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왔을 때 잘할 수 있도록 늘 준비했다”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2.12.0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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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의 왕이 된 독수리, 감독 최용수

ⓒ 연합뉴스
2012년 K리그 우승은 FC 서울의 차지였다. 디펜딩 챔피언인 전북 현대와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해 2년 만에 트로피를 되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우승을 확정한 뒤 치른 전북과의 홈경기에서도 1-0으로 승리한 그들은 흥겨운 챔피언 세리머니를 즐겼다. 그때 경기장 구석에서 한 남자가 등장했다. 말에 올라탄 채 자신이 매고 있던 넥타이를 흔든 그는 FC 서울의 감독 최용수였다. 우승이 가시권에 들어선 뒤부터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등장하는 말춤을 추겠다는 공약을 했던 최용수 감독은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1차원적인 해석으로 말춤을 패러디했다. 1973년생. 마흔에 불과한 젊은 감독은 말 위에 올라서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는 지배자 같은 풍모를 보였다.

그물을 찢을 것 같은 강력한 슈팅, 상대 수비수를 공중에서 떨구며 날리는 파워 헤딩, 현란한 테크닉은 없지만 파괴력 넘치는 직선적인 플레이. ‘독수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스트라이커 최용수의 이미지는 지금도 선명하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1998년 프랑스월드컵 최종 예선 과정에서 맹활약한 최용수는 한국 축구의 대표 스타로 발돋움했다. 골을 넣고는 긴 팔을 크게 휘두르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세리머니가 트레이드마크였다. 하지만 10여 년이 흐른 지금 최용수는 단정하게 정장을 갖춰 입고 솟구치는 에너지를 감춘 채 차분함을 유지할 줄 아는 감독이 되었다. 테크니컬 지역에서 특유의 강한 눈매로 그라운드를 응시하는 모습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 같다.

‘감독 최용수’의 성공을 확신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수 시절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직하고 일관된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지략가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말을 더듬고, 부산 사나이 특유의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현역 시절의 말투는 한때 개그맨의 따라 하기 대상이었다. 선수 시절에는 높낮이가 분명했다. 프랑스월드컵 본선 진출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중용되지 못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웨스트햄 입단을 추진하다가 실패하며 쓴맛을 보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황선홍·안정환에 밀려 주로 벤치를 지켰다. 미국과의 조별 리그 2차전에 투입되었지만 이을용이 만들어준 결정적인 기회를 놓쳐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J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2006년 친정팀인 서울로 복귀해 은퇴했고, 이후 코치로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선수 시절의 이미지를 반전시킨  ‘감독 최용수’의 반격  

최용수 감독은 2011년 갑작스레 지휘봉을 잡았다. 황보관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였던 그는 4월 말 황보관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물러나자 감독대행으로 서울을 이끌었다. 한때 리그 14위까지 떨어지며 흔들렸던 팀을 정규 리그 3위로 올려놓은 공을 인정받아 시즌 종료 후 대행 딱지를 뗄 수 있었다. 2012년은 최용수 감독의 의지로 선수를 보강하고 코칭스태프를 구성해 치른 첫 시즌이다. 서울은 시즌 초부터 꾸준히 선두 싸움을 했다. 두 차례나 5연승을 달리며 9월 이후에는 리그 1위 자리를 뺏기지 않았다. 결국 리그 종료까지 3경기를 남겨놓고 조기에 우승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서울은 역대 K리그 최다 승점 기록도 깼다.

그는 “언젠가 내가 감독을 하게 될 날이 온다고 믿고 기다렸다. 그 기회가 왔을 때 잘할 수 있도록 늘 준비했다”라고 말했다. 최용수를 아는 이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질 그리고 현역 은퇴 후 기울였던 노력을 높이 인정한다. 최감독의 최대 장점은 많은 국내외 지도자를 거쳤다는 것이다. 다양한 스타일의 감독을 겪으며 장점을 흡수하고 단점은 교훈으로 돌렸다. 프로에서는 조광래, 이장수, 세놀 귀네슈, 넬로 빙가다 등 국내외 지도자를 두루 만났다. 대표팀에서는 아나톨리 비쇼베츠, 차범근, 허정무, 거스 히딩크와 함께했다. J리그 시절에는 전 유고 대표팀 감독인 이비차 오심, 현 FIFA(국제축구연맹) 기술위원장인 요제프 뱅글로스의 지도를 경험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지도자로 꼽히는 귀네슈, 히딩크, 오심이 지도자로서의 스타일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각에서는 서울의 우승을 논하는 데 최용수 감독의 존재감을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2012년 서울에는 데얀과 몰리나라는 역대 최고의 외국인 콤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데얀은 역대 K리그 한 시즌 개인 최다 골 기록(30골)을 새로 세웠다. 몰리나는 한 시즌 최초의 20골-20도움을 눈앞에 두고 있다. 두 선수가 올 시즌 기록한 공격 포인트의 합만 70개가 넘는다. 그러나 최고의 외국인 선수를 통제하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다. 실제로 데얀은 시즌 개막 직전 중국 클럽의 적극적인 오퍼를 받고 흔들렸고 개막전에서 부진한 플레이를 펼쳤다. 최용수 감독은 팀 공격의 절반인 데얀을 전반 25분 만에 빼는 초강수를 보였다. 결국 데얀은 최용수 감독의 밀고 당기기에 백기를 들었고 팀에 잔류하며 최고의 시즌을 열었다.

라커룸 장악에 성공한 최용수 리더십

최용수 감독은 알렉스 퍼거슨, 주제 무리뉴처럼 라커룸을 지배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외국인 선수나 하대성·김진규 등 주축 선수에 대한 편애가 없다. 조금이라도 해이한 모습을 보이면 아무리 뛰어난 주전이라도 과감히 뺐다. 기회를 기다리는 선수에게 동기 부여를 심었다. 주전이 부진하거나 경고 누적으로 빠질 때 최태욱, 현영민, 박희도 등이 해결사 역할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든 선수와 동등하게 소통하고, 연대 의식을 강화한 것도 돋보인다. 특히 그는 가족이라는 말을 굉장히 강조한다. 구단 직원의 출산까지도 일일이 챙길 정도이다. 서울은 우승 세리머니 당시 선수와 코칭스태프의 가족이 모두 등장해 눈길을 모았다. 그 역시 최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언론 대응법도 탁월하다. 현역 시절에는 표현력이 제한적이었지만, 감독이 된 뒤에는 달변가가 되었다. 감독대행으로 부임한 뒤 그는 구단에 귀네슈 감독이 재임 당시 했던 인터뷰 모음집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책으로 세 권 분량의 모음집을 늘 가지고 다니며 언변을 키웠다.

편견도 깼다. 3년 선배인 박태하 전 대표팀 코치를 수석코치로 영입했다. 해외에서는 젊은 감독과 연배가 위인 수석코치의 조합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뚜렷한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2004년 포항의 우승을 이끈 최순호 감독-박항서 수석 코치 체제가 유일한 사례이다. 불같은 열정의 최용수 감독과 성실하고 얼음 같은 지성을 지닌 박태하의 만남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강팀과 약팀에 따라 경기 운영 전략을 달리 가져가는 영민함, 상대의 약점을 철저히 물고 늘어지는 분석 축구도 주목받았다.

젊은 감독답게 팬 서비스 또한 화끈하다. K리그 감독 중 최고의 퍼포먼스를 펼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골이 들어가면 웬만한 선수들 이상으로 기뻐한다. 선수와 함께 비를 맞다가 골이 터지면 현역 시절에 했던 세리머니를 펼치기도 한다. 슬라이딩을 하다가 명품 정장 바지가 찢어진 사례도 있었다. 지난 7월 올스타전 때는 식스팩이 사라진 ‘똥배’를 과감히 드러내기도 했다. 이번 우승 세리머니에서 실제 말을 타고 나온 것도 팬 서비스 정신이 빛을 발한 경우이다.

최용수 감독은 우승 후 인터뷰에서 “축구는 탁월한 선수 한 명이나 감독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기능이 조화를 이뤄 성과를 내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팀을 가장 중시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홍명보 감독의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초보 감독이라는 딱지를 K리그 우승으로 완전히 뗀 최용수 감독은 2013년 K리그 2연패 그리고 AFC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호성적을 바라보고 있다. 모두의 편견을 깨고 K리그 정상을 차지한 독수리의 비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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