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토피아’보다 ‘디스토피아’가 더 관심 끌까
  • 김형민 인턴기자 ()
  • 승인 2012.11.0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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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미래 세계는 대부분 디스토피아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1982년 연출한 영화 <블레이드러너>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2019년의 세상을 그려냈다. 더러운 도시와 대기오염, 인구의 폭발로 빈민가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과학의 발전은 복제 인간을 만드는 등 세상을 더 어두운 곳으로 내몰았다.

당시만 해도 오지 않을 것 같았던 2019년이, 7년 뒤로 성큼 다가왔다. 영화가 만들어진 1982년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영화 속 2019년 세상은 현실과 다를 가능성이 더 크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나오기는커녕 아직 수소자동차도 상용화되지 않았다. 복제 인간이 등장하기에는 줄기세포 복제마저도 윤리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2019년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소설이나 영화 속 미래는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일까?

<이코노미스트> 과학 기술 담당 기자 매트 리들리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항상 나쁜 소식들이 좋은 소식보다 더 많은 뉴스거리가 된다.’ 생활 수준의 향상과 같은 긍정적인 미래 변화는 단계적으로, 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전쟁과 경기 침체, 자연재해 같은 부정적 미래 변화는 눈에 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밝은 예견은 항상 부정적 예측에 밀리게 된다.

결정적으로 미래에 대해 암울한 예측이 나오면 비관론자들은 그 위험을 인류가 손 놓고 가만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매트는 이를 ‘인류가 철로에 서서 달려들려는 열차를 피하지 않고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고 묘사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는 석탄을 대체할 화석연료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확히 6년 후 석유 시추를 위한 구멍이 뚫렸다.

이처럼 인류에게 다가올 위험 요소는 인류가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 피해갈 것이라는 게 매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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