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평양 주석궁’은 폭풍 전야?
  • 이영종│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2.12.18 13: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핵심 파워 장성택 ‘희생양’ 될 수도…‘김정남 망명설’ 불씨도 여전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오른쪽) 등과 함께 지난 11월 조선인민군 제534군부대 직속 기마중대 훈련장을 시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1월 중순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제534군부대 직속 기마중대 훈련장을 찾았다.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전송한 당시 장면에는 김정은을 중심으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현영철 총참모장이 말을 탄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장성택의 말 장식이 다른 간부들의 것과 다른 게 우리 대북 정보 분석관들의 눈에 포착되었다. 장성택의 말고삐에는 금속 장식이 띠 모양으로 박혀 있고, 이마 끈 한가운데는 원형의 별 모양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김정은의 말에 원수 계급장이 달린 것과 유사했다.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로열패밀리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확인케 한 광경이었다.

장성택의 부인이자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 노동당 비서의 말에도 같은 문양이 또렷이 드러났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의 말도 마찬가지였다. 정보 당국자는 “마치 중세 유럽의 왕조 패밀리가 행차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라며 “말에게까지 계급장과 특별한 문양을 씌워 김정은 일가가 선택받은 특별한 신분임을 과시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장성택 힐난한 우동측, 실각당하기도

김정은 체제는 출범 1년을 맞으면서 일단 권력의 기본 틀을 잡아나가는 형국이다. 김정일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은은 지난 1년 동안 후계 구도 안착에 공을 들였다. 7월 리영호 총참모장이 전격 숙청되는 것을 신호탄으로 평양에는 새로운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하려는 피바람이 불었다. 군부를 중심으로 숙청과 강등이 이어지면서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권력의 부침과 사활을 건 충성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승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역시 로열패밀리이다. 이들이 평양 주석궁을 굳건히 장악하고 있다. 대신 측근들은 부침을 겪고 있다. 김정은의 군부 과외교사 리영호와 김일철 전 인민무력부장, 우동측 전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 등은 권력을 잃었다. 이른바 김정일 운구차의 좌측을 맡아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군부 3인방의 완전 몰락이다.

김정은을 제외한 로열패밀리 가운데 평양 주석궁에서의 핵심 파워엘리트는 역시 장성택 부위원장이다. 최근 들어 김정은을 수행하는 그의 모습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과거 처남인 김정일에 눌려 ‘만년 2인자’로 설움받던 굴레를 벗어던지겠다는 기세이다. 최근에는 권력 서열도 상승 기류를 탔다. 그의 이런 모습은 지난해 12월 김정일 장례식장에 대장 군복 차림으로 등장하면서 예고되었다. 당시 그런 장성택을 향해 “쟤는 뭔데 군복을 입고 설치냐”라고 볼멘소리를 했던 우동측이 첩보망에 걸려 보위부 실세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는 숨겨진 비화가 국내 정보망에 포착되고 있다.

장성택을 직접 만나본 우리 정부 당국자나 전문가들은 그가 호방한 성격에 한국과 다른 외국 사정에도 비교적 밝다고 말한다. 2002년 10월 경제 시찰단으로 9일간 남한을 방문했을 때 언론의 시선은 그에게 쏠렸다. 그는 시가 100만원이 넘는 발렌타인 30년산 양주로 연거푸 폭탄주를 만들어 먹고 룸살롱을 가보자고 말해 우리 관계자들을 당혹케 했다. 폭음 때문에 이튿날 출발 일정이 늦어져도 북측 인사 누구 하나 장성택의 호텔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장성택은 지난 11월 신설된 국가체육지도위원장에 올랐다. 북한 권력의 핵심 인사들이 망라된 조직이다. 마치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0년대 대선 가도를 향한 과정에서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관심은 장성택의 쾌속 질주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냐로 모아진다. 장성택은 김정일 생존 시부터 자신이 주도해온 평양시 현대화 사업을 계속 진행 중이다. 지난 8월 베이징을 방문해 북·중 합작으로 추진되는 황금평 개발 프로젝트와 나선특구 개발 사업을 중국 지도부와 논의하는 등 외자 유치 사업도 벌이고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김정은이 장성택의 입지를 뒤흔들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김정은 권력에 심각한 누수가 생기거나 식량난 등에 따른 주민 반발이 극심해질 경우 장성택이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김정일이 후계 수업을 통해 김정은에게 장성택을 다루는 노하우를 전수했을 것이고, 거기에는 필요할 경우 장성택을 제물로 삼으라는 처방이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지난 11월 배구 경기를 관전 중인 김정은과 부인 리설주. ⓒ 연합뉴스
리설주·김여정 ‘여풍’의 향방도 주목

최근 공개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평양 주석궁의 진정한 ‘어른’은 김경희라는 것이 정설이다. 김정일의 여동생이라는 점은 그녀를 로열패밀리의 안방마님으로 자리 잡게 했다. 김경희는 2008년 여름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당시 김정은 후계 지명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사후에는 장성택, 최룡해와 ‘후견 3인방’을 이루며 사실상 김정은 체제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보 관계자는 “김경희가 최근 싱가포르에서 병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며 “김정은 수행을 활발히 하는 남편 장성택 쪽으로 권력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분위기이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른바 백두 혈통의 좌장 격이라는 점에서 권력 기반이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는 장성택과는 역시 비교가 되지 않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의 로열패밀리에서 최근 가장 새롭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은 단연 부인 리설주이다. 그녀는 지난 7월6일 관영 조선중앙TV에 김정은과 함께 모란봉악단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이 방영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지만 같은 달 25일 능라인민유원지 개관 행사에 나온 그를 ‘부인 리설주 동지’로 호칭하면서 베일을 벗었다.

북한 최고 지도자의 부인이 공개 석상에 등장한 것 자체도 눈길을 끌었지만 파격적인 패션 스타일과 행보는 북한 안팎에 충격을 던졌다. 리설주는 김정은과 팔짱을 끼고 팝콘을 나눠먹는 모습도 보였다. 샤넬풍의 옷차림에 크리스찬 디올 명품 백을 들고 나선 그의 ‘청담동 며느리’ 패션도 연일 관심거리가 되었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의 행보도 향후 관심거리이다. 김정일 장례식에 검은 상복 차림으로 나타나 눈물짓던 김여정은 요즘 명랑 소녀로 변신했다. 특히 지난 7월 공개 행사장에서의 돌출 행동은 화제가 되었다. 고모 김경희도 부동자세로 선 행사에서 그는 오빠 김정은이 꽃다발을 받고 거수 경례를 하자 재미있다는 듯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의전·경호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그를 막지 못했다. 오빠의 그늘에 가려 은둔해 있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보좌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아직은 나이가 어리지만, 향후 성숙해지면 김정일 시대 김경희가 가졌던 로열패밀리 내의 위상보다 훨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낳고 있다. 

김정일의 말년을 함께하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온 김옥의 거취도 한때 관심을 끌었다.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의 여자로 발탁된 김옥은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가 2004년 5월 숨지자 그 자리를 대신했다. 미망인에 준하는 예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후계 권력과 관련해서는 거의 입지가 없는 상황이라는 평가이다.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의 향후 행보도 주목되지만, 당분간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김정은 체제는 이제 출범 2년차를 맞았다. 전격적인 장거리 로켓 발사 성공은 김정은 체제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메워주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김정은으로서는 자신감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이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보면 어느 것 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 무엇보다 경제 문제의 돌파구가 없다는 것이 아킬레스건이다. 주민들의 충성심을 결집시키는 데 핵심적인 김정은 우상화도 김정일 시대와는 차원이 달라졌다.

군부를 주축으로 한 권력층의 동요 우려와 주민 불만에 대비하려는 듯 북한은 연일 반체제 색출에 매달리고 있다. 김정은이 직접 국가안전보위부 등 공안 기관을 방문해 “속에 칼을 품고 때를 기다리는 자들을 짓뭉개버리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의 공개 행사에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호 병력이 등장하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도 있다.

김정은 권력의 중심축인 평양 주석궁 내부에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28세 젊은 지도자의 리더십이 2천4백만의 평양 공화국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어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로열패밀리 사이의 작은 알력은 권력 암투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로켓 발사라는 도발 행위로 한국·미국은 물론 중국의 새 지도부까지 불편한 심기이다. 연초부터 유엔의 국제 제재 등으로 압박의 파고가 밀어닥칠 경우 권력 핵심부가 요동칠 수 있다. 2013년 김정은 체제의 평양 주석궁 내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다. 


CIA 통해 서방으로?…끊이지 않는 김정남 망명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이복형이자,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의 서방 망명설이 언제 현실화할지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지난 11월 서울의 대북 소식통들에 의해 유력하게 제기된 김정남 망명설은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한 상태이다. 국정원 등 정부 관계 당국이 강하게 부인한 데다 뚜렷한 후속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추적해온 관측통들은 심상치 않은 물밑 움직임이 전개되는 것 같다고 귀띔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있는데도 김정남이 모습을 드러내거나 입을 열지 않고 있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외신기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자기 입장을 밝혀온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김정남은 2010년 9월 이복동생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화되자 외국 언론과 인터뷰 등을 통해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등 껄끄러운 입장을 보여왔다. 김정은이 국가안전보위부를 동원해 김정남의 평양 근거지를 습격하고, 해외에 암살조를 파견하는 등 각을 세워온 데 대한 앙금 때문이었다.

후견인 역할을 해온 아버지 김정일이 사망하자 김정남은 올 초 거주지인 마카오에서 행적을 감췄다. 싱가포르 체류설이 나돌고 있지만 현지의 소식통은 “그가 여기 머무르고 있다면 교민사회에 소문이 나거나 행적이 포착될 텐데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일각에서는 김정남이 이미 미국 CIA를 통해 서방으로 망명했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는다.

김정남의 망명은 김정은 체제에 적지 않은 파장을 던질 수 있다. 우선 평양 로열패밀리들의 은밀한 속살이 서방 정보기관에 생생하게 노출된다는 문제가 있다. 베일에 가려 있던 그들의 생활 패턴이 파악되는 것이다. 또, 김정일의 직계 혈육이 탈북 대열에 합류한다는 의미가 있다. 김정남의 망명 결행이 성사될 경우 김정은은 상당한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취약한 권력 기반에 로열패밀리 멤버가 해외에서 ‘반(反)김정은’ 목소리를 높일 경우 평양 권력층에 동요가 일어날 가능성 때문이다. 당국자는 “김정남이 이복동생인 김정은의 권력을 뒤흔들기 어렵겠지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