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회장이 노동 문학 시인에게 상을 준 까닭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12.0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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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문화재단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

대산문화재단 신창재 이사장 ⓒ 교보생명 제공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이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대산문화재단 창립 20년을 직접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삼성그룹이 미술관, 금호그룹이 음악에 특화했다면 교보는 ‘창작 문학’ 지원에 특화했고, 왜 그렇게 했는지, 앞으로는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설명하는 자리였다.  

신이사장은 1993년 5월 대산문화재단 이사에 취임하고 그해 11월 2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1대 이사장은 그의 선친인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1917~2003)였다. 서울대 의대 교수(산부인과)였던 신창재 이사장은 대산문화재단 일을 시작으로 교보와 관련을 맺다가 1996년 교보생명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경영자로 변신했다.

그가 대산문화재단 이사에 취임하자마자 한 일은 1회 대산문학상 수상자 명단을 ‘발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기관’의 입김이 강했다. 대산문학상 1회 수상자는 고은(시), 백낙청(평론), 이승우(소설)였다. 이른바 ‘반정부’ 인사들이었다. 그러자 모처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기업이 하는 것이 이런 것이냐?” 재단 실무진은 수상자를 결정하고도 발표를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했고, 이 문제는 그해 5월 이사로 취임한 신이사장이 풀었다.

지원은 하지만 간섭은 안 한다는 원칙

신이사장은 “나는 공로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창작을 지원하려면 작품에 상을 줘야 한다. 작품이 좋아서 선택되면 작가의 백그라운드는 상관없다. 나는 경영에서도 파벌을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다 수락한다. 완벽히 좋은 사람도, 완벽히 나쁜 사람도 없다. 서울대 의대 교수 시절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는데,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많이 느꼈다. 산부인과 의사에 대한 편견도 있다.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대산문학상은 작품에 상을 주는 것이다. 20년간 그런 원칙을 지켰더니 여러 성향의 문인이 모두 우리 재단에 호응해준다. 올해 수상자인 백무산 시인도 기업 관점으로 보면 상을 주기 어렵다. 하지만 ‘그해에 나온 뛰어난 작품에 주는 상’이라는 원칙과 전통이 있기에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신이사장은 “나는 문인도, 문학 전문가도 아니다. 공익 재단을 운영하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재단을 위해 기여한 것이 있다면, 창작 사상을 방해하지 않고 지원했다는 자부심은 있다. 부수적으로 재단으로부터 월급을 안 받고 있다는 것, 그게 내 자부심이다”(웃음)라고 덧붙였다.

신이사장의 원칙 준수는 교보생명그룹의 상징물로 자리 잡은 광화문 글판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광화문 글판의 주인공이 건물주인인 교보생명임에도 글귀 선정을 ‘광화문 글판 선정위원회’가 하도록 했다. 이윤을 추구하는 주식회사가 글귀 선정에 간여하면 상업성을 띨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현판에 대해서는 한때 ‘불법 부착물’ 논란이 있었지만 종로구청에서 ‘불법 부착물이지만 공익성이 높아서 수용한다(?)’라는 답변서를 보내와 논란을 잠재웠다. 최근에는 노원구와 송파구, 제주도청에서도 글판을 요청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신이사장은 “1991년 선대 회장 때 광화문 사옥에 글판을 달았다. 처음에는 근하신년 정도의 세시 인사말이었다.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구가 등장했다. 처음은 고은의 시에서 따온 ‘낯선 곳으로 떠나라’였다. 선대 회장님의 선택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이라크 파병 논란이 한창이었던 와중에 광화문 글판에 ‘하루를 살아도 평화롭게’라는 글이 등장하자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글판은 정치적 환경과는 전혀 무관하게 선정된다”라고 전했다. 그는 대산문화재단이 ‘문학 전문으로 특화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선친이 테마를 문학으로 잡았다. 선친은 감성이 대단히 뛰어났다. 예술가 같은 자질이 있었다. 시조나 시를 낭송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50대 이후 성대가 나빠지자 오페라 가수나 소리꾼을 청해 노래를 즐겨 들었다. 미술 쪽 안목도 뛰어나서 광화문 사옥이나 강남교보타워, 천안연수원 같은 건물을 지은 것도 선친이다. 이 건물들은 내부 인테리어가 비싸지 않으면서 고급스럽고 색의 조화가 뛰어나다. 당신도 다음 생에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선친은 리더로서도 훌륭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회사 일로 바빴던 아버지를 잘 알지 못했다. 내가 회사 경영에 참여하면서부터 선친을 선대 경영자로서 더 잘 알게 되었다.”

신용호 교보 창립자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 청소년기에 병을 앓아 학교를 가지 못하고 대신 목포상업학교를 다니던 동생의 교과서로 독습했다고 한다. 그때 문학 작품도 탐독했고, 20세에 만주로 가서 이육사 같은 당대의 시인과도 교류했다.

신이사장은 “선친의 예술적 감수성이나 문학에 대한 이해, 유년 시절 책에 굶주린 기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대산문화재단이나 교보문고가 설립된 것으로 이해한다. 선친은 다양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라도 선택해서 집중을 강조하는 스타일이었다. 맡은 분야에서 최고를 지향하고. 그래서 문학을 집중적으로 좁고 깊게 지원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세상이 와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다”라고 그는 강조했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프로와 아마추어가 함께 즐기는 문학 커뮤니티가 활성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누구나 다 작가가 될 수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집단화가 쉬워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의 정신적 가치관이 중요해질 것이다. 사람의 가치관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심하게 왜곡될 것이다.

“청소년과 디지털이 미래의 화두”

우리 재단의 미래 화두는 청소년과 디지털이다. 문학은 사람의 사고와 감정을 쓰는 것이다. 링컨이 말한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이라는 표현이 문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가치관이 더 중요해진다. 세상 만물은 모두 사람을 위한 것이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 중 가장 경이로운 것은 시험관 아기를 시술하면서 현미경으로 본 것이다. 현미경으로 생명 창조의 현장을 보면 무수한 정자 중 난자와 수정하는 것은 단 하나이다. 생명 현상의 공교로움이라고나 할까,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100억분의 1의 확률로 탄생한 생명체가 바로 당신이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존중받을 만하다. 내가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서울대 병원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했다. 시험관 시술로 명성을 얻기도 했고, 그때 1천명 정도의 신생아를 내가 받아냈다. 거리를 지날 때 10대 청소년을 보면 ‘저 중에 내가 받아낸 아이도 있겠지’라는 생각이 든다.”(웃음)

그는 간담회 자리가 작은 장소였지만 마이크를 썼다. 전날 간단한 성대 시술을 받아서 큰소리를 낼 수 없다고 했다. 강연을 많이 하는 그는 발음이 새서 쉽게 지치는 것 같아 성대에다가 보형물을 넣었다고 한다. 그만큼 강연 일정이 많다는 얘기이다. 그는 “나이를 먹으니까 성대가 지친 것이다. 강의는 주로 경제 관련 강의를 한다. 강의 끝에는 주로 자신감과 동기 부여를 하는 얘기를 많이 한다. 문학은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감정의 교류-공감이 조직을 끌어가는 힘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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