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뒷짐 진 사이 ‘천연 제품’이라고 써도 되지 뭐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3.03.1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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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 자의적으로 쓴 표현에 소비자만 혼란

천연 제품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식품은 물론이고, 의류·세제·콘돔에 이르기까지 그 단어가 훈장처럼 붙어 있다. 생수는 땅속에서 끌어올린 자연물인데도 굳이 천연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스웨덴의 펄프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수입산 고급 기저귀로 둔갑한다. 심지어 뜨거운 냄비를 집는 베트남산 나무집게도 천연 도색 방법으로 옻칠을 했다며 버젓이 대형 할인점 유기농 제품 판매대를 차지했다. 이들 제품은 자연·웰빙·친환경·유기농 등 다양한 표현으로 바꿔가며 소비자를 유혹한다.

상품에 천연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주무 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이에 대해 명쾌한 답을 하지 못했다. 기자의 문의 전화를 이 부서에서 저 부서로 떠넘기다가 대변인실이 내놓은 답은 “식품위생법에 따르면 인공 합성물이 없는 제품에 천연이라는 표시를 할 수 있다”였다.

서울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지난해 10월16일 ‘화학조미료 안 먹는 날’을 맞아 식품첨가물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정부의 천연 제품 관리 허술

합성하지 않은 물질, 즉 자연물에서 추출한 성분을 사용하면 제품에 천연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된다는 말이다. 그것도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임의로 표기한다. 천연 물질이라도 여러 가지 물질과 섞이는 과정에서 화학 반응을 일으키면 합성 물질이 된다. 종합 조미료 성분인 MSG(글루탐산나트륨)가 대표적인 사례다. MSG의 핵심 성분(글루탐산)은 다시마나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천연 물질이다. 그러나 MSG는 합성 물질로 분류된다. 김동술 식약청 첨가물기준과장은 “물에 잘 녹고 감칠맛을 더 내기 위해 글루탐산에 나트륨을 혼합하는 과정에서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천연물 관리도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다. 예컨대 간에 좋은 성분으로 알려진 헛개나무 추출물은 사용하기에 따라 알레르기와 독성 간염을 일으킬 수 있다. 또, 그 추출물을 끓이면 효과도 사라진다. 물리적 또는 화학적 반응에 따라 약이 독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천연물을 어디에서 얼마나 어떻게 추출한 것인지에 관심이 없다. 안상훈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천연물을 강조하는 건강식품류는 그 효과가 중요하지만, 정부는 효과를 따지지 않고 독성만 없으면 허가를 내준다”고 지적했다.

업체는 이런 허점을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한다. 정부가 마치 특정 식품의 효능을 인정한 것인 양 포장해서 소비자를 현혹한다. 한 업체 사장은 “글자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식약청 허가증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비자는 그 제품이 정부로부터 효과를 인정받은 것으로 이해한다”고 털어놓았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천연에 대한 해석이 전문가 사이에도 제각각이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자연물이라는 점만 공통된 시각이다. 그 해석도 모호하다. 이상국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소장은 “거의 모든 식품 재료가 천연에서 나온 것인데, 굳이 일반 식품에 천연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민은 더 혼란스럽다. 제품 포장지에 적힌 성분표를 봐도 용어가 낯설어 어떤 물질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간략하고 눈에 잘 보이는 ‘천연’ 또는 ‘100%’라는 표시에 혹할 수밖에 없다. 일부 시민단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을 모두 인공 첨가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세계소비자연맹은 매년 10월16일을 화학조미료 안 먹는 날로 정하고 그 위해성과 천연 조미료를 만드는 방법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인다.

게다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식중독 사건이나 중금속 오염 파문으로 화학 성분이 들어가지 않은 천연 제품을 찾는 소비자는 늘어난다. 정부는 MSG가 안전한 물질이라고 발표했지만,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MSG를 사용하지 않는 곳을 ‘건강 식당’으로 분류해 소개하는 등 엇박자를 내고 있다.

기준이 모호한 탓에 외국에서는 첨가물을 천연이나 합성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는 것이 식약청의 설명이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측은 “일본은 MSG를 최초로 개발하고 생산한 나라여서 그 물질에 대해 규제를 하지 않는다”면서 “다른 나라도 한국만큼 주방에서 조미료를 많이 사용하는 음식 문화가 아니라서 그 위해성을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반박한다.

천연 성분, 쉬운 말로 표시할 필요

과즙을 1% 또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그 과일의 이름과 사진을 포장지에 표기한 제품이 많다. 미국·일본·캐나다 등 외국에서는 소비자 오인을 막기 위해 원재료에 포함하지 않은 재료를 상표명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특히 영국은 과일로 만든 것이 아닌 합성 첨가물로 딸기 맛을 낸 요구르트는 용기에 딸기 그림을 넣을 수 없도록 했다. 우리도 이처럼 천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기준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또, 그 기준에 맞는 제품인지 관리할 책임도 정부의 몫이다.

땅콩, 우유, 딸기, 복숭아 등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제품 성분표를 보고 해당 물질이 있는지를 살핀다. MSG 등 특정 첨가물에 이상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특정 물질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문이 식품업계와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표기법도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아니라 일반 소비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예컨대 글루탐산나트륨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향미 증진제라는 표기와 함께 어떤 사람에게서 무슨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면 소비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15년 넘게 유명 제과회사 신제품 개발팀에서 근무했던 안병수 후델식품건강교실 대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맛과 향은 화학물질로 만들어낼 수 있고, 가짓수는 2200개가 넘는다”며 “천연 향료도 있지만 맛과 향을 진하게 하려고 고농도 제품으로 가공하면서 합성첨가물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물질을 모두 알리기에는 역부족이겠지만, 소비자가 민감하게 생각하는 재료만이라도 적극 설명해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딸기와 설탕만으로 만든 딸기잼과 거기에 착향료와 착색료를 첨가한 딸기잼이 있다고 치자. 첨가물을 넣은 딸기잼이 딸기의 맛과 향이 좋다. 우리가 알고 있는 딸기의 맛과 향은 첨가물에 의해 진해진 것이다. 딸기와 설탕만으로 만든 딸기잼 맛이 ‘진짜 맛’이지만 사람의 혀는 맛이 없다고 느낀다. 이처럼 MSG를 포함한 모든 식품첨가물은 식품 재료 본래의 맛을 죽인다. 그런 식품을 많이 먹을수록 혀의 미각세포가 둔감해져 점점 강한 맛을 찾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식품 재료만으로 맛을 낸 식당은 줄어들고 식품첨가물로 감칠맛을 낸 음식점이 늘어난다. 이런 식당이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맛집으로 소개되면 사람들은 그 맛을 그 음식 고유의 맛으로 잘못 인식한다. 천연물이나 합성물에 대한 맹신이 낳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천연 제품, 얼마나 팔리나 

국내 천연 제품 시장은 3조~5조원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통계치는 없다. 그러나 한 대형 할인점이 판매하는 천연 제품의 매출 증가 정도를 살펴보면 소비자가 천연 제품을 얼마나 선호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마트의 지난해 천연 제품 매출액은 2011년보다 11.7% 증가했다. 이마트가 파는 모든 상품의 평균 매출 증가율이 4.2%였던 것에 비하면 가파른 오름세다. 소비자가 많이 찾는 천연 제품군은 양곡, 채소, 유제품, 과일, 과자, 조미료, 음료, 대용식, 커피, 통조림, 냉동식품 순이다. 같은 기간 양곡 매출은 26.9%, 음료는 19.6%, 대용식은 17.5% 증가했다. 문성현 신세계 홍보과장은 “과거에는 농산물이나 신선 식품을 찾았지만 요즘은 가공식품에서도 천연 제품을 찾는 추세”라고, 달라진 천연 제품 소비 흐름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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