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은 그만, 이젠 ‘인조 모피’ 시대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2.12.3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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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보호 단체, 이색 퍼포먼스 버무린 패션쇼 열어

국내 최초 인조 모피 패션쇼가 12월25일 오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렸다. ⓒ 시사저널 임준선
패션은 그 자체로 소통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저항의 깃발이 되어 펄럭이기도 한다. 지난 12월25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는 7백여 명의 사람이 모여 이전과 다른 성탄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국내 최초 인조 모피 패션쇼가 열렸기 때문이다. 인조 모피, 얕잡아 말한다면 ‘가짜 모피’를 선보이는 행사를 굳이 고급 호텔의 으리으리한 홀을 빌려서 해야 했을까. 의문은 곧 풀렸다. 박소연 동물사랑실천협회 대표가 무대에 올라 직접 사회를 맡아 행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동물사랑실천협회는 2011년 6월2일 서울 반포대교 남단 인공 섬인 세빛둥둥섬에서 열린 이탈리아 명품 모피 브랜드 ‘펜디(Fendi)’ 패션쇼 행사장 앞에서 ‘피로 물든 모피 쇼’ 퍼포먼스를 벌이고 “노 퍼(No fur)”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였던 단체이다. 그런 단체가 서울 강북의 고급 호텔에서 인조 모피를 홍보하는 패션쇼를 벌이니 그 내막이 궁금했다.

박대표는 “밍크 코트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 밍크가 2백 마리까지 도살되어야 한다. 야생 동물인 밍크와 여우, 담비, 너구리 등은 고작 살아 있는 코트로 취급되며, 설 수도 없고 제대로 걷기도 힘든 좁은 우리 안에서 집단 사육되고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정신병과 자해, 수족 절단, 동족 살해 등의 극한적인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가죽이 벗겨지는 동안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죽어가는 경우도 많다”라고 학대당하는 동물들의 현실을 전했다.

몇백만 원 하는 모피 코트를 입고 호텔 뷔페로 향할 만한 계층의 사람들을 그 자리로 오게 한 것이다. ‘사랑을 입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이날 행사는 세계적인 동물 보호 단체 ‘PETA(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와 ‘동물사랑실천협회’ 등 국내 동물 권리 운동 단체들 그리고 국내외 인조 모피 전문 업체들이 공동으로 마련했다. 인조 모피의 우수성을 알리는 일이 동물 보호 운동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 시사저널 임준선
10분의 1에 불과한 값…“사랑을 입는다”

관람객들은 모피(fur)의 10분의 1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인조 모피 제품이 얼마나 고급스러우며 품질이 좋은지 확인하고, 1인당 15만~20만원짜리 외식 비용을 동물 사랑을 실천하는 단체에 기부했다. 호텔 관계자는 “인조 모피 패션쇼가 호텔에서 열리다니 이색적이다. 게다가 비건(vegan: 엄격한 채식주의자. 고기는 물론 우유, 달걀도 먹지 않음. 어떤 이들은 실크나 가죽같이 동물에게서 원료를 얻는 제품도 사용하지 않음) 채식 식단이 만찬으로 제공된 것은 호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라며 신기해했다. 그렇게 패션을 매개체로 ‘공존’의 의미를 되새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동물 보호’라는 취지에 공감했다.

패션쇼 무대를 꾸민 디자이너들은 “최근 샤넬, 보테가 베네타 등 해외 패션업계에서도 인조 모피가 최신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날 손정완·홍승완·김재현·송자인 등 국내 유명 디자이너들이 45벌의 다양한 인조 모피 의상을 선보였다. 이들과 함께 국내 인조 모피 전문 업체인 경원·퍼스몰·인성·하이텍이 참가했고, 해외 비건 의류 업체인 ‘SM Celestials’도 인조 모피를 선보였다.

이 행사에서 PETA는 모피 반대와 채식 선언 등으로 동물 보호에 앞장서온 영화배우 김효진씨에게 공로상을 주었고, PETA의 2013 공식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또, 40마리가 넘는 유기견을 입양해 돌봐온 가수 양하영씨, 동물 보호를 실천해온 미스코리아 정소라씨와 모델 이정민씨가 국내 동물 보호 단체들이 공동으로 수여하는 동물 평화상을 받았다. 동물 보호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온 소프라노 조수미씨도 참석해 눈길을 모았다.

모피 뛰어넘는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을까

1990년대 중반부터 샤넬의 칼 라거펠트, 셀린느, 요지 야마모토 등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선보이면서 인조 모피는 미국·유럽 등지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동물 보호라는 취지에 공감한 많은 사람이 모피(fur) 대신 인조 모피(fake fur)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 모피는 말 그대로 ‘가짜 모피’이다. ‘짝퉁’이니 싸구려 취급을 받아야 하는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 ‘가짜 모피’가 눈에 띄는 발전을 거듭해 새로운 이름을 달아줄 것을 요구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피 냄새 나는 ‘모피’를 뺀 새로운 이름표를 붙여달라는 것이다.

독립된 신소재로서 모피와 비교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주문을 하기도 한다. “패션은 파괴하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79)는 “인조 모피가 승리했다. 인조 모피의 눈부신 발전으로 실제 모피와의 차이점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 겨울의 최대 트렌드는 인조 모피이다”라고 말했다.

1960~70년대 명품 모피 브랜드인 펜디의 성공을 이끌기도 했던 세계적 디자이너가 인조 모피의 진화를 지켜보면서 결국 극찬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디자인이나 보온성에서 전혀 뒤지지 않고, 보관하기 편한 데다 착한 가격…. 그러니 그런 요구가 나올 만하다.

칼 라거펠트의 지적에 힘입어 패션계에서는 인조 모피는 모피의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디자이너 송자인씨는 인조 모피에 대해 “모피는 동물 냄새가 날 수 있고 알레르기라는 부작용을 야기할 수도 있다. 또, 무겁고 변질될 수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인조 모피는 가벼운 데다 쉽게 변질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다루기 쉽고 가격 경쟁력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인조 모피는 동물 보호 차원에서 다루어질 옷감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옷감이라는 것이다.

‘퍼(fur)’가 어울릴 듯한 호텔 행사장, 조용하던 객석은 어느새 술렁이며 여기저기서 “No fur”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가혹하게 죽임당하는 개와 고양이의 진실 

동물 구조 단체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모피 산업에서는 양심이나 자비, 도덕이란 없다. 그들은 야생 동물을 비롯해 정원에서 훔쳐온 애완동물, 사육장에서 키워진 모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죽인다. 그저 학대와 이기적인 탐욕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모피의 진실이다.”

다음은 동물사랑실천협회가 전하는 ‘모피의 불편한 진실’이다.

전 세계 모피의 80%는 모피 농장에서 얻어진다. 야생 동물에서 얻어지는 20%는 덫·밀렵·사냥 등의 야만적인 방법을 거친다. 한 해 동안 모피를 위해 죽임당하는 아기 하프물범의 수는 7만 마리이다. 매년 모피를 위해 희생되는 동물의 수는, 밍크 5천만 마리, 여우 4천만 마리, 개 2백만 마리, 고양이 2백만 마리, 친칠라 25만 마리, 담비 15만 마리, 오소리10만 마리, 너구리 10만 마리이다. 집계가 어려운 토끼 또한 매년 수천만 마리가 희생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모피를 얻기 위해 고문에 가까운 사육과 도살이 행해지는 것도 여전하다. 특히 개와 고양이에 대해 드러난 사실도 충격적이다. 중국 북부에서만 2백만 마리가 넘는 개와 고양이가 매년 모피를 위해 희생되어 전 세계로 팔려나간다. 중국 북부 지역은 혹한으로 인해 촘촘하고 풍성한 털을 가진 개와 고양이들을 사육할 수 있다. 개와 고양이들은 공중에 매달아 고무호스를 입에 넣어 물로 익사시킨다.

더 놀라운 것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동물들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중국, 태국, 필리핀 등지에 있는 개와 고양이 집단 수용 시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필리핀의 고양이 도살장에서는 하루에 100마리가 넘는 고양이들이 도살되어 가죽이 벗겨진다. 유두가 두드러지지 않는 수고양이가 더욱 상품 가치가 높다. 그래서 도살장이 있는 도시에서는 수고양이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여러 도시에서 고양이들이 포획당한다. 일부는 길고양이들이지만, 대다수가 사람들이 키우는 애완 고양이들이다.

포획된 고양이들은 6시간이 넘도록 철창 안에 집단적으로 갇혀 도살장으로 향하며, 다른 고양이들이 보는 앞에서 목매달려 죽는다. 필리핀 농장에서는 부츠와 지갑, 코트의 트리밍용으로 고양이 모피를 일본으로 수출하며, 가죽을 벗긴 고양이들은 소시지로 만든다. 장갑과 부츠, 코트의 가장자리에 부착된 ‘퍼 트리밍’은 거의가 개와 고양이의 모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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