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원의 사건 추적] 법대 여대생 꿈 짓밟은 판사 장모의 편집증
  • 표창원│경찰대 교수 ()
  • 승인 2012.12.0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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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행과 감시·위협 하다 킬러 고용해 살해

2003년 4월15일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에서 여대생 하씨를 살해한 범인들이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2년 3월16일,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 등산로에서 하산하던 등산객이 살짝 덮인 흙더미 아래에 두툼한 쌀포대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다가가 포대자루를 들추던 등산객은 사람 손을 발견하곤 혼비백산했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시신에서 지문을 채취해 경찰청 자동지문검색시스템(AFIS)에 의뢰해 신원을 확인하는 한편 시신에 대한 검안과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과학 수사 등 현장 감식을 실시했다. 시신은 젊은 여성이었는데, 얼굴 부위에 여러 발의 총상을 입고 팔과 뼈가 부러진 채 숨져 있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나중에 그 총상은 공기총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얼굴과 머리 부위에 모두 여섯 발이 근접 사격으로 발사되어 뇌에 박힌 치명상이었다. 확인 사살 행위가 확인되는 전형적인 ‘처형’ 형태의 살인이었다. 곧이어 확인된 피해자의 신원은 더욱 놀라웠다. 이화여대 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하 아무개씨(당시 22세)였기 때문이다.

권력과 돈의 만남, 잘못된 결혼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법대 여학생이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 등산로 한편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어야만 했을까? 사건이 알려지면서 언론의 보도 경쟁이 시작되었다. 피해 여학생이 남다른 미모의 소유자라는 점이 부각되고 온갖 억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은 피해 여학생의 수첩 주소록에서 법조인과 교수 등 사회 유력 인사의 연락처들이 발견되었다면서, 이들과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비롯된 치정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며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무분별한 추측을 제기하기도 했다.

피해자는 이미 10일 전에 가족에 의해 실종 신고가 되어 있었다. 2002년 3월6일 새벽 5시 반에 동네 체육관에 수영을 하러 나간 피해자가 귀가할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부모는 딸의 귀가 경로와 주변을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경찰이 인근에 설치된 CCTV 녹화 테이프를 모두 확인하는 과정에서 귀가하던 피해자가 최소한 두 명의 괴한에게 납치되는 장면이 발견되었다. 실종 사건이 납치 사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피해자 주변을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하던 경찰은 피해자가 사촌 오빠의 장모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다가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고, 2001년 10월 법원으로부터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아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피해자 가족에 따르면 피해자가 실종되기 일주일 전에도 수상한 남자들이 피해자를 미행하고 집 주위를 서성거리는, 납치 시도로 의심할 만한 정황들이 있었다.

그런데 피해자의 사촌 오빠와 그 처갓집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수사가 쉽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피해자의 사촌 오빠는 현직 판사인 김 아무개씨(당시 30세), 그 처가는 부산의 재력가인 기업 회장 집이었다.

1999년 11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판사에 임용된 김판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수재인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대가를 받는 결혼을 하고 싶었다. 중매인을 통해 거액의 현금과 아파트, 자동차 제공을 기본 조건으로 내건 김판사에게 다가온 것은 부산에 있는 유명 밀가루 제조업체 ㅇ제분의 회장인 류 아무개씨 집안이었다.

류회장의 집안은 사업을 하며 돈을 많이 번 재력가였지만 이런저런 송사에 휘말리는 등 법조 권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김판사는 머리 좋고 공부를 잘해 판사가 되었지만 돈이 없어 떵떵거리고 살지 못하는 아쉬움에 목말라 있었다. 둘의 만남은 결혼 중매업자들이 말하는 ‘환상의 조합’인 듯했다.

하지만 만인이 부러워할 ‘재벌 딸과 판사의 결혼’은 시작부터 삐걱거리며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 시작부터 부부 사이에 ‘사랑’과 ‘신뢰’는 전혀 없이 ‘계산’과 ‘이익’이 그 빈자리를 대신 메운 결혼 생활이 행복할 리 없었다. 그러던 중 김판사의 여자 관계를 의심할 만한 징후들이 발견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2002년 8월20일 여대생 하씨의 청부 살해를 지시한 ㅇ제분 회장 부인 윤길자씨. ⓒ REUTERS
애먼 희생양이 된 판사의 사촌 여동생

으레 이러한 ‘조건 결혼’이 성사되면 처가에서 받은 돈의 10% 정도를 중매인에게 사례금 형식으로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런데 처가로부터 현금 7억원을 받은 김판사는 중매인에게 주는 돈이 아까워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중매인이 김판사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정보를 처가에 알리면서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중매인의 말을 반신반의하던 부인은, 수시로 김판사에게 젊은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그 사실을 감추고 숨기느라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딸의 말을 듣고 딸의 집을 찾아 그 모습을 목격한 장모 윤길자씨(당시 58세)가 판사 사위를 매섭게 추궁하자 김판사는 ‘법대에 다니는 사촌 여동생의 전화’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이후에도 김판사는 아내에게 애정이 없는 모습이었고 그를 찾는 여성의 전화는 계속되었다. 부인과 장모 윤씨는 의심을 넘어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게 된다.

김판사의 장모 윤씨는 사위와 사촌 여동생이 불륜 관계라는 추정을 하게 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아무리 추궁을 해도 사위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고, 장모의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결국 직접 증거를 잡겠다는 결심을 한 장모 윤씨는 2000년 9월부터 심부름센터에 돈을 주고 김판사와 사촌 여동생을 미행해 불륜 현장을 포착하라고 청부하게 된다. 하지만 별 성과가 없자 자신의 조카와 현직 경찰관 등에게 돈을 주며 24시간 빈틈없는 미행과 감시를 시킨 것으로도 양이 안 차 직접 승려 복장을 하고 미행에 나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김판사와 그의 사촌 여동생은 서로 전혀 만나지도 연락을 주고 받지도 않았다. 결국 스스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장모 윤씨는 2001년 4월, 사위 김판사의 사촌 여동생 집을 찾아 그 아버지에게 “딸 단속 제대로 해라. 결혼한 사촌 오빠 유혹하고 다니는 × 잘 사는가 두고 보자”라는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피해자 가족은 윤씨를 모욕과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윤씨의 미행과 감시, 위협 행동은 계속되었고 그에 불안을 느낀 피해자 가족은 2001년 10월 법원에 윤씨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해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처럼 예사롭지 않은 배경이 피해자에 대한 특이한 처형 형태 살해 방법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CCTV에 찍힌 납치범들은 남자였고 범행에 사용된 공기총이라는 살인 도구 역시 장모 윤씨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윤씨가 관련되어 있다면 직접 살인을 행한 것이 아닌, 제3자를 교사해서 일으킨 청부 살인일 가능성이 컸다. 결국 그 가설을 입증하려면 직접 살인을 행한 범인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윤씨가 이들을 사주했다는 증거를 확보해야 했다.

경찰의 수사망은 좁혀졌다. 김판사의 장모 윤씨와 그 주변 인물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미행, 감시가 이루어졌다. 곧 폭력 범죄 전과가 있는 윤씨의 조카 윤남신씨(당시 42세)의 존재가 수사망에 포착되어 그의 소재 파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윤남신은 이미 피해자 시신이 발견된 4일 후인 2002년 3월20일에 베트남으로 출국한 뒤였다.

윤남신과 가깝게 지냈던 고등학교 동창 김용기씨(당시 42세) 역시 그로부터 보름 후인 4월5일에 홍콩으로 출국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경찰은 김판사의 장모 윤씨에 대한 계좌 추적을 실시했고, 2001년 6월과 9월에 총 2억원이 현금으로 인출된 것과 같은 해 10월 별다른 수입원이 없었던 김용기의 계좌에서 5천만원이 현금과 수표로 인출된 사실을 확인했다.

피해자에 대한 살인에 김판사의 장모 윤길자와 조카 윤남신 그리고 그의 친구 김용기가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둘 ‘상당한 이유’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경찰은 일단 2002년 윤길자를 ‘체포 및 감금 교사’ 혐의로 입건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해 발부받았다. 윤남신과 김용기에 대해서는 인터폴을 통해 전 세계 경찰에 긴급 체포를 요청하는 ‘적색 수배’를 발령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장모 윤씨는 자신을 명예훼손과 모욕죄로 고소한 피해자 아버지도 납치해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일이 있었다. 하청 살인자 윤남신과 김용기에게 긴급히 출국해 해외로 도피하라고 한 뒤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망명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윤남신과 김용기라는 꼬리를 잘라 ‘도마뱀 몸통’에 해당하는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2003년 3월25일, 중국 공안은 숨어 지내던 인터폴 적색 수배 대상자 김용기의 소재를 확인하고 체포했다. 3일 뒤 윤남신 역시 공안에 체포되었다. 중국 공안은 윤남신과 김용기를 추방했고, 우리 경찰은 베이징 공항에서 이들을 중국 공안으로부터 인계받아 한국으로 압송했다. 두 피의자는 경찰 수사에서 범행 전모를 자백했다.

이들은 윤씨로부터 총 1억7천5백만원을 받고 피해자를 납치해 살해하라는 청부를 받은 뒤 공기총을 구입하고 한 달여 동안 피해자를 미행해 일상을 파악했다. 인적이 드문 새벽 5시 반에 수영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피해자를 납치해 차에 태운 후 마구 때리고 청테이프로 입을 막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용의자들의 출국, 한발 늦은 경찰 수사

그리곤 준비해둔 쌀 포대를 덮어씌워 몸 전체를 가리고 미리 봐둔 장소인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으로 이동했다. 검단산에 도착해 산기슭으로 올라간 뒤 피해자를 바닥에 눕히고 다시 가격해 도주와 저항을 못 하게 하고는 얼굴과 머리 부위에 총 여섯 발을 쏴 살해했다.

피해자를 납치한 뒤 40분 정도가 지난 새벽 6시10분쯤이었다. 그리고는 쌀 포대에 담아 숨기고 흙을 덮어 시신을 유기한 뒤 산을 내려와 차량으로 이동해 오전 9시경 공중전화로 윤씨에게 연락해 ‘성공했다’라고 보고를 한 것이다.

경찰의 수사 결과와 윤남신, 김용기의 자백은 기소와 재판 과정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돈 많은 재벌 부인 피고인 윤씨와 그가 고용한 대형 로펌 변호인단의 강한 부인과 반론에도 1심과 2심에 이어 2004년 5월 대법원에서도 윤씨의 살인 교사, 윤남신과 김용기의 살인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세 명의 피고인 모두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윤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공범 윤남신과 김용기를 설득하고 회유했다. 부인과 가정이 있었던 공범들은 자신들이야 더는 희망이 없지만 가족에게라도 돈을 남겨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듯했다. 이들은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교도소 수감 중에 “경찰 수사 과정에서 형사들로부터 ‘살인 교사를 받았다고 하면 형이 감면된다’는 거짓 회유를 받아 법정에서 사실과 달리 위증을 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사실은 살인 교사는 없었고 단지 고민하는 고모를 위해서 피해자를 납치해 사촌 오빠인 김판사를 그만 만나라고 위협하려다가 총기 오발 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이다”라고 진술을 번복했다. 윤씨는 이들의 주장을 근거로 윤남신과 김용기를 ‘위증죄’로 고발했다. 만약에 이들의 ‘위증죄’가 인정된다면 윤씨의 살인 교사 혐의는 벗겨지게 되고 재심이 열려 무죄로 석방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2008년 7월에 열린 윤남신과 김용기에 대한 위증죄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스스로 유죄라고 주장하고 검찰은 오히려 피고인들이 무죄라고 주장하는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유죄’ 주장이 순수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다른 목적’을 위해 스스로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고 있다고 결정하면서 이들이 경찰 수사와 뒤이은 재판 과정에서 했던 최초 진술에 더 신빙성이 있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법에 따라 피고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무죄 판결에 불복해 항소할 수 없으며 검찰은 항소 이유가 없어 항소를 제기하지 않아 그대로 이들의 위증죄는 무죄로 결정되게 된다. 윤씨, 윤남신, 김용기의 무기징역형에는 아무 변화도 발생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에게 남은 한

살인범들과 교사범은 검거되었고 이들의 갖은 술수와 꼼수에도 법의 엄정한 심판이 내려졌다. 하지만 피해자 유가족의 마음속 한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실제로 살인을 교사하거나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아무 죄 없는, 앞길이 창창했던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사촌 오빠인 김판사인데, 그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해자는 정직하고 정의로운 법조인을 꿈꾸던 법대 4학년 여학생이었다. 공부하다가 의문이 생기면 교수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했으며 학우들과도 지극히 원만하고 친근한 교우 관계를 유지했던 모범생이었다. 비록 사촌이기는 하지만 김판사와 만나거나 가깝게 지낼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돈을 쫓아 사랑도 없는 결혼을 했던 비겁한 김판사가 자신의 결혼 생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아무 상관없는 피해자를 끌어들여 편집광적인 장모의 악마 같은 손아귀 속으로 던져 넣었다는 것이 유가족의 판단이었다. 김판사는 법원으로부터 아무런 징계나 제재도 받지 않았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이런 내용을 피해자의 모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남겼고 이 글은 여전히 인터넷상에서 조회가 가능하다.

김판사는 사건 발생 이후 10년 동안 법원에 남아 있었다. 지난 2월 법관 임관 10년째를 맞아 재임용 대상이 되었고, ‘적격 심사 대상’으로 통보받자 사표를 제출했다. 현재 ㄷ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재직 중이다.

김판사의 처가인 제분회사는 지금도 활발한 기업 활동을 하는 상장 기업이고 장인 류 아무개 회장은 체육단체 회장직을 맡는 등 여전히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류회장은 부인 윤씨와 이혼했다.


영화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제공
모든 종교에서 금지하고, 어떤 나라에서든 가장 무거운 형벌로 처벌하는 살인은 그만큼 범행에 심리적 부담이 뒤따른다. ‘웬만한 이유와 사정’이 있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 범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범인의 정신장애나 이상심리로 인해 특별한 이유 없이 행하는 이른바 ‘묻지 마 살인’이나 ‘연쇄 살인’을 제외하면 살인 범죄 뒤에는 아주 강한 ‘원한’ 등의 감정이나 거액의 ‘금품’ 등 커다란 이해관계 혹은 질투에 사무치는 ‘치정 관계’ 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 보니 잔혹하고 충격적인 살인 범죄의 특성에 비해 범인 검거와 해결률은 매우 높다. 피해자의 신원만 확인되면 그 피해자와 원한, 금품, 치정 등으로 얽혀 있어 ‘범행 동기’를 가질 만한 주변 사람을 찾아 그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고 주변 수사를 하다 보면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게 된다. 그런 뒤 그에 대한 체포와 압수수색 등을 통해 증거를 확보하게 되면서 사건이 해결되는 수순을 밟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원한이나 치정 등 ‘감정’을 동기로 한 살인은 흥분과 감정 표출이 수반되다 보니 범인이 현장에서 이성을 잃고 증거나 흔적을 남기기 쉽다. 하지만 청부 살인의 경우에는 ‘살인 동기’를 가진 자와 ‘실제로 살인’을 행하는 자가 다르다는 특징이 작용하면서 현장 상황이 달라지고 수사를 어렵게 만든다.

피해자와 직접적인 원한이나 치정 등 감정이 없는 살인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차분하고 계획적으로 범행을 하기 때문에 현장에 증거나 흔적이 잘 남지 않으며, 실제로 살인의 동기를 가진 자는 현장에 가거나 직접 범행에 개입하지 않아 알리바이가 입증되고 어떠한 증거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 의지가 강하고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철저히 적용된다면 한쪽으로는 철저한 현장 수사를 통해 살인범의 흔적과 범행 증거를 찾고, 다른 한쪽으로는 교사범과 살인범 사이의 연락과 금품 거래 행위에 대한 증거를 확보함으로써 용의자를 특정해 검거하고 그 혐의를 입증해낼 수 있다.

살인범이 살인 청부 대가 잔금 지급 등 ‘이익’을 위해 청부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경우 교사범의 범행을 입증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경찰의 수사만이 아닌 검사의 철저한 기소 전략과 능숙하고 집요한 법정 공소 유지 능력이 관건이 된다.

김판사의 장모 윤씨의 살인 청부 사건은 매우 치밀하게 계획되고 실행된 범죄로 그 수사와 입증이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경찰의 인터폴 국제 공조를 포함한 과학적 수사와 강한 의지로 용의자를 특정하고 청부 혐의를 밝혀낼 수 있었다. 또한 검사의 철저한 기소 전략 수립과 집요한 법정 공방을 통해 고위 전관 판사가 포함된 대형 로펌 변호인단의 강한 저항에 굴하지 않고 재벌 부인에 대한 살인 교사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Series) 표창원 교수의 사건 추적


1. 악마가 된 외톨이의 빗나간 분노의 돌진
- 1991년 10월 여의도 광장 차량 폭주 사건

2. 미군에 희생된 꽃다운 청춘의 절규
- 1992년 10월 동두천 주한 미군 범죄 희생자 윤금이씨 사건

3. 남자친구의 환심 사려 끔찍한 범행
- 1990년 유치원생 곽재은양 유괴·살해 사건

4. 만삭의 여인이 벌인 잔혹한 범죄
- 1997년 8월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 사건

5. 자녀 학대가 부른 끔찍한 패륜 범죄
- 2000년 5월 과천 토막 살인 사건

6. 고희 되도록 못 버린 ‘그놈의 도벽’
- 권력자 울리고 서민 웃겼던 대도 조세형 사건

7. 악마로 변한 살인자의 두 얼굴
- 1998년 부천 비디오 가게 살인 사건

8. '살인자' 꿈꾼 소년의 잔혹한 범행
-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다 잠자던 동생 도끼로 내리쳐

9.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
- 아홉 살 때 성폭행당한 여성이 20년 후 가해자 살해 ‘아동 성폭력’ 심각성 알린 김부남 사건

10. '짐승' 의붓아버지 죽인 비운의 여인
- '성폭력 특별법' 탄생시킨 김보은·김진관 사건

11. "유전 무죄, 무전 유죄" 탈주범의 절규
- 1988년 탈주범 지강헌 일당의 인질범 사건
 

12. 법대 여대생 꿈 짓밟은 판사 장모의 편집증
- 미행과 감시, 위협하다 킬러 고용해 살해

13. 기막힌 살인 누명 쓴 '억울한 3인조'
- 경찰, 가상 사건 꾸며내 범인으로 몰아, 2001년 속초 콘도 살인 암매장 사건

14. 무고한 인명 앗아간 '지옥 지하철'
- 1백92명 사망, 1백48명 부상한 최악의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15. 탐욕스런 선수들의 썩은 스포츠 정신
- 조폭과 승부 브로커들, 금전 동원해 선수 유혹한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

16. 무참하게 행복 짓밟힌 한 가족
- "웃음소리에 화가 나 살인했다"...2010년 서울 신정동 묻지마 옥탑방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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