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바람 타려 했나 정치색 진한 영화들
  • 이형석│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12.11.1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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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다룬 작품들 잇달아 개봉

국내 영화계에서는 몇 년 전만 해도 감독이나 배우가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 당적을 두고 적잖이 정치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만큼은 별다른 정치적 행보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물밑에서 감지되는 ‘반(反)보수’ 흐름은 뚜렷하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무조건 단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도 저간에 흐르는 분위기이다. 한 유력 중견 제작자는 익명을 전제로 “문재인을 지지한다. 하지만 누가 되든 단일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지지 후보를 묻는 질문에 한 영화감독은 “당연히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누가 되든 중요치 않다. 단일화가 급선무이다”라고 말했다. 배우 박중훈과 정지영, 송해성 감독 등이 문학·미술계 인사들과 함께 지난 10월22일 단일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가한 것은 영화계에 흐르는 정서를 대변한다.

극장가에서는 대선을 염두에 두고 정치색이 강조된 영화가 잇달아 선보인다. 어느 선거 때와도 다른 양상이다. 일단 대규모로 개봉되는 상업영화가 두 편이다. 오는 11월22일과 29일 개봉이 예정된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와 <26년>이 대표적이다. 독립영화는 더 많다. 다큐멘터리 <MB의 추억>과 <맥코리아>가 지난 10월에 개봉했고, <유신의 추억>도 상영 채비에 들어갔다. 모두 ‘반보수’ ‘반기득권’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이다. 친보수 계열의 작품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러브스토리를 테마로 한 <퍼스트 레이디-그녀에게>뿐이다. 감우성과 한은정이 주연을 맡았다. 

우연의 일치인가, 암묵적 동의인가

공교롭게도 대선 전에 개봉하는 일련의 영화는 ‘과거사’를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이 1년 만에 내놓은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민주화 운동 시절, 정권으로부터 당한 끔찍한 고문을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주인공은 거꾸로 세워져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쳐넣어지거나 ‘칠성판’이라는 형틀에 묶이고 얼굴은 수건에 덮힌 채 한동안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는다. 형사들은 고춧가루를 푼 물을 코와 입에 마구 들이붓고, 최후에는 전기 고문까지 동원한다.

정지영 감독은 영화가 가진 정치적 의도를 부정하지 않았다. 영화 관련 각종 행사와 기자회견에서 “대선에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세 명의 대선 후보 모두가 이 영화를 봤으면 한다. 초청하겠다”라고 밝혔다.

<26년>은 광주항쟁에서의 양민 학살 주범을 전직 대통령으로 설정하고, 사건이 일어나고 26년이 지난 뒤 피해 및 희생자 관련 인물이 복수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조직폭력배, 국가대표 사격 선수, 현직 경찰, 대기업 총수, 사설 경호업체 실장 등이 학살의 주범을 단죄하고 응징하기 위해 펼치는 작전이 영화의 줄기이다. 강풀 작가의 웹툰(인터넷 만화)이 원작이며 제작ㆍ배급사인 영화사 청어람은 ‘제작두레’라는 이름으로 관객들의 소액 투자(1계좌당 2만원, 5만원, 29만원)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제작두레’를 통해 1만5천여 명이 7억여 원을 모았다. <26년>은 이미 3년 전에 기획되어 캐스팅까지 완료하고 제작에 들어가려 했으나 무산된 적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투자 문제였으나, 이를 두고 당시 정치권력에 의한 ‘외압설’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출연진을 모두 바꾸고 소액 투자 모금으로 영화가 완성되었다. 진구·한혜진 등 스타급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남영동 1985>와 <26년>은 제5공화국이 배경이거나 1980년대 광주항쟁이 소재이지만, 대선을 앞두고 영화가 가진 비판의 화살이 어느 진영으로 날아갈지는 자명하다. 다큐멘터리 <유신의 추억>은 아예 박정희 정권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부제가 ‘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이다. 다카키 마사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이다. 영화는 유신 시대의 폭압과 인권 탄압, 민주화 운동을 담았다.

이미 개봉한 <MB의 추억>은 풍자 코믹 다큐멘터리이다. ‘정산 코미디’를 표방했는데, 미래를 위한 지도자 선출에 앞서 과거의 권력에 대한 명확한 결산과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이다.

영화는 지난 200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의 이명박 당시 후보의 모습과 집권 이후의 사회 상황에 카메라 포커스를 맞췄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CF 촬영 현장이나 “경제를 살리겠다, 교육을 지원해 가난의 대를 끊겠다”라는 거듭된 약속, 군부대 방문 모습 등이 풍자의 도마에 오른다. 이명박 대통령의 유세와 반값 등록금 시위, 병역 면제 장관들이 채운 내각 비판 보도기사 등이 교차되는 식이다.

<맥코리아>는 우면산 터널과 서울 지하철 9호선,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 등 서울시와 정부의 주요 민자 사업 투자 유치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맥쿼리한국인프라투자운용주식회사(이하 ‘맥쿼리’)의 유착 및 특혜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정치색 영화 제작 비율만 따지면 영화계는 ‘야대여소’

일단 두 편의 극영화 <남영동 1985>와 <26년>은 작품의 만듦새나 캐스팅 등 상업적인 흥행 가능성이 작지 않다.

<남영동 1985>의 경우 정감독의 전작인 <부러진 화살>(3백42만명 동원)보다 무거운 주제를 지닌 작품이지만, 그 이상의 완성도와 정서적 흡인력을 보여주면서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와 언론 배급 시사회에서 호평을 받았다.

<26년> 역시 원작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강풀 작가의 작품인 데다 젊은 스타가 출연해, 시사회 전부터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럼에도 이 두 편의 작품은 투자와 배급에서 CJ E&M과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등 주요 메이저 영화사로부터 외면받았다. <남영동 1985>의 경우 정지영 감독의 아들 상민씨가 대표로 있는 아우라픽쳐스에서 제작ㆍ투자했고, 앳나인필름이 공동투자자로 참여했으며 씨너스가 배급한다. <26년>은 <괴물>의 제작사로 유명한 청어람(대표 최용배)이 투자ㆍ제작ㆍ배급까지 도맡았다. 이들 영화에 메이저 회사들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정치적 부담’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영화계 안팎으로부터 나오는 얘기이다.

영화계에서는 지난 200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해 사건을 다룬 <그때 그 사람들>이 개봉하기 직전, 배급을 맡기로 했던 메이저 회사가 갑자기 발을 빼고 제작사인 MK픽쳐스(현 명필름)가 자체 배급에 나섰던 사례가 있다. 몇 년 전 <26년>의 외압설도 이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일련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경우에는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에 의해 단관이나 소규모로 개봉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오르게 하는 대사나 설정이 일부 등장한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안철수·문재인 두 후보만 관람했다. 문재인 후보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밤늦도록 영화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영화계의 현안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국내 영화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아직도 크게 남아 있는 만큼 문후보가 영화계와 ‘정서적 친화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안철수 후보는 세 후보 중 유일하게 지난 10월27일 열린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한 토론회에 참여했다. 반면 박근혜 후보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것을 빼놓고는 영화계로는 아예 발길을 하지 않고 있다. 세 후보와 국내 영화계 사이의 각기 다른 ‘심리ㆍ정치적 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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