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인도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2.12.3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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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 집단 성폭행 사건 뒤 격렬 시위 잇따라

지난 12월23일, 한 여대생의 집단 성폭행 사건에 항의해 뉴델리 거리로 나온 여성 시위자가 경찰의 물대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범인 처벌’을 외치고 있다. ⓒ AP연합
2012년 12월16일. 연말 분위기로 들썩이던 인도 뉴델리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여대생이 남자친구와 시내버스를 탔다. 그 후 돌연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먼저 버스에 타고 있던 청년 여섯 명이 이유도 없이 쇠막대기로 두 사람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은 버스기사였다. 얻어맞은 남자친구가 쓰러지자 청년들은 혼자 남은 여성에게 달려들었다. 이들은 여성을 집단 강간했다. 여성은 23세의 의과대학생이었다. 범인들은 초주검이 된 두 남녀를 길가에 버려두고 도주했다. 비극이 발생한 버스는 학생들 통학용으로 사용되는 스쿨버스라는 점에서 충격을 더했다. 피해 여성은 병원에서 수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장기가 망가져 일부를 잘라내야 했다. 여성은 겨우 의식을 회복했으나 그가 입은 신체적·정신적 상처가 치유되려면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이 의사들의 소견이다.

지금 인도 사회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큰 불만은 관리들의 부패이다. 여기에 ‘치안 부재’라는 문제가 겹쳐 있다.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가장 피해를 보는 이는 여성들이다. 인도에서는 연간 수만 건의 강간 사건이 발생한다. 보고되지 않는 사례까지 고려하면 실제 강간 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 아무리 강간이 흔한 나라라지만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집단 강간은 희대의 사건이었다. 마냥 방치하는 정부와 경찰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공감대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부패와 뇌물 그리고 거기에 뒤따른 치안 공백에 이를 갈고 있던 시민들은 폭발의 출구를 찾은 듯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위대 “범인, 교수형에 처하라”

12월22일 토요일, 뉴델리 거리는 시위대로 뒤덮였다. 벌써 7일째 접어든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수만 명의 군중은 ‘정의’와 ‘치안 강화’를 외쳤다. 시위대는 종일 경찰과 충돌했는데 경찰차가 일부 불타거나 전복되었고 국회의원의 승용차도 공격당했다.

시위가 과격해지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물대포와 곤봉도 동원되었다. 시위대 35명과 경찰관 37명이 부상당했다.

한 여성 시위자는 “수백 명의 강간범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데 경찰은 엉뚱하게 시위대만 잡고 있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항의 물결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다음 날인 23일 일요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일부 시위대는 왕궁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수실 쿠마르 신데 인도 내무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시민들의 자제를 호소했다. 하지만 항의 시위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쿠마르 신데 내무장관은 “정부가 여성 안전을 도모할 것이며, 치안 확보를 위한 4단계 조치를 취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야간에 버스 운행 횟수를 늘리고, 각 버스에는 GPS(위성 항법 장치)를 장착하며, 운전사에게는 신분증을 착용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통량이 많은 도로에 경찰관을 증원 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경찰은 가해자 6명을 체포하고 관련 증거를 확보해 반드시 법정에 세우겠다고 말했다. 경찰의 약속은 시위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뉴델리 대학 학생들은 범인들을 교수형에 처하면 시위를 중단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인도에서는 여성이 강간을 당하면 결혼할 수 없다. 그래서 강간당하는 수많은 여성이 신고를 꺼린다. 인도에서 강간은 지난 6년간 25% 증가했다고 한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도는 여성에게 가장 안전하지 않은 나라로 분류된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이다. 최근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교육과 경제적 불균형에 따른 갈등이 많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집 안에 머물러야 했지만 지금은 야간에도 시내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이런 행동에 대한 편견과 여성 인권을 경시하는 풍조가 더해져 여성에 대한 성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인구 구성 면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인구의 절반이 25세 이하이고 ‘남아 선호 사상’ 탓에 ‘젠더사이드(여성 집단 살해)’가 벌어지기도 한다. 인구 구성비는 기형화하고 그에 따른 성적·사회적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인도 조사국의 자료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 남아 인구 1천명당 여아는 9백1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에 계류된 강간 사건만 10만건

강간 사건의 수사는 여전히 미진하다. 힌두스탄타임스에 따르면 강간범이 처벌된 사례는 20년 동안 44%에서 26%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팔짱만 낀 채 구경하고 있는 인도 사법부가 한몫하고 있다. 현재 인도 법원에는 약 10만건의 강간 사건이 계류되어 있으나 재판이 언제 열릴지는 까마득한 상태이다. 권력이 재판에 개입하고 뇌물이 제공되는 등 여러 방법이 재판을 한없이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강간범 가중 처벌법’을 조속히 입법화하라는 요구가 빗발쳐도 의회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이 가장 심각하다. 여성들 중에서는 “거리의 깡패보다 경찰이 더 무섭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경찰청장을 파면하라는 요구는 묵살되었다. 인도에서는 매년 경찰과 관련된 인권 유린 고발이 약 8만건이나 접수된다. 이 가운데 태반이 ‘강간’이나 ‘성폭행’이다.

국제투명성기구(TI)에 따르면 인도의 부패 지수는 세계 1백76개국 중 94위이다. 부패는 과도한 규제와 복잡한 세금 제도 때문에 발생한다. 규제나 과세를 피하기 위해 뇌물을 쓰기 때문이다.

정치권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2008년의 경우 국회의원 5백23명 가운데 1백20명이 뇌물수수죄로 기소되었다. 대형 국책 사업에는 어김없이 의원들이 개입해 뒷돈을 챙겼다. 국제투명성기구의 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50%가 ‘뇌물을 주고 허가가 필요한 업무를 처리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인도의 트럭 운전사들이 지불한 뇌물 액수만 합쳐도 45억 달러에 이르며, 점포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의 60%는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친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스위스은행협회(SBA)의 보고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인도의 검은돈은 전 세계의 검은돈을 합친 것보다 많다. 또 다른 보고서는 인도가 소유한 스위스 은행 예금은 국가 부채의 13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패에 시달린 국민들은 버스 안에서 일어난 강간 사건에 충격을 받아 들고 일어났다. 뉴델리 거리를 메운 군중 속에서 유독 여성이 많은 이유는 부패의 사슬 속에서 여성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처럼 시위가 격화된 데는,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인도의 중산층 여성이고 사건 현장이 뉴델리 중심부여서 최근 사회 활동이 늘어난 인도 여성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낮은 계급의 저소득층 등 사회적 보호망이 취약한 여성들은 이런 피해를 입어도 그동안 반향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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