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야 할 공적에 우매·태만하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11.27 16: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조 ③ / 무인들 태도 질타, 거만·인색하지 말라고 강조

© 일러스트 유환영
세조는 문학적 훈련이 부족하고 재능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조는 군사 분야에 대해 깊은 관심을 지녀 병법에 관한 서적을 기획하고 보급하는 데에 정성을 쏟았다. 이때 바로 신숙주가 병법 관련 서적의 주석과 보급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세조는 재위 9년(1463년) 9월에 우찬성 최항과 동지중추부사 양성지에게 명해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했는데, <동국사략> <삼국사기> <고려사> 등의 책을 참작해 책 하나를 편찬해내는 범례를 직접 정해주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병서를 세 등급으로 나누되, <병요(兵要)> <무경칠서(武經七書)> <병장설(兵將說)> 3편을 1등급, <진법(陣法)> <병정(兵政)>을 2등급, <강무사목(講武事目)>을 3등급으로 정해, 진무·부장·선전관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 정통한 자는 급분(給分)하라고 명했다. 급분이란 문과나 무과의 대과에 응시하게 되었을 때 가산 점수를 주는 것을 말한다.

“승리를 얻는 방법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이보다 앞서 재위 8년(1462년) 2월18일(계미)에 세조가 친히 <병장설>을 짓자, 좌의정 신숙주, 중추원사 최항, 예문제학 이승소, 형조참판 서거정 등이 주석을 달았다. 이듬해 9월에 신숙주 등은 주석을 끝마치고 전문(箋文)을 바쳤다. 최항의 명의로 작성된 <진어제병장설전(進御製兵將說箋)>은 세조의 덕을 칭송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상께서는 자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스림에 미흡하다고 생각하셔서, 안으로 닦는 정치를 더욱 힘쓰고 아울러 밖으로 적을 막을 방도를 취해, 교도와 검열을 사계절에 부지런히 해 병졸을 훈련시키매, 위엄스런 신령이 천하 우주에 떨쳐서 큰 적은 두려워하고 작은 적은 덕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장수된 자가 무(武)를 쓰는 방도에 자세하지 못할까 염려해, 어찰(御札)을 내리셔서 지남을 보여주시고, 글월을 밝게 돌려서 <상서>의 밝디 밝은 이치를 함께하시니, 성상의 계책은 정말로 진실하고 인의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일관된 조리는 상세함과 명백함을 다하고, 전체의 규모는 굉장하고 심원하기가 한이 없습니다.

 
세조는 또 <진법서(陣法序)> <역대병요서(歷代兵要序)> <무경서(武經序)>를 친히 지어, 무비(武備)의 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재위 9년(1463년) 10월2일(정해)에 신숙주와 최항이 다시 <어제유장(御製諭將)> 3편을 주해해 바치자, 세조는 신숙주 등을 화위당에서 인견하고, 술과 표리(表裏)를 하사했다. <어제유장>은 활자로 인쇄되었다. <어제유장>의 첫째 편인 ‘희유제장편(戱諭諸將篇)’은, 당시 장군들이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는 실태를 아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세조의 평소 언어 습관을 살필 수 있을 정도로, 냉소적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사들을 다스릴 때 일일이 귀에다 대고 명(命)할 수 없기 때문에, 형명(形名)의 분수를 받들어 나아가고 물러남과 합치고 흩어짐을 미리 정하고, 싸움에 임할 때 한 가지 형세만을 항상 고수할 수 없기 때문에 변칙을 내어 새로운 명령을 기별해 통하고, 기회를 틈타 정도를 쓰거나 기계(奇計)를 쓰는 것이다. 만약 산천이 가로막혀 있으면 꿰뚫어보기 어렵고 100리 길에 군진이 잇달으면 말을 통기하기 어려우므로, 한 부대가 적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일제히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병법을 아는 자는 적합한 장수에게 군율을 맡기는데, 한나라 고조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병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여러 군사들을 움켜쥐고 다스리는데, 수나라 양제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병법가의 대요는 이것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마음으로 국가의 대계를 체득해서 사졸의 마음과 힘을 얻어 위기에 임해 적변을 제어하고 사방에서 승리를 얻는 방법과 같은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병법에 달려 있지 않다. 그렇기에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경들은 모두 나라의 준재이고 지금 시대에 임금의 지우를 받은 자들이지만, 다만 나라가 태평해 군사의 일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 그래서 행군하면 하루 걸릴 길을 열흘이 걸려도 이르지 못하고, 진법을 강론하면 통하지 못하며, 포위하려 하면 장사진으로 다투어 내려오고, 진법을 사열하면 명령을 아래에서 받는다. 게다가 말 머리를 이끌고 관청에 나오면 병이 많고 집에 있으면 술에서 깨어나지 않으니, 지극히 우스운 사람으로서 경들 만한 자들이 없다고 하겠다. 내 말이라 해 황공하다 하지 말고 내 말에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나와 더불어 천록을 함께 누리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공적으로 스스로 보답을 받는 것이다. 위의 말을 여러 장수에게 농담 삼아 일깨워주라.

 

세조, 무신들의 발호를 막는 데 실패

세조는, 병법을 아는 제왕은 적합한 장수를 골라 군율을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군사의 일은 병법보다도 장수의 마음 상태가 중요하다고 전제하고, 당시의 장수들이 오래 전투에 임하지 않아 전투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체통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어서 둘째 ‘삼하편(三何篇)’에서는 장수들에게 기품과 지조를 지키라고 타일렀다. 셋째 ‘수로편(修勞篇)’에서는 문과 무의 인물이 각각 그 본업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조는 당시의 무장들이 “멋대로 한때의 즐거움을 좇아서 뻔뻔스럽게도 해서는 안 될 일들에서는 탐욕스럽고 집착이 강하면서, 어리석게도 마땅히 힘써야 할 공적에 대해서는 우매하고 태만하다”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무장들은 영욕과 화복을 모두 자기 스스로 취한다는 점을 명심해 거만하지도 말고 인색하지도 말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서 세조는 병법을 반드시 익히도록 요구했다.

 

병법의 큰 뜻은 장수와 병졸을 어루만져 양성하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게 하며, 신상필벌(信賞必罰)하고 예의를 가르쳐 서로 다투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다. 충성과 효도의 자세를 가지고서 항상 적개심을 품어, 만약 예기치 못한 출동이 있을 때에는, 한 사람이라도 국왕을 지키러 올 것이요 백 사람이라도 국왕을 지키러 와야 한다. 명령을 듣는 사람이 많을 때는 부대를 나누어 통솔하고 거느려야 한다. 이것이 능히 합하는 방도이다. 거느리는 자도 많고 명령하는 자도 많은데 군율로 통제한다면 손이 묶인 채 적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부대를 나누되 군율을 버리거나 변경하는 술책을 써야 한다. 이것이 잘 나누는 방도이다.

세조는 무신들의 권력을 억제하려고 했으나, 무신들의 발호를 막지는 못했다. 재위 13년(1467년)에는 함길도의 호족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함길도 출신 군인들은 다른 도 출신의 수령을 살해했다. 난을 평정한 후 세조는 함길도를 남북 2도로 분리했다.

하지만 세조는 태조, 태종, 세종, 문종 이래 동북면의 안정을 중시한 정책을 계승해 무장의 역할에 주목했다. 또, 계유정난과 이징옥 난의 진압 등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무장의 역할이 커져서 그들의 세력을 억제할 필요도 있었다. 세조는 모순되는 두 요구를 조정하면서 무장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 일정한 지침을 제시한 것이다.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