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 모신다”
  • 이형구│일간스포츠 기자 ()
  • 승인 2013.01.0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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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VVIP 마케팅 천태만상…절세와 탈세 사이 줄타기도

“10억원 이상의 자산을 맡기고 있는 사모님이 유명 남성 그룹 멤버를 좋아한다며 사인을 꼭 갖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사생(사생활 침해)팬 카페에 가입해 돈을 주고 사인을 구해주었다.” 한 증권사 VIP 전용 PB센터에 근무하는 애널리스트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상위 1% VVIP를 잡기 위한 금융권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과거 투자 상품 소개나 자산 포트폴리오 관리 등에 국한되어 있던 금융사 PB센터의 서비스도 컨시어지(개인 비서)나 가업 승계, 유산 상속 등 가문의 자산 관리까지 해주는 이른바 ‘패밀리 오피스’ 서비스로 진화하고 있다.

일부 회사는 수백만 원 규모의 건강검진권까지 VVIP 고객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한 생명보험사 컨설턴트는 고객의 휴가 일정에 맞추어 매년 정기적으로 해외여행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또 다른 증권회사 PB센터에 근무하는 투자상담사 서 아무개씨는 “지난해 한 전문직 부부의 베이비시터(보모)를 구해주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동남아 여성을 10명 가까이 면접을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증권업계는 이미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부유층 고객 확보를 위해 PB센터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소속 컨설턴트들은 자산가들의 개인 비서 역할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삼성증권의 VVIP 전용 점포인 SNI(삼성앤드인베스트먼트)에서는 현재 VVIP들을 대상으로 여행, 의료, 문화 안내 및 거래 대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투자컨설팅팀 소속의 세무사와 부동산위원 등 각 분야 전문가까지 나서 가업 승계와 관련된 컨설팅을 제안하고 있다.

한국투자증권도 지난해 ‘트루프렌드 컨시어지서비스’와 ‘트루프렌드 가산 승계 서비스’를 잇달아 시작했다. 관리 자산이 10억원 이상인 고객이 서비스 대상이다. 이들 고객을 대상으로 법률 및 자문 컨설팅을 포함해 의료·여행·교육 등 생활 전반과 관련된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고객이 원하면 휴가 계획까지 대신 짜주기도 한다. 이 밖에 한국투자증권은 고액 자산가들의 입맛에 맞춘 커피클래스, 요리클래스 등 다양한 주제의 소규모 문화 강좌나 테마 여행, 아트 투어 등 맞춤형 행사를 꾸준히 열고 있다.

롯데호텔제주가 운영하는 리조트 ‘아트빌라스’가 VVIP 고객을 위한 이탈리아 명차 페라시 시승 행사를 열고 있다. ⓒ 연합뉴스
개인 비서에서 가문 재산 관리 역할까지 ‘척척’

VVIP센터인 ‘프리미어블루’를 운영하고 있는 우리투자증권은 예탁 자산 10억원 이상 고객들을 대상으로 호텔과 레스토랑, 공연, 뷰티와 헬스 등 상품 추천 및 예약 대행 등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국내 1백50여 개 골프장을 대상으로 한 ‘원스톱 예약’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컨시어지 데스크를 통해 50개 병원의 건강검진을 예약하면 비용을 10% 할인해주기도 한다. KDB대우증권 역시 10억원 이상 고액 자산가에게 은퇴 설계, 증여 상속, 절세 상담은 물론 프로골프 선수의 골프 레슨과 자녀 유학 상담 서비스도 제공한다.

증권사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부자 고객을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은행들도 VVIP 고객 잡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신한금융그룹은 부유층을 상대하는 ‘신한PWM(Private Wealth Management)센터’를 지난해 총 8곳까지 늘렸다. 국민은행도 지난해 서울 강남과 명동에 예탁금 30억원 이상 고객만을 상대하는 ‘스타 PB센터’를 잇달아 열었다. 하나대투증권과 함께 VIP 전담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하나은행은 세무법인과 연계해 세무조사 및 조세 불복 대행 서비스까지 해주고 있다.

10억원은커녕 1억원도 구경하기 어려운 일반인들이 금융사들의 VVIP 마케팅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은 바로 VVIP 전용 PB센터이다. 각 금융사들은 강남의 요지에 VVIP 전용 PB센터를 설치하고 유명 작가의 예술품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차별화된 서비스로 부자들을 끌어들이기에 여념이 없다.

VVIP 전용 PB센터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하나대투증권의 청담금융센터. 이곳은 박선기·정수진·김근중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으로 실내 인테리어가 꾸며져 있다. 청주를 마실 수 있는 다다미방과 카페로 꾸며진 공간도 따로 있다. 덕분에 <시크릿가든>과 <패션왕> 등 유명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도 나온 바 있다. 회사 관계자는 “센터에 작품을 전시한 한 작가는 20억원을 펀딩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지난해 4월 문을 연 한화투자증권 갤러리아지점은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세계적인 디자인 기업 아이디오(IDEO)가 인테리어에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 고객이 수입차 매장의 VIP룸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우리투자증권 VVIP 전문 점포인 프리미어블루센터는 업계 최초로 아트 갤러리 콘셉트를 도입했다. 고객들은 센터를 방문해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업계와 연계해 예술 작품에 대한 분석, 보험, 보관, 절세 컨설팅도 제공하고 있다. VVIP들은 갤러리처럼 꾸며진 전용 지점에서 각종 자산 관리 상담은 물론이고 그들만을 위해 준비된 파티나 세미나에 참석한다. 일부 증권사들은 사전 예약을 통해 PB센터를 가족 행사 같은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금융회사들이 이처럼 VVIP 모시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간단하다. 부자들을 상대로 한 서비스가 돈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나금융연구소가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 금융 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인구는 15만9천명으로, 우리나라 20세 이상 성인 인구(4천46만명)의 0.39%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이 보유한 전체 금융 자산은 약 4백45조원으로 국내 금융 자산의 19%에 달한다고 한다. 0.39%의 소수가 20%에 육박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니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VVIP 시장이 그야말로 ‘황금 어장’인 셈이다.

하지만 금융회사들 사이에 VVIP 모시기 경쟁이 과열되면서 탈세나 탈법까지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애널리스트들이 VVIP와의 1 대 1 상담에서 기업의 정보를 미리 제공해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 증권가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주요 정보를 미리 특정인에게 제공한 뒤 일반에 공표하면 안 된다는 자본시장법과 금융투자업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또, VVIP에 대한 세무 상담이 절세를 넘어 탈세를 돕는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작지 않다. 이와 관련해 한 증권사 관계자는 “거액 자산가일수록 상담 내용 대부분이 세무 상담이다. PB가 국세청 등 세무 당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사내 세무사를 동반한 채 상담을 하다가 사안이 민감해진다 싶으면 자리를 비켜주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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