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가방 장사 하면서 세계를 누볐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1.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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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관 시몬느 회장 / 루이비통도 못 만든 핸드백 박물관 건립

면세점에서 한국인에게도 인기가 높은 코치나 버버리, 도나카란뉴욕, 마크제이콥스 같은 유명 핸드백은 실은 경기도 의왕시의 시몬느 본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가 디자인하고 중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의 시몬느 공장에서 일하는 2만명의 직원이 생산한 제품이다. 이런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제품이라고 하지 않고 ‘ODM’이라고 부른다. 오리지널 디자인 제품이라는 뜻이다. 이는 시몬느가 단순 하청 생산이 아니라 소재와 제품 디자인 개발, 제조, 품질 관리 능력까지 가진 회사임을 의미한다. 시몬느의 지난 회계연도 매출액은 4천8백16억여 원, 당기순이익은 4백88억원이다. 순이익률이 10%를 넘는 알짜 회사이다. 이 정도의 이익 규모와 매출 규모라면 요즘 국내 패션업계에 유행인 ‘한때 반짝거리던 허름한 외국 브랜드 쇼핑’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규모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국내의 준명품(매스티지) 시장에 진입한 국내 업체도 있다.

ⓒ 시사저널 전영기
“문화와 전통 선점해야 럭셔리 브랜드 가능”

하지만 1987년 시몬느를 창업한 박은관 회장은 정면 승부하는 길을 택했다. 밑천은 자부심이다. “내가 핸드백 사업을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다. 2백여 명에 달하는 우리 회사 직원들이 핸드백 일을 한 시간을 모두 합하면 3010년이 된다. 핸드백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이런 규모로 장인과 디자이너가 모여 있는 회사는 전 세계에서 우리 회사가 유일하다.”

그가 지난해 서울 신사동에 핸드백 뮤지엄을 개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믿기지 않겠지만 전 세계에 핸드백 박물관은 이것이 유일하다. 가방으로 유명한 루이비통도, 코치도 이런 박물관을 만들지 못했다. 이 박물관 프로젝트에 예일 대학에서 30만 파운드를 지원했다. 핸드백 박물관 설립 실무를 책임진 쥬디스 클락은 영국 런던패션칼리지 교수이자 설치미술가이다. 그가 시몬느의 핸드백 컬렉션을 중심으로 박물관을 만들고 이를 도록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자 예일 대학 쪽에서 중요성을 인정해 30만 파운드를 지원한 것. <타임>과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도 핸드백 뮤지엄 개관을 알리는 소식을 실었고, CNN에서 ‘모든 남자친구의 악몽(every boy friend’s nightmare)’이라는 뉴스를 내보냈을 정도로 서구 사회의 주목을 받은 것도 바로 그 ‘문화적 가치’ 때문이다.

“핸드백 박물관은 우리가 명품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작업으로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전통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코치 사의 회장도 ‘축하한다. 우리도 못 한 일을 했다. 부끄럽다’라고 말하더라. 핸드백이 산업화한 것은 2차 대전 이후이다. 핸드백의 역사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경제적 위상 강화와 맞물려 있다. 19세기 이전의 귀족 문화를 이제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논리로 일반에 파급되었다. 명품 핸드백이 일반에 파급된 것은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197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시몬느가 지난해 수출한 금액은 5억2천만 달러이다. 소비자 가격으로 40억 달러 정도. 미국 럭셔리 시장의 28%, 세계 럭셔리 시장의 8%를 차지한다. 지난 40년 동안 명품 핸드백이 급속도로 확산된 배경에 숨어 있는 주역 중의 하나가 시몬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는 충분히 ‘현대 산업 유산(contemporary indusrial heritage)’을 주장할 수 있는 지분을 가지고 있다. 지난 40년간 한국 핸드백은 세계 핸드백 산업 발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것이 한국에 뿌리를 둔 명품 핸드백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적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명품 마케팅이 시작할 만한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의 한류 붐에서 보듯 한국을 보는 세계의 시선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패션에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나오려면 두 가지를 만족시켜야 한다. 제품과 디자인 개발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 국가의 문화적인 성숙도가 올라가야 나올 수 있다. 15년 전에 국내에 뿌리를 둔 브랜드를 만들었다면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다.

이제 한국의 성숙도를 서방에서 알아주기 시작했다. 올림픽, 월드컵, G20, 김연아, 삼성 휴대전화, 현대차 등으로 한국이 동아시아 문화의 꽃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한국 청자와 백자가 서구에서 재평가되고 일본 자기의 원류가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 도공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명품 브랜드가 나올 때가 되었다.”

그는 이런 시기가 올 때까지 손 놓고 있지 않았다. 한·중 국교 수교 이전인 1992년에 중국 공장을 지은 그는 생산 라인을 모두 외국으로 옮기고 서울 의왕에 본사 겸 R&D센터를 지었다. 2003년 완공된 대학 캠퍼스 같은 본사 건물은 그해 대한민국 건축대상을 탔다. 제품 개발실에서 미싱을 돌리거나 가죽을 다듬던 장인도, 디자이너도, 관리직 사원도 모두 한 발짝만 걸어 나오면 빗방울을 만져보고 눈을 만질 수 있는 발코니가 건물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화장실부터 사무실 입구 곳곳에 미술품만 2백여 점이 걸려 있다. 직원들이 일하는 공간 안에서도 문화적인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회사의 디자이너나 MD 직종은 입사 경쟁률이 40~50 대 1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의 제품 기획, 디자인 개발, 생산까지 경험해볼 수 있는 회사는 이 회사밖에 없기 때문이어서 더욱 그렇다.

이런 그의 행보를 보면 요즘 유행어인 ‘디자인 경영’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10년 전부터 그런 경영을 한 것이다. 지난해 개관한 핸드백 박물관도 같은 맥락을 지녔다. 그는 핸드백 박물관 1층에 ‘0914’라는 자체 브랜드 매장을 냈다. 전 세계에 딱 하나 있는 안테나숍이다. 0914 브랜드에는 벌써 외국 디자이너가 3명, 국내 디자이너가 6명 붙어 있지만, 그는 지금 당장 어떤 결과를 바라지 않고 있다.

디자인 경영 통해 글로벌 명품 만들기

오히려 투자를 더 늘리고 있다. 지난해 그는 서울 도산대로에 있는 에르메스 매장 옆에 2백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이 땅에 0914 브랜드의 단독 매장이 2015년에 들어선다. 건물 조감도도 나와 있다. 정식 매장도 없는 상태에서 0914의 디자이너들은 시몬느가 생산하는 수십 개 브랜드의 핸드백과 소재와 디자인에서 겹치지 않는 제품을 계속 만들며 시장 반응을 보고 있다.

“럭셔리 브랜드라는 것은 산업 자본이 패션에 들어가면서 생겨났다. 산업 자본이 브랜드의 정체성과 족보를 새로 만들어 써내려간 것이다. 럭셔리 제품을 사는 것 자체가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숨어 있는 문화적인 과정을 공유한다는 판타지를 제공한다. 핸드백에서 우리가 힘들더라도, 한국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럭셔리 제품을 만들어야 할 권리나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중간에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반드시 될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의 명품 소비는 줄어들고 실질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 풍조가 퍼지고 있다. 반면 중국 등 후발 국가에서 명품 소비는 늘어나고 있다. 우리처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겸하고 있는 회사에 기회가 오고 있다.”

이런 그의 도전을 지켜보는 과정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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