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말만 들어도 민주당 벌벌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3.03.27 13:3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월 재보선 전멸’ 시나리오 현실화에 속앓이 깊어져

민주통합당의 4·24 재보궐선거 공천심사위원회 첫 회의가 열린 3월19일 국회 민주당 당 대표실. 서울 노원병 공천 여부를 두고 다들 표정이 심각했다. 한 공심위원이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대선 때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민주당이 양보하는 모양새로 가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다른 공심위원도 “승산이 높지 않으니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그 정도 선에서 논의는 싱겁게 끝났다. 회의에 배석했던 한 실무진은 “노원병 공천 문제에 대해 가급적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민주당의 속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서울 노원병 공천을 사실상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면서 ‘4월 재보선 전멸’의 시나리오는 현실화되고 있다. 당장은 정치의 영역에서 ‘상수’가 된 안철수 전 교수측과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의 문제이지만, 좀 더 길게 보면 민주당의 존립 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여기에다 127석을 가진 제1야당이자 공당으로서의 자존심, 야권 맏형으로서의 역할론 등이 겹쳐 있다. 이래저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 노원병 재보궐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등록한 안철수 전 교수(왼쪽 사진,ⓒ 시사저널 임준선)를 따르는 많은 취재진 및 인파와 민주당 이동섭 후보측(오른쪽 사진,ⓒ 시사저널 박은숙)의 썰렁함이 대조를 이룬다.
‘노원병 무공천론’…무기력한 제1야당

민주당이 서울 노원병 공천 여부로 머리를 싸맨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된다. 우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현실론’이다. 안 전 교수와의 득표율 차이가 상당한 수준까지 벌어지거나, 혹여 3등이라도 하게 되면 민주당으로선 체면이 말이 아니다. 반면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세웠다가 야권 표가 갈라지면서 새누리당에게 승리를 헌납할 경우 비난을 혼자 뒤집어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상임고문단을 비롯해 현 지도부의 생각이 대체로 이쪽이다. 친노·주류 진영에서도 현실적인 접근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많다.

다음은 안 전 교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론’이다. 대선 때 안 전 교수가 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양보했으니 이번에 빚을 갚아야 한다는 논리다. 비주류 중진인 김영환 의원은 “민주당은 안 전 교수가 대선 승리를 위해 후보직까지 양보하며 희생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주당이 노원병에 후보를 낼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안 전 교수의 희생에 대한 결례”라고까지 말했다. 실제로 상당수 비주류 의원들의 입장은 이에 가깝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주장도 있다. 친노 진영 김태년 의원은 “제1야당인 민주당이 후보를 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야권의 대표로서 연대의 정신과 통합의 가치를 지켜야 하는 소임 역시 막중하다”고 말했다. 현실론과 당위론 모두 일리가 있는 만큼 당위론을 명분 삼아 안 전 교수를 야권 연대의 큰 틀 안에 묶어두는 ‘전략적 선택’을 하자는 것이다. 시쳇말로 안 전 교수가 예뻐서 양보하자고 하는 게 아닌 것이다.

반면, 민주당이 후보를 내야 한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충청권 3선인 이상민 의원은 “안철수 전 교수와 민주당 모두 이번 재보선에서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 전 교수가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의 어느 진영과도 한마디 상의도 않은 채 출마를 선점해놓고 야권 연대에 대해 정치공학 운운하는 마당에 민주당이 공천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강기정 의원도 “당당하게 후보를 내고 나서 그 후보가 안 전 후보와 정치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당내에는 이런 견해를 가진 의원이 꽤 많다. 그런데 드러내놓고 이를 공론화하는 의원은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당의 한 소장파 재선 의원은 “분명히 논란은 벌어지고 있는데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의견이 조율되는 건 아니고, 그런 와중에 얼렁뚱땅 공천을 하지 않는 쪽으로 분위기가 형성돼 간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민주당의 이런 상황에 대해 신율 명지대 교수는 “대선 패배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어설픈 거대 야당’의 현주소”라고 꼬집었다.

민주당을 노원병 공천 문제로 몸살을 앓게 만든 것은 안철수 전 교수의 달라진 정치 행보다. 지난해 대선 당시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안 전 교수는 민주당과 진보정의당이 노원병 출마의 명분과 시점을 고민하는 사이 먼저 출사표를 던지고 나섰다. “알박기를 한 것”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하면서 명분보다 실리를 택한 것이다. 그의 다소 도발적인 행보에 진보정의당은 발끈하고 나섰지만, 민주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민주당의 한 수도권 초선 의원은 그의 출마에 대해 “사실상 민주당과의 헤게모니 싸움을 선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향후 정계 개편이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에 끌려가지 않을 것임은 물론, 자신이 정계 개편의 주도권을 쥐고 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의원은 “안 전 교수측이 신당 창당설을 흘리는 것도 결국은 민주당에 원심력이 작동하도록 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안철수, 헤게모니 싸움에서 기선 제압

실제로 안 전 교수의 재등장만으로도 이미 민주당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친노·주류 일각에서 안 전 교수를 비판하며 ‘부산 영도 차출설’을 제기하자, 비주류는 공개적으로 “안 전 교수의 의중을 존중해야 한다”(황주홍 의원)고 반박했다. 심지어는 ‘친노 대리인’으로 5·4 전당대회의 당 대표 출마가 거론됐던 김부겸 전 최고위원조차도 “민주당은 안 전 교수의 훼방꾼이 돼선 안 된다”고 경고하고 나섰다(46쪽 인터뷰 기사 참조).

민주당 입장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도 안 전 교수가 우위를 점한 지금의 헤게모니 싸움 구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수도권 비주류 의원은 “안 전 교수가 국회에 입성하게 되면 민주당은 매번 노원병 출마 문제와 똑같은 딜레마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새 정치를 명분 삼아 안 전 교수가 무언가를 도모할 때 민주당이 여기에 힘을 싣지 않으면 ‘기득권 지키기’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힘을 실었다가는 민주당의 존립 기반이 점점 취약해질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 내내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렸던 것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당분간 여의도에서 최고의 뉴스메이커는 ‘국회의원 안철수’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상당수 친노·주류 인사들도 안철수 전 교수 쪽으로 균형추가 더 기울어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 비례대표 의원은 “지금은 비주류가 당권을 잡기 위해 안 전 교수를 적극 옹호하고 이용하지만, 실제로 자기들이 당권을 잡는 순간부터 안 전 교수가 가장 큰 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5·4 전당대회에서 비주류가 당권을 잡는다고 해서 안 전 교수가 민주당에 입당할 가능성은 없고, 오히려 하반기 10월 재보선을 앞두고는 안철수 신당 논의가 더욱 구체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민주당이 그야말로 뼈를 깎는 혁신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재보선 이후엔 무소속 안철수 의원과 가상의 신당에 계속 끌려다니게 될 것”이라며 “5·4 전당대회가 지금처럼 주류에서 비주류로 당권이 넘어가는 정도에 그친다면 민주당의 미래는 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