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해준다며 ‘멘붕’ 부르는 상술
  • 석유선│의학 칼럼리스트 ()
  • 승인 2012.11.1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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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치유’ 마케팅 봇물…넘치면 사회 활력 떨어뜨릴 수도

한 대형 마트에 힐링 상품 코너가 마련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 연합뉴스
‘바쁜 일상 속 스트레스에 찌든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이 그야말로 대세이다. 학업 스트레스가 심한 청소년 수험생,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 실업자,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장인, 은퇴가 코앞인 장년층, 인생에 낙이 없어 공허하다는 주부들까지 그야말로 대한민국 남녀노소가 아프고 힘들다며 아우성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 전 세대가 피곤과 스트레스에 허덕이니 ‘마음의 위로’를 해주겠다는 힐링 코드가 먹혀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보니, 당초 출판업계에서부터 시작된 힐링 열풍이 음식은 기본이고 유통가, 관광업계, 부동산업계, 카드사까지 마케팅 시장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같은 힐링 상품들이 겉으로만 힐링을 내세우고 있을 뿐 실제와는 괴리가 큰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시중에 나온 힐링 상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이 과연 힐링이라는 제 효과를 발휘할까.
특허청에 따르면 힐링 관련 브랜드 출원 건수는 2008년 26건, 2009년 40건, 2010년 65건, 2011년 72건에 이어 올해 7월 말까지 86건으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힐링을 테마로 한 상품들이 봇물을 이루면서 마케팅에서 힐링이 대세로 기능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특허청 관계자는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과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관련 업계의 힐링 분야 상품이나 서비스 개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가장 크게 수혜를 입고 있는 분야는 출판계이다. 최근 주요 서점 프랜차이즈와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혜민 스님의 인생 잠언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비롯해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등 이 시대 청춘을 위로하는 책들이 상위권에 올라 있다.

음식업계에서는 사찰 음식을 전면에 내세운 ‘느린 음식’도 힐링 푸드로 각광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구 계명대학 동산병원이 당초 당뇨병이나 비만 환자를 대상으로 개발한 힐링 푸드 사업이 눈에 띈다.

현재 대구테크노파크바이오헬스융합센터, 경북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 등과 함께 힐링 푸드 사업을 전개 중이다. 국과 현미밥에 밑반찬으로 저염 김치·샐러드·생선·두부 네 가지를 내놓는 단출한 건강 식단이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일반인들을 위한 몸 균형을 찾아주는 식단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불교계가 주도했던 원조 힐링 여행인 ‘템플스테이’도 갈수록 다채로운 색깔을 보이고 있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실시하는 힐링 여행은, K팝 팬으로 구성된 프랑스 관광객 50명이 강화도 전등사에서 1박 2일간 템플스테이를 체험하며 한국 전통의 효(孝) 사상을 익히는 코스이다.

스스로 여가 활동과 마음의 여유 찾아나서야

지방자치단체들도 힐링 테마 여행에 가세했다. 충남도는 서해안 갯벌과 도보 여행길, 온천 등 힐링 관광 상품 10여 가지를 발굴했고, 올레길로 유명한 제주도는 일본 관광객들도 맞고 있다. 인천과 강원도도 힐링 관광지 개발에 나서고 있다. 산림청은 2017년까지 ‘치유의 숲’ 34개소를 조성할 계획도 내놓았다.

불황인 주택 시장에서도 건설회사들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공원이나 산·강 인근에 아파트를 지어 마치 숲 속 삼림욕 효과를 찾는 ‘힐링 아파트’ 마케팅에 불을 붙이고 있다. 건설사들은 건강까지 책임질 수 있는 대형 전문 병원이나 대학병원 등이 단지 주변에 위치한 아파트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카드사들도 힐링을 테마로 한 새로운 이벤트로 고객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수능시험을 끝낸 예비 대학생을 겨냥한 힐링 마케팅이 강세이다. KB국민카드는 수험생 가족을 위한 ‘애프터 수능 힐링 파티’를 11월30일까지 진행해 1등 3명에게 등록금 3백만원, 2등 7명에게 100만원을 준다. 3등 10명에게는 고생한 부모를 위한 W워커힐호텔 스파 패키지를 제공한다. 경품 수령에 따른 제세 공과금도 국민카드가 부담하기로 했다.

그 밖에도 카드사가 운용하는 1박 2일 캠핑 프로그램 가운데 힐링을 전면에 내세운 상품이 많다. 나무와 흙을 이용한 DIY 제품 만들기, 친환경 유기농 먹을거리, 별자리 관찰, 나무 향기를 맡으며 즐기는 요가와 명상 등 맞춤형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제공된다.

문제는 이같은 마케팅 상품들이 겉으로는 힐링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힐링보다는 상술을 위한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의도는 좋았지만 실상과 다른 효과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는 소비자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심리 전문가들은 힐링을 얻을 수 있는 계기를 외부 요인에서 찾기보다는 스스로를 정화하는 내부에서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힐링이 상술로 치달은 폐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입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수험생의 고민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이른바 ‘힐링 특강’이다. 부산의 한 입시학원에서는 영어·수학 강의와 더불어 컨설팅업체와 함께 ‘취업 지도’와 ‘심리 상담’ 두 콘셉트를 합성해 1박 2일 캠프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강의 비용이 20만원이나 되는데도 특별한 힐링체험을 했다는 수험생들의 반응은 적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입시학원 관계자는 “이런 종류의 강의는 끼워 넣기 식으로 돈을 벌기 위해 힐링을 접목했을 뿐, 특별한 치료나 치유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일부 학원의 상술로 인해 진정 수험생을 위하는 학원들마저 돈에 연연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최근 힐링 바람이 부는 것은 역설적으로 국민들이 육체적·심리적으로 매우 피곤하다는 반증이다. 힐링이라는 일시적 트렌드에 혹하면 되레 스트레스를 받고 특히 청소년들은 이른바 ‘멘붕(멘탈 붕괴: 심리적 상처를 입거나 절망한 상태를 뜻하는 신조어)’에 빠지기 쉽다”라고 입을 모았다.

또한 힐링 열풍이 지나치면 되레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점점 낙오되는 듯한 개인의 패배감이 팽배해지면, 결국 순간의 쾌락에 빠지는 영혼 잃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것이 사회 병리 현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자본주의 특성상 힐링 트렌드 역시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구성 모두가 너무 아픈 점만 내세워 부추기면 자칫 자기 합리화에 빠질 수 있다. 특정한 상품이나 일시적인 여행 등에 의존해서 치유나 위로를 받기보다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진정한 힐링의 자세이다”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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