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큰언니’에게 두 살 아래 엘리트 노동운동가 반해
  • 반도헌 객원기자 ()
  • 승인 2013.03.1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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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대표와 부인 김지선씨 ‘동지의 삶’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의 부인 김지선씨가 4·24 재·보궐 선거 출사표를 던졌다. 노회찬 대표가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의원직 상실형을 선고받으면서 공석이 된 서울 노원 병 지역구에 부인이 진보정의당 후보로 나선 것이다. 지역구 세습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보정의당은 노 대표의 빈자리에 김지선씨를 후보로 내세웠다. 이런 결정에 김씨의 이력과 노 대표와의 동반자 관계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김씨는 아직까지 노 대표의 부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30년 넘게 여성 노동운동가의 길을 걸어온 치열한 사회운동가다. 북한 황해도 출신의 부모를 둔 김씨는 대청도(인천광역시 옹진군 소재)에서 태어난 섬 소녀였다. 2남 4녀 중 셋째 딸이었던 김씨 집안은 가난했다. 어릴 때부터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인천을 기반으로 노동운동을 해왔다. 대성목재, 삼원섬유, 동일방직 등에서 노조 간부를 지냈다. 1978년에는 ‘부활절 여의도 새벽 예배 사건’으로 구속돼 6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기독교방송을 통해 생방송되는 여의도광장 설교 연단에 동료 여성 노동자 4명과 함께 올라가 ‘동일방직 문제 해결’과 ‘노동3권 보장’을 외친 사건이다. 1983년에는 ‘인천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한 차례 더 구속된 바 있고, 이후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 사무국장, 인천지역노동자연맹 부위원장 겸 사무국장,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 등을 거치며 인천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큰언니’로 불렸다.

4·24 노원 병 재·보선 후보로 나선 김지선씨가 3월13일 노회찬 대표와 손을 잡고 서울 노원구 상계종합사회복지관으로 들어오고 있다. ⓒ 연합뉴스
‘인천 블랙리스트 사건’ 등으로 구속되기도 

김씨와 노 대표는 함께 노동운동의 길을 걸어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자라온 환경이나 노동운동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다르다. 부모를 일찍 여읜 김씨는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목재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현장 노동자 출신 노동운동가다. 나이 탓에 취직이 어려워 스무 살이던 언니의 신분증을 이용했다고 한다.

노 대표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 노동운동가다. 군 복무를 마치고 1979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재학 도중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따고 서울 영등포와 인천 지역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노 대표와 김씨는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도중 만났다. 당시 김씨는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그때는 나이가 두 살 연상이고 노동운동가로서의 경력도 오래된 김씨가 노 대표보다 훨씬 유명했다. 김씨를 마음에 둔 노 대표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지만 여지없이 거절당했다. 김씨는 노동운동의 길이 워낙 힘들었기에 연애나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노동운동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김씨에게 배우자는 함께 같은 길을 갈 수 있는 동지여야 했다. 다음 해 노 대표는 선거에 나선 동료를 도와주러 간 자리에서 김씨를 다시 만났고, 다시 한번 프러포즈를 했다. 이번에는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한 권을 보내며 표지 안쪽에 ‘당신의 결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프러포즈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라는 연서를 보내 김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만나 1988년 가족만 모여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노 대표가 33세, 김씨가 35세였다. 이들 부부의 신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 10개월 만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노 대표가 붙잡히면서 2년 6개월 동안 투옥 생활을 했다. 김씨는 여성의전화에서 일을 하고 책 대여점을 운영하며 홀로 살림을 꾸렸다. 보통 사람들이 맛보는 신혼생활의 즐거움은 꿈도 못 꿨다.

노 대표가 출감한 이후에도 경제적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2004년 17대 국회에 입성하기 전까지 노 대표는 딱 한 번 80만원을 집으로 가져온 적이 있을 뿐 대부분 많아야 50만원 정도를 살림에 보탰다고 한다. 아파트단지 내 재활용품을 모아놓은 곳에서 주워온 옷으로 의복 문제를 해결했을 정도로 어려운 살림이었다.

노 대표가 국회의원 월급 180만원(지난 17대 국회 당시 민주노동당은 소속 정당 국회의원의 월급을 노동자 평균 임금인 180만원으로 한정했다)을 꼬박꼬박 집으로 가져오면서 김씨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비정규 학교에서 중등 생활을 보내 공식적인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2004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입학해 2008년 졸업했다. 2009년에는 복수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여성의전화와 가정폭력상담소에서의 일도 계속했다. 여성의전화 부회장, 가정폭력상담소 소장 등 사회운동을 벌였고 노 대표가 지역구를 선택한 이후에는 노원 지역 협동조합 및 주민회에서 활동했다.

아이 없는 빈자리, 부부 애정으로 채워

정치인으로서 노 대표는 ‘노회찬 어록’이 인기를 끌 정도로 수려한 말솜씨를 자랑한다. 집에서의 노 대표는 말이 없는 남편이다. 노 대표는 함께 있는 시간이 워낙 적어서라고 하지만,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함이 체질화한 탓이다. 그래도 김씨는 노 대표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조언자다. 노 대표는 호주제 폐지와 민주노동당 내 여성 할당제 등을 추진하는 과정, 중요한 정치적 결단을 내릴 때는 언제나 아내의 조언을 받았다.

노 대표와 김씨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녀를 원하지 않는 딩크족은 아니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신혼 초 투옥 생활을 겪은 탓인지 부부는 노력을 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입양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까다로운 입양 조건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되기 이전인지라 입양 조건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아이가 없는 빈자리는 서로 간의 정으로 채운다. 부부는 집에서 나올 때면 입맞춤으로 애정을 확인한다고 한다.

노 대표와 김씨 부부는 가사 분담이라는 면에서 신세대 부부에 가깝다. 집안일은 여건이 되는 사람이 한다. 서로의 일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현장에서 만난 동지로서의 동반자 관계가 부부 생활로도 이어졌다. 노 대표는 요리를 즐기는 편이다. 단순히 집안일을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라 취미 생활에 가깝다. 요리를 할 때는 직접 장을 보고 설거지까지 한다. 결혼 초기 김씨가 입원했던 시절 노 대표는 병원 밥을 먹지 못하게 하고 매끼 집에서 야채죽·버섯죽·계란죽·쇠고기죽·해물죽 등 각종 죽을 쒀 입원실로 날랐다. 결혼하고 한 달 후쯤에는 노 대표가 방에 신문지를 깔고 알타리 김치를 담글 때 예고 없이 찾아든 처남이 보고 놀라기도 했다. 이 일로 노 대표는 처가 식구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노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정규직인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백수가 되면 아내와 영화를 보거나 놀러가는 여유를 누리겠다”고 말했다. 의도치 않은 일로 노 대표는 이제 백수가 됐지만, 김씨가 출마를 하면서 당분간 그런 호사를 누리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노 대표가 국회에 진출하면서 김씨 쪽으로 기울었던 집안일의 무게 추가 노 대표 쪽으로 넘어온 것이다. 김씨가 출마 선언을 한 3월11일 노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제 자신이 다시 가사 활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 심경을 밝혔다. 김씨가 노 대표에게 이제부터 자신이 해 온 만큼만 집안일을 해줄 것을 요구하자 노 대표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그동안 가사 노동에 좀 더 많은 역할을 해두는 건데”라는 후회가 밀려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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