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겐 선과 악이 공존했다”
  • 이혜숙 객원기자 ()
  • 승인 2013.02.2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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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범서방파’ 보스 김태촌 부인 이영숙씨 인터뷰

매섭던 겨울 한파가 잠시 물러가면서 햇살이 제법 따사로웠던 지난 2월21일 오후 1시, 고(故) 김태촌씨의 부인 이영숙씨를 서울 독산동에 위치한 ‘한국은빛소망회’에서 만났다. 주먹계의 대부로 불리던 김씨가 사망(지난 1월5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범서방파’니, ‘김태촌의 적통 후계자’니 하는 뒷말이 무성하다. 기자와 이씨의 인연은 김태촌씨의 옥중 결혼식을 최초로 취재했던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진 세월을 이기며 온몸으로 살아온 이씨의 얼굴에서 그동안의 녹록지 않았던 삶의 역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 시사저널 임준선
얼굴이 많이 상했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세월이 유수와 같다. 1996년 남편과 교도소 봉사 활동으로 처음 만났다. 수백 통의 옥중 서신이 오가고 청송교도소로 면회를 가면서 서로 간에 애틋한 사랑이 시작된 것이 어제 일 같다.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안 된다. 매일 아침마다 영정 사진을 보며 이런저런 말을 붙이곤 한다.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어 마음이 아프다.

남편으로서의 김태촌은 어떤 사람이었나?

워낙 말이 없고 다정다감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집보다는 동생들이 우선이었다. 그래도 잔정이 많고 속은 여린 사람이었다. 교도소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내가 암 선고를 받고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 그래서 약간 서운했는데 면회 끝나고 돌아서는 순간 등 뒤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교도관도 깜짝 놀라고 나도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워낙 감정 표현을 안 하는 사람이라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출소 후 김태촌의 생활은 어떠했나?

그 사람은 세상을 너무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내지 않았나. 막상 나오고 보니까 세상이 너무 변해 있어서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러나 교도소에 있으면서 재소자들만 대하다 보니 범죄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았다. 마치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사람 같았다.

출소 후에도 조직에 있던 사람들과 계속 접촉한 것 같은데.

누구보다도 교도소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정말 신앙생활만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 마음같이 쉬운가. 계속 그쪽 사람들이 찾아오고 정이 많아 모질게 끊지 못하다 보니 구설에도 많이 올랐다.

“의리도 모르는 사람들이 남편 이름 팔아”

최근 서울 유명 음식점 사장의 납치 폭행 사건이 있었다. 수사기관에서는 김태촌의 후계자를 노린 조직 간의 싸움으로 보고 있는 듯한데.

조직, 조직하는데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그분(납치당한 음식점 사장)은 나도 잘 아는 분이 다. 남편이 평소 아끼던 후배였다. 그러나 몇몇 진실한 후배들(이씨는 이들을 ‘원조 서방파 식구들’이라고 칭했다) 말고는 모두 김태촌이라는 이름을 업고 뭐라도 해보려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에겐 의리도, 조직도 없다. 밑에서 기회만 있으면 치고 올라가려는 배신과 음모만 난무할 뿐이다. 사실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김씨가 그런 사람들을 왜 굳이 곁에 두었는지 궁금하다.

남편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다. 그리고 아주 무서운 사람이다. 싫어도 절대 싫은 내색을 안 한다. 누가 모함을 해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듣는다. 그런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된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1일 병실비만 90만원이 넘었다. 한 신문에서 너무 호사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지적한 후 병동을 옮겼지만 그래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아들 결혼식 축의금과 빚을 내서 대부분의 병원비를 충당했고, 부족한 것은 지인들이 도와주기도 했다.

의식을 잃고 10개월간의 투병 생활을 했다. 병간호가 쉽지 않았을 텐데.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진 후에도 눈을 떴다, 감았다만 할 뿐 사람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욕창이 생길까 봐 하루에도 여러 차례 뒤척여가며 온몸을 주물러줬다. 그러고 나면 땀범벅이 되어 녹초가 되었다.

“목구멍으로 밥 한 톨 못 넘기며 죗값 치러”

간호를 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것 같다.

남편은 불쌍한 사람이다. 10개월 동안 목구멍으로 밥 한 톨도 넘기지 못했다. 운명하는 날 이것저것 챙길 것이 있어 잠깐 집에 가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이 지은 죄가 많아 하나님이 철저하게 회개시키시는구나. 10개월의 세월을 너무 고통스럽게 보내는 것을 보면서 이제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유언이 ‘조촐하게 가족상으로 치러 달라’는 것이었다는데.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동생들이 ‘고생만 하고 떠나셨는데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좋게 보내드리고 싶다’고 해서….

요즘 생활은 어떤가?

한국은빛소망회를 시작한 지 벌써 6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처음에는 서울 종로에서 외로운 노인들을 상대로 시작했는데, 식사하러 오신 분만 초창기에는 5백여 명이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외부에서 하는 것은 무리이다 싶어서 서울 독산동 지하로 옮겼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나와 그 사람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김씨의 반대가 심했다는데.

내가 두 차례의 암 투병으로 몸이 많이 안 좋다. 내 건강을 생각해서 반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남편이 누구라는 것이 알려지면 계속 운영하는 것이 힘들지 않겠나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국무총리상·희망행복상 등을 받으니까 주위에 은근히 자랑하며 좋아하더라.

요즘에도 매일 노인 50여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쉽진 않을 텐데.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집에서 채소 손질을 한 후 오전 일찍부터 독산동으로 출발한다. 매일 반복하다 보면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분들을 생각하면 하루도 쉴 수가 없다. 여기 오신 분들의 사연을 들으면 기가 막히다. 이젠 김치할머니, 마늘할머니 별명도 부르면서 너무 가까워져서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이씨가 ‘한국은빛소망회’가 있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터를 잡은 것은 2007년. 아무런 연고도 없던 이곳에 사무실을 연 것은 단지 어려운 어르신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오전 10시30분부터 시작되는 배식은 12시가 넘어야 끝난다. 하루 3교대로 식단을 나르는 것이 고단하지만, 매일 보이던 어르신이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겁부터 날 만큼 정이 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뜻이 있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이씨의 고민도 커져만 간다. 환갑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찬양 간증을 나가고 책을 집필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도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란다. 요즘 매스컴을 타면서 유명 여가수였던 이씨의 화려한 경력이 알려지자 ‘스타가 해주는 밥’이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단다. 이곳 사람들의 미소가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 이씨의 마지막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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