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지 못하면 죽는다”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3.01.08 16: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증권·카드·건설사들 ‘슈퍼리치’ 모시기 전쟁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소비자들은 지갑 열기를 주저하고 있다. 한때 호황을 누렸던 부동산이나 증권 시장 역시 ‘돈 가뭄’에 빠졌다. 탈출구로 거론되고 있는 곳이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최고급 소비 계층)이다. VVIP 시장은 장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 홀로 호황’을 거듭하고 있다. 부유층을 겨냥한 시장은 매년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기업들은 슈퍼리치(Super-rich·초우량 자산가)를 잡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1월3일 서울 강남 노른자위 땅인 청담동의 한 빌딩. 이곳은 한 달 임대료만 6천만원을 호가한다. 보증금만 30억원이 넘는 초고가 건물이다. 그럼에도 하나대투와 삼성, KDB대우, 한화, 유진 증권의 지점이 건물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었다.

9층에 위치한 하나대투증권 청담금융센터로 들어가 보았다. 내부는 고급 갤러리를 연상케 했다. 유명 작가의 조형물이나 그림이 먼저 눈에 띄었다. 전병국 하나대투증권 청담금융센터장(상무)은 “유명 작가 22명의 작품 44점이 사무실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상담실 역시 콘셉트에 따라 인테리어를 다르게 해서 운영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무실 한쪽에는 와인바도 마련되어 있었다. 고객들은 이곳에서 사교 모임이나 와인 파티를 갖기도 한다.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 역시 이 장소를 자주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건물에 위치한 한 증권사 지점의 경우 인테리어 비용만 15억원 이상을 쏟아부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난해 하나대투증권 청담금융센터는 예탁 자산만 2조8천억원을 기록했다. 본사를 포함한 97개 지점의 예탁 자산이 51조원 수준임을 감안할 때 상당한 성과였다. 청담금융센터가 개점한 2008년 초까지만 해도 자산은 3천억원에 불과했다. 그나마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자산은 1천2백억원으로 반 토막이 났다. 하지만 5년여 만에 자산을 20배 이상 부풀렸다. 전센터장은 “지점 방문 고객들은 대부분 볼 일만 보고 나간다. 예약만 하면 공간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VVIP를 유치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나머지 지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증권사별로 차이가 났지만, 청담동 지점이 부유층 공략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객 쟁탈전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인사가 전하는 일화 한 토막. 최근 한 재벌 그룹 계열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 인사는 자사 계좌로 옮기면 수수료의 20~30%를 모교에 기부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 CEO는 계열 증권사의 계좌를 모두 빼내 자사로 옮겼다고 한다. 매출이 수조 원에 달하는 중견 그룹의 오너들 역시 이곳의 단골손님이다. 이들 역시 다른 지역의 영업점을 이용하다가 최근 청담 지점으로 배를 갈아탄 경우이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부유층 고객 빼앗기 경쟁은 현재 한도를 넘어선 상태이다. 빼앗지 못하면 시장에서 도태되는 수준까지 왔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진 2008년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 금융 위기 초기만 해도 거래량이 많아 버틸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거래량도 반 토막이 났다”라고 토로했다. 업계는 지점 통폐합을 통해 구조조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흑자 지점이 적자가 나고, 다시 통폐합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브로커리지(위탁 매매) 수익은 한계에 도달했다. 신규 증권사 설립으로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IPO(기업공개)가 뚝 끊기면서 관련 수익 역시 감소하고 있다. 삼성증권이나 대신증권은 지난해 단 한 건의 IPO도 성사시키지 못했을 정도이다. 결국 자산 여력이 있는 슈퍼리치를 통해 ‘빙하기’를 탈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업계의 현실이다.

삼성증권은 이미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삼성증권은 지난해 금융 자산 30억원 이상의 초고액 자산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SNI본부’까지 신설했다. 수장 역시 지난해 말 승진한 방영민 부사장이 맡았다. 대우증권도 최근 집사 서비스로 불리는 패밀리 오피스(가문 자산 관리 서비스) 시장 진입을 서두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은 업황 부진에 따른 수익을 올리기 위해 큰손인 VVIP에 대한 공략을 강화하겠다는 뜻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경기 침체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기업들이 ‘슈퍼리치 모시기’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VVIP 시장이 침체된 내수 시장 탈출구?

부동산 역시 VVIP 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전국의 부동산 시장이 현재 거래 축소로 아우성을 치고 있다. 자금난을 견디지 못한 중견 건설사들의 부도도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10억원이 넘는 고가 아파트는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중견 건설업체인 대원이 최근 분양한 동탄2신도시 ‘대원 칸타빌’은 2.58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복층형 펜트하우스의 경우 12가구 모집에 61명이 몰리기도 했다. 송도(더샵 마스터뷰)나 안산(레이크타운 푸르지오) 등의 펜트하우스 역시 평균 10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나타냈다.

해당 건설업체들은 “일부 지역의 상황을 부동산 시장 전체로 연결 짓는 데는 무리가 있다”라고 말한다. 대원의 한 관계자는 “동탄의 경우 1기 신도시 때 입주했던 사람들이 옮겨오면서 분양률이 높았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분양자들은 대부분 인근에 거주하는 실수요자들이다”라고 설명했다. 대우건설측도 “어떻게든 분양가를 낮추어 분양률을 높이는 것이 회사의 고민이다. 고가 아파트를 통해 시장이 살아날지는 관심 사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의 바닥 심리는 달랐다. 고가 아파트 거래가 침체된 부동산 시장의 활력소가 되기를 일정 부분 기대하는 눈치였다.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갤러리아포레는 최근 분양을 마무리했다. 이 아파트는 분양가만 40억~55억원에 달하는 고가 아파트이다. 때문에 분양 초기부터 ‘강북의 타워팰리스’로 불리며 부유층의 주목을 받아왔다. 결과 역시 나쁘지 않았다.

시공사인 한화건설 관계자는 “일부 물건은 10%의 프리미엄을 얹어 거래되고 있다. 주민의 70% 정도가 강남에서 넘어온 부유층으로 파악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올 상반기 실거래가 순위에서도 갤러리아포레가 1~5위를 싹쓸이할 정도로 거래도 활성화되고 있다. 부자들이 그동안 자금 시장을 미리 읽고 선도해왔다는 점에서 올해에는 부동산 경기 회복을 일정 부분 기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도 지난해 7월 ‘2012 한국 부자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비슷한 전망을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슈퍼리치의 자산은 여전히 부동산에 편중되어 있었다. 자산이 많을수록 부동산의 비중 또한 높게 나타났다. 보고서는 “50억원 미만의 부동산 자산 비중은 41.8%에 불과했다. 하지만 100억원 이상 슈퍼리치의 부동산 비중은 78.3%에 달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라고 설명했다.

한 건설사 대표가 VIP 고객을 초청해 자사 아파트를 소개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카드업계 빗나간 VVIP 마케팅도 논란

이렇듯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지만, ‘슈퍼리치’를 겨냥한 VVIP 시장은 여전히 호황을 누리고 있다. 부유층 고객을 유치하려는 경쟁 역시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발행된 국세청 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에 1억원대 연봉자는 2백%나 증가했다. 상속세는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체감 경기 하락이 극에 달했던 지난해도 마찬가지였다. 1억원 이상 연봉자는 2010년 2백74만9백71명에서 2011년 말 3백61만5백93명으로 30% 이상 증가했다. 특히 10억원을 초과한 초고액 연봉자 역시 19%나 늘어났다. 상속된 재산 역시 2011년에 6%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증권이나 건설업계가 부유층 확보에 목을 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VVIP 시장이 ‘돈맥경화’를 치료할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부유층의 소비가, 침체된 경제를 내수 증대-생산 증가-고용 확대의 선순환 구조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부터 새 정부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더하다.

건설업계에서는 이미 빠르면 올해 초, 늦어도 올해 말에는 부동산 경기 그래프가 반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 대형 건설업체 임원은 “아파트값이 가장 높게 치솟던 때가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YS(김영삼) 정부 때 공급량이 크게 줄면서 아파트 가격이 폭등했다. MB(이명박) 정부 들어 아파트 공급이 크게 줄어든 만큼 시장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려를 보이기도 한다. 일부 부유층의 빗나간 소비 행각이나, 일부 기업의 잘못된 VVIP 마케팅으로 양극화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탓이다. 특히 카드업계는 최근 VVIP 회원에게 연회비를 초과하는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카드업계는 최근 경영난을 이유로 일반 신용카드의 부가 서비스를 절반 이상 줄였다. 하지만 VVIP 카드에는 파격적인 부가 혜택을 유지하고 있다. 더 블랙(현대카드), 라움O(삼성카드), 인피니트(롯데카드), 테제(KB국민카드), 클럽원(하나SK카드), 프리미어(신한카드) 등이 VVIP 카드의 대표 격이다. 이들 카드의 연회비는 100만~2백만원에 달한다. 연회비만 내면 5백만~1천만원의 혜택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 당국은 지난해 중순 카드사의 VIP 마케팅에 대한 점검에 착수했다. 주요 카드사로부터 VIP 영업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분석에 들어갔다. 삼성·신한·국민 카드 등에도 전담팀을 파견했다. 그러자 카드사들은 언론을 통해 “초우량 고객에 대한 혜택을 대폭 줄이겠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예상된다.

현대·삼성 등 주요 카드사들은 한결같이 “현재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 중이다”라고만 답했다. 서영경 서울YMCA신용사회운동사무국 팀장은 “VVIP 카드로 매년 100억원 이상의 손실을 입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서민의 현금서비스나 카드론 등을 통해 번 돈으로 VVIP를 지원하는 결과가 된다”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