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말씀’의 부메랑, 원세훈도 위험하다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3.03.2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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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세종시·4대강 등 국내 정치 개입 논란 확산

과연 국정원장의 ‘말씀’만 있었을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도 결국 올 것이 오고 있다.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논란이 확산되면서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국정원 비밀팀의 존재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국정원 내의 일명 ‘4대강팀’ ‘세종시팀’이 실제 운용됐는지를 둘러싼 의혹이다.

원세훈 전 원장의 국내 정치 개입 의혹을 제기한 민주당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는 3월1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원 전 원장의 국내 정치 개입 정황이 드러나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내용을 엄밀히 살펴보면 단순한 훈화 발언이 아니라 별도의 팀을 염두에 둔 차원의 발언으로 읽히는 대목이 있다”며 “그동안 의혹이 제기돼온 국정원 내 4대강 대응팀이나 세종시 대응팀 등이 실제 운영됐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실제 진 의원이 <시사저널>에 제공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이하 말씀) 자료 문건 내용(16쪽 사진)을 살펴보면 의혹을 살 대목이 나온다. 진 의원에 따르면 ‘말씀’은 원 전 원장이 재임 중이던 2009년 2월 이후 한 달에 한 번꼴로 개최한 확대 부서장회의 결과를 정리해 국정원 내부 인트라넷 게시판에 올린 글 중 일부다. 말씀은 2009년 5월15일부터 올해 1월28일까지 최소 25회에 걸쳐 게재된 것으로 알려졌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국회 정보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 시사저널 유장훈
‘4대강팀’ ‘세종시팀’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10년 4월16일자 말씀에는 ‘세종시·4대강 등 주요 현안에도 (국정)원이 확실하게 중심을 잡고 대처해주기 바람’이라고 적혀 있다. 이보다 앞선 같은 해 1월22일자 말씀에는 ‘세종시 등 국정 현안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좌파 단체들이 많은데 보다 정공법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음’이라고 나와 있다. 특히 ‘4대강 사업 등 국책 사업이 원활히 추진되기 위해 ‘책잡히는 일’이 없어야 하므로, 지역민들에게는 최대한 성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함’(2011년 1월21일자)이라거나 ‘4대강 사업이 장마철 이전 마무리되도록 지부장들은 지원에 만전을 기하고, 공사 현장의 안전 문제 점검’(2011년 2월18일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국정원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라기보다는 특정 업무를 수행할 모종의 전담팀을 염두에 두고 ‘실질적으로 지휘를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동안 국정원 내부에서 국내 정치 사안과 관련된 별도의 비밀팀을 운영 중이라는 의혹은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4대강 사업 논란이 확산될 당시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토해양부의 4대강 TF팀을 진두지휘하는 상부 조직이 국정원 내부에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또 지난 2010년 1월 대전 지역 인터넷 신문인 ‘대전뉴스’는 “국정원 직원들은 연기군 남면 면장 일행을 만나 세종시 문제에 대한 협조를 구한 데 이어 연기군 내 대부분의 읍·면장을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며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세종시 논란에 관여한 의혹을 보도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 ‘국정원 댓글녀’ 논란에 이어 국정원 내부 전자게시판인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내용이 일부 공개되면서 논란이 확산된 모양새다.

하지만 원세훈 체제의 국정원은 4년 내내 정치권의 시빗거리였다. 그는 특히 비(非)대공·정보 라인 출신이어서 국정원 내·외부에서 자질 논란을 빚어왔다. 국정원 출신인 한 정치권 인사는 “국정원장은 대통령과 정보 교환을 격의 없이 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일정 부분 측근 인사가 기용될 필요성은 있다”면서도 “하지만 원 전 원장은 안보와 정보 분야 비전문가인데, 그런 측근이 원장으로 가니 구설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긴 재직 기간도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명 ‘MB의 복심(腹心)’으로 통하는 원 전 원장은 지난 2009년 2월 행정안전부장관에서 국정원장으로 발탁된 후 이 전 대통령의 임기 내내 원장직을 맡아왔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둘러싼 의혹은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고소·고발로 이어지면서 치열한 법적 다툼을 예고하고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참여연대 등은 3월21일 원 원장을 국가정보원법 위반과 업무상 횡령,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보다 앞선 19일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는 원 전 원장과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씨(29)를 국가정보원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이 대표의 고소 사건을 공공형사수사부(부장 최성남)에 배당해 수사에 착수했다.

앞으로 진행될 법적 다툼의 핵심은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이 국내 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국정원법을 위반했는지 여부다. 현행 국정원법에 따르면 국정원의 정치 관여를 금지(9조)하고, 직권 남용을 금지(11조)하고 있다. 9조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 또는 반대하거나, 찬양 혹은 비방하는 행동’을 금지하고 있다. 11조는 ‘기관·단체 또는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을 못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9조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11조 위반은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어 처벌 강도가 센 편이다.

국정원법을 떠나 내란죄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3월21일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부 법학자들은 국정원장의 지시 사항 등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종북 낙인’ 그리고 ‘내부의 적’으로 국론 분열, 이런 부분들은 헌법상 내란의 죄까지 물을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며 사안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정치권으로도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민주당은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등 이른바 ‘국정원 바로잡기’에 팔을 걷어붙인 상황이다. 일단 여당은 국정원의 정치 개입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분위기다. 국회 정보위원장인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은 3월2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진선미 의원이 공개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은 발언 전문이 아니라 일부분을 발췌해 짜깁기한 글로 보인다”며 “국정원을 통해 전체 발언 전문을 받아보니 국내 정치에 개입한 정황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3월21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고발하기 위해 서울 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국정원에서 박근혜도 집중 사찰”

하지만 원 전 원장 교체 이후 국정원에 대한 고강도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과 MB 정부 시절 국정원 간의 미묘한 갈등 관계 때문이다. 이석현 민주당 의원은 지난 2011년 6월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세종시 문제로 파란을 겪은 후 2009년 4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사찰하기 위한 팀이 약 20명 인원으로 국정원 안에 꾸려졌다”며 국정원 내부에 박근혜 사찰팀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친박계 내에서도 이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국정원 내부 사정에 밝은 친박계의 한 의원은 “국정원장은 방대한 양의 정보를 만지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이지만, 그만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면서 “국정원의 역할을 대공·안보 분야로 제한하고 있는 국정원법의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원 전 원장의 국내 정치 개입 논란과 관련해 “비밀 사항인 정보기관 수장의 발언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고 국가 안보를 위한 정당한 지시와 활동이 ‘정치 개입’으로 왜곡된 데 대해 깊은 유감”이라며 “원 전 원장은 취임 이후 지금까지 정치 중립과 본연의 업무 수행을 강조해왔다”고 반박했다.


권력의 단맛은 짧았다 

1961년 중앙정보부(중정)가 창설된 이래 안전기획부(안기부)와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기까지 역대 정보기관장들의 수난은 더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들은 막강한 권력도 행사한다. 문제는 그런 특혜와 권력을 최우선적 임무인 국가 안위를 위해 쓰지 않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위해 쓴다는 데 있다. 그래서 정보기관장은 항상 대통령의 최측근이 맡았고, 그들의 말로는 대부분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비극을 맞는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과거 군사 정권 시절에는 특히 더했다. 6년 3개월 재직이라는 역대 최장 기록을 갖고 있는 김형욱 전 중정부장은 숱한 정치 공작으로 악명을 떨쳤고, 퇴임 후에는 권력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주군’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칼을 들이댔다가 해외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실종됐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은 그런 주군을 시해한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학성·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내란·반란죄로 구속됐고, 이현우 전 안기부장 역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퇴임하자마자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됐다.

역대 안기부장과 국정원장의 비극적 말로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퇴임 후 기소만 무려 4차례나 당했을 정도로 고초를 겪었다. 1997년 대선 직전 이른바 ‘북풍(北風)’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총풍(銃風)’ 사건을 인지하고도 수사를 지시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2001년에는 안기부 예산을 선거 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이른바 ‘안풍’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았다. 안기부 자금 횡령 및 도청 사건과 관련해서도 구속되거나 검찰 조사를 받았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1993년 문민 시대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치로 교수 출신 안기부장 발탁이라는 파격적 인사로 등장한 김덕 전 안기부장도 뒤끝이 개운치는 못했다. 구속은 아니었지만 안기부장에서 물러나 부총리로 재직하던 중 지방선거 연기 공작을 추진한 혐의가 드러나 부총리에서 낙마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을 거쳐 간 네 명의 역대 국정원장들도 화를 면치 못했다. 특히 ‘미림’팀으로 불리는 도청 사건 파문이 크게 불거지면서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은 결국 도청 사건으로 2005년 11월 구속됐다. 천용택 전 원장은 구속은 면했지만 검찰 조사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천 전 원장은 재임 시절인 1999년 12월 “1997년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이른바 대선 자금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켜 7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나마 노무현 정부 첫 국정원장을 지낸 고영구 전 원장은 화를 면했다. 하지만 국정원 사상 첫 내부 승진 원장으로 조명받았던 김만복 전 원장은 2008년 2월 남북 회담 문건 유출 파문으로 중도하차했다. 지난 2011년 6월에는 일본의 한 매체에 2007년 남북정상회담 관련 일화를 기고해 기밀 유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전임자였던 김승규 전 원장 역시 2006년 10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일심회 사건은 간첩단 사건”이라고 말해 피의사실 공표 및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러고 보면 역대 중정부장과 안기부장 중 각각 최장 기록을 가진 김형욱 전 부장과 권영해 전 부장의 비극적 말로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재임 기간과 권력의 치부 정도가 정비례한 셈이다. 현재까지 역대 국정원장 중 최장 기록을 가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과연 퇴임 후 선배들의 불우했던 전철을 밟지 않으며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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