 4만여 대군을 이끌고 비사성을 공격했다. 당군은 처음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 전략을 바꿔 남문에 진을 치는 척하다가 야간에 서문을 기습 공격했다.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성안에 있던 고구려군과 주민 등 8천여 명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다.

비사성 탐방에 나선 시민단체 회원들이 남문으로 오르는 길에서 기념촬영을 했다(왼쪽). ⓒ 시사저널 정락인 오른쪽은 당나라식으로 복원된 비사성 서문. ⓒ 시사저널 정락인
중국, 역사 고증 없이 당나라식으로 복원

중국은 이런 역사적 진실을 철저하게 숨기며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하고 있다. 비사성으로 오르는 길에서 고구려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흑산 입구에는 도교 사원인 ‘당왕도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턱에 오르자 중국식 사찰인 ‘석고사’가 나왔다. 그 앞에는 갖가지 향을 피워놓고 행운을 비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찰 한 쪽에는 당 태종 이세민을 기리는 ‘당왕전’이 있었다. 당나라군이 비사성을 점령할 때 당태종이 찾아와 머물렀다고 한다. 당 태종이 누워 있었다는 돌도 있었다.

석고사 인근에서는 현대식 3층 건물로 된 중국 인민해방군 방어 기지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 주위는 온통 쓰레기 천지였다. 기지에서 나온 쓰레기가 전량 소각되지 않고, 기지 밖으로 버려지면서 성을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었다. 중국인들에게 비사성은 보전해야 할 유적이 아니라 치욕의 현장인 것이다.

비사성에 오르니 남문 입구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비사성은 대흑산 가파른 절벽 위에 석회암을 드높여 쌓아 축조한 거대한 석성이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이 역사적 고증 없이 당나라 양식으로 복원해놓았다.

성문이나 성곽도 고구려 축성 방식이 아니다. 남문 쪽에서 본, 우뚝 선 누각은 점장대이다. 고구려 장군이 수나라나 당나라 군대와 싸울 때 병사들을 지휘하던 장소이다. 중국은 그 터에 당나라 양식으로 옥황상제를 모시는 ‘옥황전’을 만들었다. 그 주위에는 돌로 만든 당나라 기마와 기병들을 양 옆으로 배치했다. 비사성을 점령한 당 태종이 점장대 앞에서 군사들을 사열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옥황전 입구에는 중국 유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용 조각을 새겨 놓았다. 비사성은 완전히 당나라의 유적으로 변해 있었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옥황상제 동상 앞에서 도교 사상을 기리며 향을 피우고 절을 한다. 성을 지키다 죽은 고구려 병사들이 알면 지하에서도 통곡할 일이다.

이상근 시민위원(문화재제자리찾기 공동대표)은 “비사성을 처음 보는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감격에 겨웠다. 고구려의 위대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성을 쌓을 생각을 했는지 참 대단하다. 그런데 중국식으로 왜곡되고 바뀐 성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 비사성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고구려인이 목숨을 잃었다. 역사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 이제 더는 중국의 역사 왜곡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옥황전은 비사성 탐방객들에게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한때 누각을 개방했으나 지금은 올라갈 수 없게 폐쇄했다. 옥황전에서 주위를 바라보면 발해만과 황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을 때는 다롄 시는 물론, 멀리 바다 위를 오가는 작은 배들까지도 볼 수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안개가 짙게 드리워 있어 시야가 밝지는 않았다. 다롄 시의 윤곽만 희미하게 보였다.

이곳이 ‘비사성’이었다는 흔적은 서문 상단에 쓰여 있는 ‘卑沙城’이라는 글씨가 유일하다. 서문은 서쪽 성곽과 성의 유일한 평지 통로이다. 물론 지금의 성문도 당나라 식으로 복원한 것이다. 서문부터 아래로는 시멘트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관광객들은 차량을 통해서도 비사성까지 오를 수 있다. 중국인들에게 비사성은 고구려가 아닌 당나라의 유적이며 역사 관광지일 뿐이다.

노기은 서울시 문화재찾기 시민위원(동국대 법학과 4학년)은 “말로만 듣던 중국의 동북공정이 이 정도인 줄 몰랐다. 고구려 역사는 만주 대륙을 호령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짓밟으려고 해도 그 혼까지 왜곡할 수는 없다. 우리 젊은이들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고, 고구려의 역사를 지켜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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