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분짜리 신년사, 그 행간의 의미
  • 진희관│인제대 통일학연구소 소장 ()
  • 승인 2013.01.0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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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일단 ‘예의 주시’·‘관망’ 유화 제스처… 이명박 정부 초기 때와 비슷

북한이 새해 첫날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육성 신년사를 발표했다. 과거 김일성 시대에 방송을 통해 발표하던 방식을 19년 만에 재현한 것이다. 김정일 시대에는 <로동신문>과 <조선인민군> <청년전위>라는 세 종류의 신문 사설을 통해 신년사를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김정은은 아버지 때의 방식을 버리고, 과거 할아버지 때의 방식으로 회귀한 것이다.

1월1일 오전 9시경부터, 사전 녹화된 것으로 보이는 영상이 조선중앙TV를 통해 방영되었다. 23분여의 영상으로 구성되었고 조선노동당사에서 녹화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정은 제1비서의 발언 중간중간에 박수 소리가 나올 때는 카메라가 청중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당사 외관의 정지 화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청중이 없는 장소에서 정면의 프롬프터를 읽어가는 형식을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주요한 구절마다 시작과 끝을 포함해 모두 18차례의 박수 소리가 들리며, 이때마다 노동당사 화면이 등장한다.

문장 구조와 내용 면에서도 19년 전과 거의 일치한다. 김일성 주석의 마지막 신년사인 1994년과 그 이전의 신년사들을 보면 ‘북한 주민과 동포에 대한 인사’ ‘지난 한 해의 성과에 대한 감사’ ‘새해의 목표 제시’ ‘조국 통일 문제’ ‘국제 관계의 과제’ 순으로 이어졌다. 이번 김정은 제1비서의 신년사 역시 이러한 순서와 같으며, 현실 환경에 따른 용어의 변화만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거의 모범 답안을 놓고 거의 유사한 형태로 2013년의 답안을 작성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월1일 북한의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조선중앙TV와 조선중앙방송 등 방송을 통해 육성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경제 강국 건설’의 해로 설정

이번 신년사에서 유독 강조한 부분은 지난해 발사된 장거리 로켓 광명성3호 2호기에 대한 내용으로, 이 부분을 낭독할 때는 가장 많은 네 차례의 박수 소리가 등장했다. 더욱이 올해의 구호로 “우주를 정복한 그 정신, 그 기백으로 경제 강국 건설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자!”를 채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켓의 성공적 발사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 밖에도 희천발전소와 단천항의 완공, 창전거리와 능라인민유원지 건설, 12년제 의무교육 실시 법령 제정을 큰 성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2012년을 ‘강성 국가의 대문을 여는 해’로 만들겠다던 내용과는 적지 않게 거리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이 주장하는 로켓 발사의 성공을 제외하면 나머지 사업들을 놓고 강성 부흥·강성 국가를 언급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2013년의 중요 과업을 ‘경제 강국 건설’로 설정하고 있는 것 또한, 과거 수년간 반복해왔던 분야별 과제들을 제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다만 “경제 지도와 관리를 개선해야 한다”고 하여 경제 관리 방식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띄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온갖 예비와 가능성을 최대한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없지만 찾아내자”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군사력에 대한 강조는 지난해에 이어 반복되었고, ‘일당백’의 개념이 다시 등장한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일당백’은 1963년 김일성 주석이 당시 인민군 창건 기념일이었던 2월8일에 한 연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대부분 군사력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으며, 일부 당 일꾼들을 재촉하거나 일반적인 사업에서 대중을 추동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천리마 기세’와 함께 사용해 노력 동원에 최선을 다하도록 추동하는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 올해 ‘일당백’이라는 용어가 강조된 것은 이 용어가 사용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통일 문제와 남북 관계에 대해서는 예년과 유사하게 많은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통일’은 “대원수님들(김일성-김정일)의 필생의 염원이고 유훈”이라고 개념 짓고 있는데, 통일을 위해서는 기존의 남북 합의인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이행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역시 예년과 유사하다. ‘조선의 반(反)통일 세력’에 대해서도 “대결 정책을 버리고 화해와 단합, 통일의 길로 나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상의 비난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향후 남북 관계를 예측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은 남측 정부를 거침없이 비난한 바 있다.

2012년 8월3일 북한 김정은 제1비서가 방북 중인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접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제 남북 관계의 공은 박근혜 정부에

2012년 신년 공동사설에서는 “남조선 ○○패당의 반인륜적·반민족적 행위는 온 겨레의 치솟는 분노와 규탄을 불러일으켰다. 남조선에서 집권 세력은 인민들의 준엄한 심판 대상으로 되고 있다”라는 대단히 거친 표현을 사용한 바 있고, 2011년에는 “남조선 당국의 무분별한 광란은 온 민족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냈다”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이와 비교한다면 올해의 표현은 대단히 유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지난 1년간 북한의 보도를 보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대해 대단히 거친 언급들을 상당수 쏟아낸 바 있다. “재집권을 위한 발악적 추태”(민주조선, 12월18일), “박근혜의 위선적 정치를 폭로”(민주조선, 11월13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박근혜의 반공화국 전면 대결 공약을 규탄”(조선중앙통신, 11월8일) 등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강경 논조는 12월19일 대선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박근혜 후보’가 아닌 ‘박근혜 당선인’이라는 점을 상당히 의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과거에 신랄하게 비난을 했을지언정, 이제는 공식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한국의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세는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직후와도 유사하다. 당시에도 2007년 12월 당선 이후 2008년 3월 말까지 북한은 조용히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다 2008년 3월26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언급하지 않았고, 뒤이어 김태영 합참의장 인사청문회에서 북한 핵 위기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 정밀 유도 무기로 선제공격이 필요하다는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북한의 반응은 일순간 매우 거칠게 바뀐 바 있다.

지금 박근혜 당선인측에 대한 북한의 조용한 반응은 ‘유심히 예의 주시한다’고 평가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 새 정부 구성 이후 박근혜 정부측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대해 어떤 판단과 정책 방향을 갖게 되는지가 향후 남북 관계를 예측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만일 이명박 정부와 같이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남북 합의를 무시하는 기조가 계속 이어질 경우 남북 관계는 초기부터 다시 파탄에 이를 것이며, 이후 상당 기간 대결 국면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 김정은 제1비서의 신년사 형태는 과거로 회귀했지만, 내용 면에서는 큰 변화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리고 북한의 언론들은 지난해 박근혜 후보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지만, 대통령 당선 이후 침묵을 지키면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 향후 남북 관계는 통일부장관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박근혜 정부의 첫 외교·안보·통일 분야 인선 방향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게 될 것이다. 남북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에서 공은 이미 박근혜 정부로 넘어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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