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시대만 있나 유재석도 나간다
  • 정덕현│문화평론가 ()
  • 승인 2013.03.1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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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닝맨> 등 예능 프로가 한류의 새로운 대세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TV 포럼’에 <런닝맨> 조효진 PD가 참석했을 때의 이야기다. <런닝맨>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대단한 내용도 아니었는데 참석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소개가 끝나고 나오자 거기 앉아 있던 이들 중 대다수가 조효진 PD를 따라와 <런닝맨>에 대해 물었다. <런닝맨> 싱가포르판을 만들고 싶다는 의사 표현도 있었고, 무엇보다 포맷 수출에 대한 문의가 많았다. 조효진 PD는 <런닝맨>에 대한 해외의 반응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2011년 태국 방콕, 중국 베이징, 홍콩을 방문했을 때 <런닝맨>의 인기를 실감했다. 방콕 수왓나폼 공항에 <런닝맨> 출연자가 도착했을 때 공항 2층까지 가득 메운 팬이 한국어로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연호하는 모습이 방영됐다. ‘광수짱’ ‘하로로’ ‘슴돠!’ ‘평온 개리’ 등 프로그램을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적을 수 없는 문구가 든 플래카드를 보면서 지석진은 “<런닝맨>이 이 정도였어?” 하고 물었다. 태국이 고향인 닉쿤은 “<런닝맨> 인기 많아요”라며 현지 인기를 설명했다.

베이징에서는 정보가 잘못 알려져 썰렁했던 공항이 태국과 비교되면서 오히려 큰 웃음을 주었다. 하지만 미션 장소인 스차하이가 알려지면서 몰려든 중국 팬으로 순식간에 북새통이 되는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또, 홍콩에서도 수백 명의 팬이 공항 입국장을 가득 메웠다.

SBS 예능 프로그램 아시아 레이스 편에 현지인들이 열광하고 있다. ⓒ SBS 제공
예능 한류 징후 오래전부터 나타나

최근의 <런닝맨> 아시아 레이스로 마카오와 베트남에서 나타난 팬 반응은 몇몇 팬클럽 차원을 넘어섰다. 특히 베트남에서 이광수를 연호하는 열광적인 팬들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조효진 PD는 촬영하는 것이 어려웠을 정도라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태국, 중국, 홍콩에서 촬영하면서 팬덤을 체감했다. 굉장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런닝맨>의 특성상 팬이 몰리는 것이 미션 수행을 어렵게 하는 경우도 있다. 또, 사고 위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비밀로 하려고 한다. 자랑하려고 해외촬영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번 마카오·베트남 촬영은 사전에 기사가 나가버렸다. 날짜와 장소까지 알려져 어느 때보다 많은 팬이 운집했던 것 같다.”

국내에서 난 기사 한 줄이 그토록 많은 현지 팬을 끌어모으게 했다는 얘기가 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예능 한류 기운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징후를 보여왔다고 한다. <런닝맨>에서 ‘멱PD’(멱살을 잡을 정도로 얄미운 PD)로 통하는 김주형 PD는 “방송이 나간 지 3시간만 지나면 <런닝맨>에 현지 자막이 달려 인터넷에 올라올 정도”라고 말했다. “유재석 팬덤은 중국에서 꽤 폭넓은데, <무한도전>이나 과거 <X맨> <패밀리가 떴다>에 이어 <런닝맨>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계보가 팬덤을 더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

국내에서 미드(미국 드라마) 열풍이 한창일 때의 풍경과 유사하다. 당시 <프리즌 브레이크>는 방영된 지 한 시간도 안 돼 자막이 붙어 인터넷에 올려지곤 했다. 결국 인터넷이라는 인프라를 통해 예능 한류도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얘기다.

<런닝맨>, 특히 유재석 사단의 해외 반응이 유독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한류 예능의 조짐이 <런닝맨>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1박2일> <청춘불패> 같은 프로그램도 해외에 팬덤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는 전 세계에 KBS의 예능 프로그램을 뿌려주는 KBS 월드라는 플랫폼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특히 <뮤직뱅크>처럼 세계 72개국에 동시 생중계되면서 K팝의 인기를 주도하는 프로그램은 KBS 월드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생긴 K팝 한류는 예능 한류와도 연관된다. 아이돌이 출연해 무대와는 전혀 다른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청춘불패>는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인기가 높았다. 아이돌 그룹 팬에게 이런 영상 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이다.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멤버가 출연하면서 이 프로는 해외 팬에게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K팝 한류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모인 사례로 <나는 가수다>의 중국 위성 채널 후난TV 판권 계약을 들 수 있다. <나는 가수다> 중국판은 현재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우리 예능의 어떤 요소가 해외 팬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아시아 TV 포럼’에 참석했던 조효진 PD가 현지에서 들은 <런닝맨>의 인기 비결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분들은 <런닝맨>이 서양의 예능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가장 큰 특징은 프로그램이 박진감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과정에서 영화적인 속성이 들어 있다는 것도 차별점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유머 코드가 통한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머는 세계 공통어이지만 그래도 지역적인 색깔을 벗어나긴 힘들다. 그런데 <런닝맨>은 유머 코드가 글로벌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해외 팬 매료시킨 우리 예능의 장점

이런 보편성만큼 중요한 것은 <런닝맨>이 갖고 있는 한국적 예능 프로그램의 특수성이다. 서구의 예능 프로그램 포맷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리얼리티쇼에 머물러 있다. 리얼리티쇼에는 일반인이 출연하는 것이 대세다. 그것의 목적은 출연자의 사생활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자극적인 해외 리얼리티쇼 형식은 국내로 들어오면서 우리 TV 프로그램에 대한 특유의 정서 때문에 바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쇼. 일반인 대신 연예인이 출연하고 진짜 얼굴을 끄집어내기보다는 캐릭터에 집중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마디로 해외 팬의 눈에는 톱 연예인이 리얼리티쇼에 출연해 맨얼굴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

지난 한 해 한류의 가장 큰 성과인 싸이를 단순히 K팝의 연장선으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 예능 프로그램으로서는 억울한 면이 있다. <강남스타일>의 성공에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일정 부분 지분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한창 미국에서 주가를 높이고 있던 싸이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홍철에게 했던 말에서 드러난다. “여기 할로윈 때 너 옷하고 재석이 형 옷이 제일 많았어. 너한테 고맙다는 얘길 해야 된다고 어떤 네티즌 분이 얘길 많이 하시더라고. 이 뮤직비디오에 지분이 있다면 노홍철 지분이 한 30%는 된다고. 외국 애들은 제일 터지는 게 이 장면이야. 되게 좋아해. 너무 더럽다고.(웃음)” 사실이 그렇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보여주는 B급 정서란 사실상 <무한도전>이 일련의 가요제를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준 B급 코드의 연장선이다.

아직까지 예능 한류의 본격화를 거론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미 물밑에서 생겨나고 있는 하나의 흐름이다. 싸이의 성공 이면이나 <런닝맨> 같은 프로그램이 해외에 나갔을 때 확인하는 그 열광을 통해 이미 열린 한류의 물꼬 위에 예능 또한 한 흐름을 형성하리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작은 마중물이 어느 순간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가 되어 흐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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