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국민들, 막다른 길 선택했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03.0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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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좌파연합, 총선에서 상원 장악 실패 기성 정치에 반기 든 ‘오성운동’이 돌풍 일으켜

이탈리아 총선 개표 결과가 알려진 2월26일 새벽(현지 시각), 독일 언론들은 그야말로 ‘멘붕’ 상태에 빠졌다. 밤새 엎치락뒤치락하기는 했지만 출구조사 결과 상·하원 모두에서 피에르 루이지 베르사니가 이끄는 ‘중도좌파연합’의 승리가 점쳐졌으나, 상원에서 뜻밖의 결과가 나온 탓이다.

하원에서는 중도좌파연합이 포퓰리스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나선 ‘중도우파연합’에 근소한 차이로 이겨 제1당이 되었다. 베르사니는 마리오 몬티 전 총리가 1년여간 단행해온 개혁 정치를 이어받을 인물이자 베를루스코니에 대해 가장 유력한 대항마로 기대를 모아왔다. 하지만 상원에서는 중도우파연합과 ‘오성운동’이 예상 밖의 강세를 보인 데다 몬티의 ‘중도연합’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10%가량의 득표율을 얻어 베르사니가 몬티와 연합정부를 구성하더라도 의석의 과반수를 넘기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이탈리아의 상원은 하원과 동등한 입법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정당이나 연합체가 양원에서 모두 이기지 않으면 의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2월21일, 고뇌하는 마리오 몬티 총리 뒤로 이번 선거에서 최종 승자라고 평가받는 베페 그릴로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 연합뉴스
“이탈리아인들,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유럽 주요 언론에서는 이번 이탈리아 총선을 유로존 전체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선거로 보고 선거 과정에 주목해왔다. 이탈리아의 경제 규모는 유로존 17개국 가운데 세 번째로 크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의 1백30%에 달하는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다. 2011년 총리로 임명된 마리오 몬티는 연금 축소, 균형 예산제 도입 등의 개혁을 단행하면서 베를루스코니가 초래한 불안정성을 해소하고 다른 국가들로부터 다시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몬티의 인기는 점점 하락했다. 경기 침체와 실업난이 이어지자 이탈리아에서는 유로존 탈퇴를 외치는 ‘반(反)유로주의’ 기류가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시민들은 자국의 부채 위기 해소를 위해 도입된 개혁 정치를 브뤼셀과 베를린에서 디자인된 ‘고문 도구’쯤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스,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대로 되풀이된 것이다. 마침내 몬티는 지난해 말 2013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킨 직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유로화의 안정을 원하는 독일의 입장에서는 몬티의 뒤를 이을 개혁 정부가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독일 언론들은 이탈리아의 총선 결과를 전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중도 좌파 성향의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이탈리아인들은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고 잘라 말했고, 중도 성향의 <슈피겔>도 온라인 뉴스를 통해 “이탈리아 국민이 투표를 해 나라를 막다른 길로 몰아갔다. 벌써 재선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번 이탈리아 총선에서 독일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정치인은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한 유럽의 문제아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전직 스탠딩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였다. 그가 이끄는 대중정치운동 오성연합(M5S)은 상·하원 모두에서 25% 이상의 득표율을 보이며 제3당이 되었다. 단일 정당으로는 최다 득표율이다. 결성된 지 4년도 채 되지 않은 정당이 이탈리아 정치사에 그야말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셈이다.

오성연합 돌풍의 배경은 무엇일까. 그릴로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기성 정치는 낡았고 부패했으며 이제는 그 수명이 다 했다는 것이다. 그릴로는 2011년 펴낸 <우리는 전쟁 중이다 - 새로운 정치를 위하여>라는 책에서 무비판적으로 답습되어온 정치와 삶을 인터넷으로 전복시키자는 주장을 폈다. 이번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그릴로는 좌우를 막론하고 기성 정치인과 정당을 향해 과격한 인신공격을 퍼부으며 인기를 모았다.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은 “의회에 진출해도 그 어떤 기성 정당과도 연정을 구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약속에 환호를 보냈다. 여기에 좌우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할 수 없는 수많은 공약이 더해졌다. 모든 국민에게 월 1천 유로의 기본 소득을 제공하고 수도 민영화를 반대하며 인터넷을 무상 제공하고 ‘반(反)유로·반(反)긴축’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인기를 얻을 만한 정책은 빠짐없이 내세웠다.

유로존의 기둥인 독일은 근심이 깊다.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미켈레 프로스페로의 말을 인용해 오성운동의 선거 전략을 ‘독이 든 안티 정책’이라고 정의했다. 기성 정치에 대해 ‘안티’를 자처하면 당장 표를 끌어모을 수 있지만 이탈리아의 정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개표 직후 유럽위원회가 “이탈리아 정치인들은 조속히 안정적으로 국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며 정치적 결단을 촉구하고 나섰지만, 그릴로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이탈리아 국채의 가치가 하락하고 나라 안팎에서 통치 불가능의 위기를 걱정하는 상황에서조차 그는 “재선을 한다면 우리가 이긴다. 전 유럽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며 여유를 부렸다.

‘오성운동’이 대안 될 수 있을지 우려

오성운동은 이탈리아 국민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이 단순한 안티 수준을 넘어서 기성 정치의 대안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그릴로는 ‘정치의 위기’를 논하면서 기성 정치에 책임을 돌린다. 그에게 정치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국가를 전복시키지 않는 한 정치 쇄신은 정당 정치의 틀 안에서 일어나기 마련인데도 그릴로는 과격한 선동과 ‘원맨쇼’를 통해 정치적 합리성 자체를 무효화하고 있다. 앙숙 관계인 그릴로와 베를루스코니가 ‘베를루스그릴로’라는 말로 한데 묶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에 대해 유럽 주요 언론들은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히 유로존의 이해관계에 민감한 독일은 오성운동을 독일의 ‘해적당’과 비교하고 있다.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 증대, 인터넷을 통한 직접 민주주의 구현, 저작권 반대 등 해적당의 정책에는 오성운동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이전에는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반감을 가졌던 젊은 층이 인터넷을 매개체로 해 결집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해적당 역시 기성 정치와의 차별화에 성공하면서 지난 2011년과 2012년에 4개 주 선거에서 의회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불과 1년이 지난 오늘 한때 녹색당이 가졌던 대안적 대중 정당의 자리를 위협하던 해적당은 지금 독일에서 방향타를 잃고 빠르게 침몰하는 중이다. 전자식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의욕적으로 설치한 시민 참여형 포털은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쓴웃음만 남겼다. “우리는 응용 프로그램(강령)이 아닌 운영체제를 마련할 것”이라고 주장하던 패기는 의회 정치에 효과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하면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구체적인 정책의 부재와 거듭된 당내 갈등에 실망한 지지자들은 해적당에 대해 하나 둘 등을 돌리고 있다.

물론 해적당과 오성운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치학자 플로리안 하르트렙은 “독일인들은 20세기 초 유대인 학살을 자행하고 2차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를 통해 교훈을 얻었다.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몰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릴로는 자신을 “오성운동의 대변인일 뿐”이라고 밝혔지만, 자신과 의견이 다른 당원들은 가차 없이 당에서 배제시키고 언론과의 인터뷰나 대담 또한 그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할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을 앞세우고 있다. ‘차이트 온라인’은 지난 2012년 시칠리아 지방선거에서 오성운동이 여당으로 등극한 이후 그릴로가 한 연설의 일부분을 소개했다. “우리는 당면한 과제들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눌 것이다. 하지만 이 운동의 수장은 내가 되어야 한다.” 그의 행보가 불안해 보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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