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돈독한 군신 관계 끌어내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3.01.2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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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⑦ / 월산대군에게 각별한 정 쏟은 이면

조선 태조 이후, 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는 시문을 그리 많이 남기지 않았다. 세종과 문종이 지은 글들은 혹 많았을 수 있으나 남은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문종은 문예적인 시를 남겼지만, 세종의 경우에는 문예적인 글이 한 편도 없다. 세종이 남긴 글이라고는 김종서 등에게 국방과 관련한 비밀 명령을 내린 간찰이 대부분이다. 태조부터 세조까지의 여러 왕은 문예적인 시문을 그리 짓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성종은 문예적인 시문을 많이 남겼다. 어제시를 내려 문신들에게 창화(唱和: 시나 노래 따위를 한쪽에서 부르고 다른 쪽에서 화답)를 하게 하기도 했고, 친형 월산대군에게 시문을 주기도 했으며, 국정을 다스리는 동안 문득 생각나서 시문을 짓기도 했다.

성종은 월산대군과의 우의가 돈독했다. 한 번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평양군 박중선의 딸)가 생일을 맞자, 겸금(兼金) 6량으로 메뚜기(혹은 베짱이·여치) 형상을 만들어 형님에게 선물로 주어, 부인에게 전하게 했다. 겸금은 품질이 뛰어나 값이 보통 금보다 갑절이나 되는 좋은 황금을 말한다.

처음 성종은 궁중의 보물을 보관하는 내탕고에서 선물을 골라 주려고 했으나 적절한 것이 없자 황금으로 메뚜기 모양을 만들어 보냈다. 메뚜기 모양을 만들어 보낸 것은 <시경> 주남 ‘종사(?斯)’편의 뜻을 가져다 쓴 것이다.

ⓒ 일러스트 유환영
형수에게 황금 메뚜기 선물

<시경>의 ‘종사’편은 부부의 사이가 좋아서 자손들이 번창하리라고 축복하는 내용이다. 본래 이 시는 주나라 문왕의 후비가 궁녀들과 서로 화목해 자손이 많았으므로, 한 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는 메뚜기에 비유해 자손의 번성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전한다.

 

베짱이들이 깃을 펴서

다정하게 모였네

너의 자손들도

번성하리라

 

베짱이들이 깃을 펴서

떼 지어 나니

너의 자손들도

영구하리라

 

베짱이들이 깃을 펴서

떼 지어 모였으니

너의 자손들도

번창하리라

 

성종은 형수에게 황금 메뚜기를 선물로 보내면서 부(賦) 형식의 글을 스스로 지어 같이 보냈다. 부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을 앞에 붙였다.

 

<시경>‘상체(常)’에“활짝 핀 아가위 꽃,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가. 이 세상에 누구라 해도, 형제만 한 이가 없나니”라 하였고, 또“할미새가 언덕에서 호들갑 떨듯, 어려움이 있을 때는 형제가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라고 하였으며, 또“처자의 화합하기가 비파와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도, 형제가 합하여야 화락하고 또 즐겁다”라고 하였다. 시편은 한 장(章) 또 한 장 내용이 깊어지면서 반복해 거듭 영탄하여 진실성을 강화하므로, 곡진하게 표현하여 의미를 전부 드러내었다고 할 만하다. 내가 비록 똑똑하지는 못하지만, 시편이 전하는 의미를 어찌 잊겠는가.

지난날 숙량흘은 니구(尼丘)에서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고, 황보정은 모당(母堂)에서 기도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 일은 사실이 아니고 허망한 듯하지만, 정성이 있으면 하늘이 감응한다는 이치는 분명하여 틀림이 없다. 나는 형님이 난초를 꿈에 보는 태몽 후에 태어나고 석린의 경사를 기다린다고는 하지만, 진주조개를 얻는 작은 상서가 어찌 진짜 난새(상상의 새)가 태어나는 아름다운 징조를 얻는 것과 같겠는가 생각한다.

 

그래서 물품에 가탁하여 형체를 만들어서 복스러운 날에 선물로 드리려고 하는데, 곧바로 보내는 것은 어렵다. 지금 형님에게 부쳐서 기도하고 축복하니, 그 본뜻은 한결같다. 메뚜기를 노래한다.

성종은 월산대군과 우애 깊게 지냈지만 형을 제치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미안함이 마음속에 깊은 응어리로 남았을 것이다. 더구나 성종의 기도와는 달리 월산대군과 박씨의 소생들은 기세를 펴지 못했다. 박씨는 연산군 때 궁내에서 세자를 보육하다가 연산군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전설마저 있다.

성종과 월산대군의 트라우마

1489년에 월산대군이 35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천륜의 슬픔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월산대군이 생전에 지은 시 약간 편을 편집해 <월산대군시집>(풍월정집)을 엮게 했다. 그리고 신종호와 성현 등에게 그 서문을 쓰게 했다. 월산대군의 시호는 효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처음의 시호는 문효(文孝)였다. 그래서 신종호와 성현은 월산대군을 문효공이라고 불렀다.

신종호는 서문에서 월산대군과 성종의 우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효공은 왕실의 존귀함으로 임금의 은혜를 가까이 받들어 붓과 벼루로 모시며 시문을 지으셨으니, 비유하건대 규(奎)와 벽(璧)이 서로 빛나는 듯, 훈(壎)과 지()를 교대로 연주함과 같아서 글자 한 자 말 한마디라도 전하의 지극하신 우애를 형용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감상하게 한다면 왕성하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바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한편 성현은 월산대군의 품성과 시적 재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효공은 왕실의 아들이며 골육의 지친이다. 예의로 몸을 단속하며 행동을 예법에 맞추었고, 복잡하며 사치스러운 것을 버리고 검약한 생활을 하려고 힘썼다. 방문객을 사절하고 조용히 옛 서적을 연구하여 이를 표현하여 짓는데 생각나는 대로 곧 글을 이루었다. 이제 이 시집을 보면 큰 작품은 화평스러우며 작은 시편은 고상하고 건전하여 법칙을 맞추려고 애쓰지 아니했는데도 틀이 저절로 잡혔고, 수식하려 하지 아니했는데도 형식이 꼭 들어맞았으며, 솜씨를 부리려 하지 않았는데도 문체가 찬란하고, 견제를 가하지 아니하여도 한 군데도 군색한 곳이 없다. 그는 맑고 심오하며 온자하여 하나도 부귀한 사람의 태가 없고 깨끗이 세속을 초월한 듯한 감이 있다. 스스로 이치를 분명히 보고 사물의 정수를 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으랴.

 

국왕과 그의 형. 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보다 더 화려한 형제가 또 있을까? 하지만 그 형제는 서로서로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아야 했다. 주위 사람들도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성종은 즉위할 때부터 다른 국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위해야 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어렸으므로 정희왕후가 어진 이를 택해서 성종을 세웠는데, 성종 또한 형 월산대군이 있었으므로 예종이 죽은 당일에 서둘러 즉위한 것이다.

뒷날 광해군도 선왕이 죽은 그날로 즉위했다. 다만 광해군이 반정에 의해 왕좌에서 밀려난 데 비해 성종은 성군으로 남았다. 형을 사랑했던 진실한 마음이 신하들에게 전해져서, 돈독한 군신 관계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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