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박근혜 코드’ 맞추기
  • 정일환│뉴시스 기자 ()
  • 승인 2013.01.2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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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대출 늘리고 정규직 바꿔주고… ‘공익적 요구’ 넘어선 실속이 문제

요즘 은행이 갑자기 착해졌다. 그동안 문턱 높이기에 바쁘던 중소기업 대출에 적극 나서는가 하면,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도 바꾸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비정규직 직원을 알아서 정규직으로 바꿔주겠다고 공언하기도 한다.

은행가의 새로운 풍속도는 사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과 일치한다. 박당선인이 ‘중소기업 대통령’을 표방한 데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은행들의 ‘착한 행동’은 알고 보면 ‘박근혜 코드’ 맞추기에 다름 아닌 셈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최근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등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금융 지원 규모만 8조2천억원에 달한다. 주로 △중소기업 적합 업종 특별 여신 △전통시장 골목상권 재활성화 △임대보증금 담보 대출 등을 시행하기로 했다.

이번 설에 30조원 정도 중소기업에 지원

외환은행은 자금 용도를 늘려 ‘2013기업스마트론’을 재출시했다. 금리를 0.2~0.5%포인트 깎아주고 신용도가 다소 낮더라도 대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특히 총 3조원 중 2조2천억원을 중소기업에 집중 배정해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최근 기업 대출 최고 금리를 한 자릿수인 9.5%로 내린 기업은행은 올해 중소기업 지원 한도를 36조원에서 38조원으로 확대했다.

국민은행은 유망 중소기업을 발굴해 금융 지원을 확대할 방침이고, 신한은행·하나은행·NH농협은행 등도 1조~5조원가량을 중소기업에 지원할 계획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은행권은 올해 설을 앞두고 자금난을 겪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위해 13조원의 특별자금을 풀기로 했다. 지난해보다 무려 30% 늘어난 액수이다.

왼쪽부터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한동우 신한금융지주 회장, 박근혜 당선인,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 시사저널 이종현·연합뉴스

금융권 전체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감안하면 꽤나 부담이 큰 규모이지만, 이 역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중소기업·소상공인 배려’ 강조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은행별로는 △우리은행 7조원 △기업은행 7조원 △국민은행 5조5천억원 △신한은행 5조5천억원 등 이번 설에 은행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지원하는 금액은 30조원을 웃돌 것으로 보인다. 우리은행은 신규 지원 2조5천억원, 기한 연장 지원 4조5천억원 등 7조원을 투입한다. 전년에 비해 1조1천억원이 늘어났다. 일시적으로 자금 부족을 겪는 제조업 위주 우수 기업 등이 대상이다. 우리은행은 최대 1.3%포인트의 금리 우대 혜택을 부여하며 대출 연장과 재약정 조건도 일부 완화하기로 했다.

기업은행도 원자재 결제나 직원 상여금 등 운전 자금 용도로 약 7조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특히 신규 지원 금액을 지난해 2조원에서 올해 3조원으로 늘려 잡아 더 많은 업체에 혜택을 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렁이는 관치의 그림자

국민은행과 신한은행도 지난해보다 5천억원이 늘어난 5조5천억원씩을 중소기업에 지원한다. 신규 지원은 2조5천억원, 기한 연장 지원은 3조원이다. 그 밖에 하나은행은 2조원, 외환은행은 1조6천억원, 농협은행은 1조5천억원의 특별자금을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각각 지원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런 은행의 움직임도 새 정부에 코드를 맞춰야 하는 금융 당국 입장에서는 마뜩치 않은 모양이다. 금융 당국은 “중소기업 지원에 더 나서라”며 긴급 수석부행장 회의를 소집하는 등 은행 군기 잡기에 나섰다. 은행이 최근 중소기업 지원 대책을 잇달아 발표했으나 중소기업은 여전히 자금난을 호소하고 있는 데다 은행 창구에서도 경기 침체에 따른 리스크 관리를 이유로 중소기업 대출을 머뭇거리는 분위기가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추경호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1월18일 아침 각 시중 은행과 정책금융기관 수석부행장들을 소집해 중소기업 대출 활성화를 위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는 “은행이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면서 중소기업 대출이 주춤하다는 소식이 들려 현황을 점검하고 위축된 면이 있다면 독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은행들의 중소기업 대출은 발표한 수치에 비해 실속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2011년 말에 비해 중소기업 대출 잔액이 7천억원 감소했고, 스탠다드차타드은행과 씨티은행이 각각 3천억원 줄어들었다.

새 정부가 꾸려지면 ‘착한 은행’ 증후군에 따른 부담감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앞서 박당선인은 저소득층 및 신용불량자의 신용 회복 및 가계 부채 해소를 위해 18조7천억원 규모의 국민행복기금 조성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국민행복기금이 부실 기금으로 전락할 경우, 은행의 희생이 뒤따를 개연성이 있다. 프리워크아웃 대상 역시 은행의 수익성 훼손을 감안해서라도 이들에게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리스크를 안고 있다.

아울러 박당선인이 금융회사의 전반적인 수수료 및 관행을 바로잡겠다고 공언한 만큼, 대대적인 손질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이런 움직임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은행의 공적 요구 확대 등이 은행의 신용도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은행의 수익이 일정 정도 보장되어야 공익성도 강화되는 것이다. 공익적 요구가 자칫 ‘은행권 쥐어짜기’라는 비판을 남겨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경계했다.

은행 내부적으로는 계약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생명은 최근 계약직 여직원 2백20여 명을 무기 계약직군 정규직으로 모두 전환해 기존 정규 직원과 같은 정년과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또 보험설계사 출신인 여성 관리자 김점옥씨(50)와 김민자씨(52)를 각각 수도권 본부장과 제휴 TM 본부장으로 발탁했다. 신한생명 관계자는 “여성 대통령 시대를 맞아 사무직 여직원에게도 공정하고 투명한 승진 기회를 부여하고 전문 금융인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이번 인사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했다”라고 말했다.

앞서 신한은행은 근무 중인 계약직 전담 텔러 6백95명 전원을 정규직으로 바꾸고, 지난해 12월 계약직 텔러로 채용되어 연수 중인 1백43명도 모두 정규직으로 신규 발령했다. 신한은행은 앞으로 모든 텔러를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채용할 방침이다.

우리은행은 계약직 7백15명 중 채용 후 2년이 지난 직원들을 대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대학 진학 시 학자금 지원 등 다양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다. 산업은행은 3백70명의 무기 계약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돌렸고, 기업은행도 기간제 계약직 1천1백32명을 무기 계약직으로 일괄 전환했다. 외환은행도 올해 4백여 명의 계약직 직원을 정규직화한다. 하나은행은 노사 간 합의에 따라 무기 계약직 전환을 실시할 예정이며 구체적인 시행 시기와 대상자는 협의 중이다.

은행업계 관계자는 “올해 은행 수익성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무기 계약직 혹은 정규직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박당선인의 비정규직 문제 해결 의지가 강한 만큼 금융권의 정규직 전환은 확산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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