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2012 ‘올해의 인물’ 박근혜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2.12.2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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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와 최종 경합 끝에 선정 최초의 여성 대통령·부녀 대통령·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1987년 직선제 도입 이후)의 과반(득표율 기준) 대통령, 최초의 부녀 대통령.”

18대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화려하다. 박당선인은 2007년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2천여 표 차이로 고배를 마신 후 5년 만에 청와대 입성이라는 꿈을 이루었다. 아버지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로 계산하자면 34년여 만에 청와대로 돌아온 것이다.

<시사저널>은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박당선인을 ‘2012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시사저널>은 1989년 창간 이후 해마다 ‘올해의 인물’을 선정해 발표해왔다. 지난 2010년부터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독자들의 의견도 반영하고 있다. 박당선인과 함께 ‘올해의 인물’을 놓고 마지막까지 경합한 인물은 지난 2012년 7월께 발표한 <강남스타일>을 통해 월드스타로 발돋움한 가수 싸이였다. 싸이는 미국 유력 잡지인 <타임>이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 연합표토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박당선인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걸어왔다. 박 전 대통령이 1961년 5·16 쿠데타를 거쳐 1963년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그의 나이 불과 열 살이었다.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을 온전히 ‘대통령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보낸 것이다. 1974년 8월15일, 어머니인 고 육영수 여사의 서거로 인해 대학을 갓 졸업한 22세 때부터 대한민국의 ‘퍼스트레이디’ 역할도 떠맡았다. 1979년 10월26일에는 아버지마저 시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청와대를 나와 18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한 후, 박당선인은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요청으로 정치에 발을 내딛으면서 ‘선거의 여왕’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2006년 6월 당 대표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2006년 5월,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유세 도중 커터칼에 의해 오른쪽 뺨이 찢겼을 당시 병상에서 “대전은요?”라고 말해, 대전시장 선거 판세를 뒤엎은 일화는 유명하다.

12월21일 서울 지하철 4호선 회현역 부근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당선 사례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연합뉴스
박당선인은 이번 대선에서 50대 이상 고연령층 유권자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20~30대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젊은 층을 비롯한 절반에 가까운 야당 지지층을 껴안아야 할 숙제가 남은 셈이다. 박당선인도 당선 후 첫 일성으로 ‘화해와 탕평책을 통한 국민 대통합’을 강조했다. 새 정부 출범 이전에 ‘국가지도자연석회의’를 열어 야당 지도자들과 머리를 맞댈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같은 약속은 역대 대통령 당선인들 모두가 당선 초기에 다짐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최악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2007년 <시사저널>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지만, 2011년에는 ‘최악의 인물’에 뽑히는 수모를 겪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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