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을 수 없는 것을 넘어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사명이다”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3.01.2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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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만난 사람│고은 시인

최근 고은 시인이 자신의 청년기 일기를 공개했다. ‘시인 고은의 일기’를 부제로 단 <바람의 사상>(한길사 펴냄)은,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시인이 어떻게 역사의 풍랑에 휩싸이면서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문학가가 되어가는지 정밀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만하다. 시인이 뒷날 <만인보>를 쓸 수밖에 없을 만큼 숱한 인물 군상과 시대 상황을 세밀하고 흥미롭게 기록해나갔음을 이 일기에서도 알 수 있다. 김병익, 김윤식, 박맹호, 김현, 백낙청, 이문구, 이병주, 박태순, 임헌영, 최인훈 등을 비롯해 신문학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박목월, 서정주, 김동리 등으로 이어지는 문단 인맥을 보면 고은 시인의 삶과 그 실천 자체가 이 나라 현대문학사·정신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또, 고은 시인이 리영희, 한승헌, 임재경, 남재희 등 당대의 지식인 집단과 깊고 다채로운 교우 관계를 두루두루 맺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이 책에 수록된 그의 일기는 1973년에 시작해서 1977년으로 맺고 있다. 이는 박정희 유신 체제가 폭력화되어가는 과정과 그대로 겹친다. 그런 시대에 시인은 술 좋아하고 원고 쓰는 일에 쫓기고, 그나마 받은 원고료를 또다시 술에 퍼붓다시피 하면서, 그의 표현대로라면 ‘폐허’처럼 살았다. 그러나 어느새 억압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자유를 위해 실천하고 투쟁하는 지식인으로 변한다.

문인들을 비롯해 무수한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에 쓴 고은 시인의 일기에는 극도의 분노가 서려 있다. 그는 당시 문학가로서 생활이 순탄하지 않을 것을 이렇게 예감했다. ‘1975년 올해는 내 문학 생활이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원고 받을 곳도 없을 것이다. 잡지사나 출판사도 압력을 받을 것이다. 서점도 압력을 받을 것이다. 그 어디서나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올해 나는 고문, 구속, 연금, 감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노예의 연대기는 없다.’ 1975년 3월10일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대는 넘을 수 없는 암벽이다. 넘을 수 없는 것을 넘어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사명이다.’ 또, 그는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있었던 날 ‘총과 붓, 붓과 총의 충돌로 붓이 죽어가는 시대가 오는가. 나 같은 순수 시인을 참여 시인으로 만들 것인가. 이 군인의 시대, 이 육군의 시대야, 이 총검의 시대야, 이 탱크의 시대야, 이 색안경의 시대야’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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