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안방마님들의 그림 커넥션
  • 김지영·이규대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3.03.1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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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갤러리 2010~11년 통장 거래 내역 단독 입수

“대한민국에서 와인 맛을 가장 잘 아는 집단은 소믈리에들이 아니라 재벌가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고기도 자주 먹어본 사람이 제 맛을 알듯이 최고급 와인을 자주 접할 수 있는 부자들이 그에 대한 식견도 남다르다는 얘기다. 개인의 경제력이 문화적 취향까지 결정짓는다. 재벌이라는 특권층이 경제 권력을 넘어 문화적 자본까지 거머쥐고 있다.

와인과 같은 고급 취향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미술 영역이다. 지금 현대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일반 대중도, 작가 자신도 아니다. 수십억~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그림에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부자들이 시장을 이끈다. 이에 대해 도널드 톰슨(Donald Thompson) 캐나다 요크 대학 슐릭스쿨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저서 <은밀한 갤러리>에서 “오늘날 미술사의 내용을 바꾸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돈을 소유한 초거부(超巨富) 컬렉터다. 이들의 두꺼운 지갑에서 나오는 돈의 액수에 따라 현대 미술품의 가치가 정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작품’ ‘중개상(화랑업자·경매회사 등)’ ‘거부 컬렉터’, 이들이 현대 미술 시장을 구성하는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에 거액의 돈이 있다.

ⓒ 연합뉴스·뉴시스
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미술 시장의 특성에 부합하는 인물이 한국에도 있다. 바로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다.

서미갤러리는 일반 갤러리와 달리 고급 컬렉터에게 고액의 미술품만을 중개하는 거래 관행을 보여왔다. 이른바 ‘프라이빗 갤러리’다. 값이 크게 뛸 작품을 선별하는 홍송원 대표의 남다른 안목이 그 바탕이다. 그러나 주요 고객인 재벌가와 깊은 관계를 유지한 탓에 각종 재벌가 비리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신문의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서미갤러리의 내부 자료. ⓒ 시사저널 이종현
검찰, 탈세 혐의로 홍송원 출국금지

그런 홍 대표가 최근 검찰 수사 선상에 또 올랐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고가의 미술품을 판매한 뒤 세금계산서를 고의로 누락시키고 매출액을 회계장부에 기록하지 않는 수법으로 법인세 32억여 원을 포탈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홍 대표에게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런데 홍 대표에 대한 수사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탈세 의혹이 아니다. 검찰이 서미갤러리 및 홍 대표의 자금 거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재벌가와의 은밀한 거래가 드러날 것이냐가 핵심이다. 특히 그동안 숱하게 의혹이 불거졌던 재벌가의 비자금 조성 과정에 홍 대표 등이 개입했는지 여부도 관건이다.

검찰은 우선 홍 대표의 탈세 혐의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으나 그 과정에서 재벌가의 비자금 조성 등에 관여한 혐의가 추가로 발견될 경우 수사를 확대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 당국 관계자는 3월11일 “(홍 대표와 서미갤러리 법인을 검찰에 고발한) 국세청 고발인들이 검찰에서 그동안 세 차례 조사를 받았다”며 “검찰 수사가 홍 대표와 거래한 대기업들로 확대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홍 대표가 어느 재벌과 어느 정도의 규모로 은밀하게 거래해왔는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시사저널>은 ‘재벌가-홍송원 사이의 돈과 그림 거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 서미갤러리와 홍 대표의 장남이 운영하는 원앤제이갤러리 등의 내부 회계 자료 등을 단독 입수했다. A4 용지로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가운데는 ‘서미갤러리 유동성’ ‘원앤제이갤러리 유동성’ ‘그림 구매 및 판매 내역’ 등 자금 흐름 내역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상당량 포함돼 있다.

또한 미술품 거래 계약서, 대검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이 홍 대표 등에게 보냈던 질의서, 국세청이 보냈던 소명 요구 자료, 저축은행들과의 대출 내역, 홍 대표의 급여 내역 등도 담겨 있다.

본지가 입수한 문건 가운데는 2010년부터 2011년까지 2년 동안 서미갤러리의 돈 흐름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가 포함돼 있다. ‘㈜갤러리서미 홍송원’ 명의의 통장에서 거래된 내역을 별도의 엑셀 파일로 일일이 기록해둔 자료다. 여기에는 재벌가뿐 아니라 일반 컬렉터들과의 거래 내역까지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자료에 있는 ‘거래 메모’에 기록된 정보를 통해 돈이 어디서 입금돼 어디로 출금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항간에 떠도는 ‘홍송원 리스트’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삼성문화재단과 207억 거래

서미갤러리 통장으로 재벌가 사람들이 거액을 ‘입금’하기도 했고, 반대로 서미갤러리가 그들에게 ‘지급’한 경우도 있었다. 한마디로 서미갤러리 통장을 통해 재벌가와 서미갤러리가 돈을 주거니 받거니 했던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본지가 입수한 자료에 대해 기자와 지난 1월21일 만났던 홍 대표는 “우리(서미갤러리와 원앤제이갤러리) 자료가 맞는 것 같다”고 확인하면서도 “구체적인 (거래) 내용까지는 말하기 곤란하다”며 답변을 피했다.

자료에 나와 있는 거래 내역을 면밀히 들여다보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삼성 사람들’이다. 홍 대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가까운 사이였다. 홍 대표의 주요 고객이 홍라희 관장을 중심으로 한 ‘삼성가 여자들’이었다. 2007년 삼성그룹 비자금 문제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2003년 초 대형 금융 거래가 잦은 홍 대표가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르자 삼성) 구조본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홍송원을 캐면 이건희 집안 여자들이 다 나오기 때문이다. 홍라희, 이명희, 박현주, 신연균 등이 홍송원의 주요 고객이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본지가 입수한 거래 내역 중에서는 삼성가와 한때 사돈 관계였던 대상그룹과의 거래액이 가장 많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전 부인인 임세령 대상그룹 상무는 2년 동안 16차례에 걸쳐 무려 28억원을 서미갤러리 계좌에 입금했다. 임 상무의 어머니인 박현주 부회장은 10차례에 걸쳐 39억원 상당을 입금했다. 아버지 임창욱 회장은 2년간 62억원을 입금하고 116억원을 지급받았다. 임 회장이 이 통장을 통해 왜 다시 116억원을 돌려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상그룹 관계자는 “(임 회장 등) 개인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본지가 입수한 자료에서 홍 대표와 절친한 홍라희 관장과의 직접적인 거래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홍 관장이 운영하는 삼성미술관 리움에 자금을 공급하는 삼성문화재단이 세 차례에 걸쳐 207억원을 서미갤러리 통장에 입금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양측 간의 거래는 2010년 5월 이후 끊겼다. “홍라희 관장은 홍송원 대표가 사정 당국의 수사 선상에 자주 오르는 것이 부담스러워 거래선을 바꿨다”는 미술계의 풍문과 관계가 있는지 주목된다.

홍송원 대표는 2011년 홍라희 관장과 그림값 결제를 둘러싸고 소송전을 벌이기도 했다. 삼성문화재단측은 “(서미갤러리에 입금한) 그 액수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재단 차원에서는 거래 내역 및 목적 등에 대해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건희 회장의 조카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서미갤러리로부터 26억원을 지급받았다. CJ그룹측은 “이재현 회장은 그런 거래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건희 회장의 여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서미갤러리 계좌에 2억9000만원 상당을 입금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액수다. 하지만 신세계 법인이 서미갤러리와 90억원을 거래했던 점에 비추어 그들의 돈독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신세계 관계자는 “이명희 회장 부분은 개인적인 일이라 확인할 수 없다”며 “법인이 거래한 것은 백화점에 설치한 조각 작품을 매입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미술품, 비자금 세탁·변칙 증여로 ‘악용’

다른 재벌가들과의 거래도 적지 않았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의 부인 이미향 샤니 감사는 8회에 걸쳐 총 48억원 상당을 입금했다. 특히 2011년 12월에 20억원씩 2회, 총 40억원을 입금했다. 파리크라상 계좌에서도 39억6000만원이 서미갤러리 통장에 입금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SPC 관계자는 “이미향 감사 명의로 산 것은 개인 돈으로 산 것이고, 파리크라상 법인은 (작품을 구입해서) 본사 내부에 설치해뒀다”며 "투명한 거래를 위해 수표로 거래했고 그 기록도 남아 있다"고 밝혔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총 5억원 상당을 입금했다. 서미갤러리는 아모레퍼시픽 법인과도 2억여 원의 거래를 했다. 아모레퍼시픽측은 “서경배 회장 건은 개인 용도로 구매하신 것이고 법인 것은 사업장에 전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송원 대표는 지난 1월21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난해)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검찰이) ‘특정 재벌가’와의 거래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고 밝혔다. 당시 홍 대표는 ‘특정 재벌가’의 실명을 언급했다. 따라서 검찰이 ‘특정 재벌가’를 겨냥해 수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서미갤러리와 재벌가 사이의 거래와 관련해 그동안 구체적인 액수 및 빈도 등이 드러난 적은 거의 없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홍라희 관장이 홍송원 대표에게 114억원 상당의 그림을 샀다는 사실이 삼성 특검 과정에서 알려진 정도다.

그런데 이번에 <시사저널> 취재를 통해 재벌가와 홍 대표 사이에 적게는 수억, 많게는 수백억 원에 달하는 거래가 지속적으로 이뤄졌던 사실이 확인됐다. 다만 본지가 입수한 자료는 서미갤러리의 일부 자료다. 단일 계좌의, 2010년부터 2011년까지 2년치 금융 거래 정보를 담고 있다. 거래 내역 자료를 보면, 서미갤러리는 본지가 입수한 계좌가 아닌 다른 계좌를 통해 또 다른 자금을 관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서미갤러리 명의의 계좌에서 본지가 입수한 서미갤러리 계좌로 수백억 원대의 자금(입금 225억원, 지급 117억원)이 오간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계좌를 통해 이루어진 거래를 추적한다면 서미갤러리와 재벌가들의 거래 전모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검찰 수사의 몫이다.

재벌은 아니지만 서미갤러리와 거래한 ‘큰손’도 여럿 눈에 띄었다. 미술관 개장을 준비 중인 박 아무개씨는 여섯 차례에 걸쳐 4억8250만원을 서미갤러리 통장에 입금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수 최성수씨의 부인 박영미씨는 네 차례에 걸쳐 1억원씩 모두 4억원을 서미갤러리 계좌에서 지급받았다. 그 밖에 한 아무개씨와 백 아무개씨도 각각 8억원씩 거액을 서미 계좌에 입금한 것으로 나와 있다. 또 다른 백 아무개씨는 2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4억9330만원 정도를 서미갤러리 계좌로 보냈다.

자기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위법·탈법 혐의가 포착됐을 때 발생한다. 물론 본지가 입수한 자료만으로 그 부분까지 파악하기는 힘들고 속단할 수도 없다. 하지만 고가의 미술품을 사적으로 거래한 사실은 서미갤러리와 재벌가의 관계를 둘러싼 의혹을 증폭시킨다.

고가의 미술품은 재산을 불리거나 비자금을 세탁하는 데 효율적이면서도 뒤탈 없는 수단으로 꼽힌다. “정해진 가격이 없다”는 미술품의 특성 때문이다. 미술품을 거래하며 실제 작품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판매한 것처럼 꾸미고 차액을 돌려주거나, 장부를 조작해 금액 일부를 환급해주는 방식 등으로 얼마든지 비자금 세탁이 가능하다. 거래 과정에서 신분이 드러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면세 및 탈세에도 용이하다는 점에서 미술품이 부자들의 변칙 상속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3월15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 서미갤러리에 미술 작품이 들어오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정체불명 자금 거래도 수백억 달해

그림을 매개로 한 재벌가의 ‘검은돈’ 거래가 실제로 있는지, 만약 있다면 홍 대표와도 직접 관련돼 있는지 등은 향후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세무 당국 관계자는 “실제로 그림 거래를 했다면 소득세 등을 납부해야 한다”며 “재벌가에서 서미갤러리의 그림을 사면서 세금을 제대로 납부했는지도 들여다볼 대목이다”라고 말했다.

의심을 살 만한 부분은 또 있다. 입수한 자료만으로는 서미갤러리가 누구와 거래했는지 알 수 없는 거액의 거래가 많았다. ‘거래 메모’에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입출금이 각각 249억원, 582억원에 달했다. 정체불명의 거래가 상당했다는 이야기다. 적게는 수억 원에서 많게는 90억원의 고액 거래가 대부분이다.

계좌번호로 추정되는 ‘12자리 숫자’로 드나든 돈 역시 수백억 원에 달했다. 거래 메모에 ‘1400XXXXXXXX’로 기록된 거래는 출금만 379억원인 데 반해, ‘1800XXXXXXXX’로 기재된 거래는 입금만 209억원에 이른다. 시중 은행 관계자는 “1400번이나, 1800번으로 시작되는 번호는 제1 금융권이나 증권계좌번호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 아리송한 일련번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의문이다. 수백억 원이 드나들었는데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본지는 지난 2월부터 여러 차례 홍송원 대표에게 공식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3월15일 현재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홍송원, 큰아들 갤러리에 505억 입금 

홍송원 대표의 서미갤러리와 장남 박원재씨가 운영하는 원앤제이갤러리 사이의 심상찮은 돈거래도 눈길을 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원앤제이갤러리 계좌를 분석한 결과, 2010~11년 2년 동안 808억원이 입금됐다. 이 가운데 서미갤러리로부터 2010년 300억원, 2011년 205억원 등 505억원이 입금됐다. 2년 동안 원앤제이 통장에 들어온 돈 가운데 63% 정도가 서미갤러리 자금인 셈이다.

본지는 국세청이 2011년 말 작성한 ‘서미갤러리 탈세 의혹’과 관련된 대외비 문건을 입수해 지난해 5월 보도했다. 여기에는 ‘(홍 대표가) 장남(박원재) 회사를 (2005년부터) 5년 동안 매출 910억원, 2010년 당기순이익 60억원의 탄탄한 중견 기업으로 만들어준 사실이 있다. 매출 910억원 가운데 96.9%(882억원)는 서미갤러리와 서미앤투스와 거래한 것’이라고 적시돼 있다. 겉으로 보기엔 서미갤러리(어머니)가 원앤제이갤러리(박원재)의 그림을 구입해주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하지만 세무 당국은 홍 대표가 장남에게 변칙 증여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미술계에는 “홍 대표가 아들에게 재산과 ‘컬렉터’로서의 명성을 전해주려고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두 갤러리의 감사 보고서를 들여다봐도 원앤제이갤러리의 매출 대부분이 서미갤러리·서미앤투스 등과의 내부 거래에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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