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동아빠’의 등골이 ‘백팩’으로 더욱 휜다
  • 조현주 기자 (cho@sisapress.com)
  • 승인 2013.03.27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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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하고 우울한 세태 반영한 ‘2012 신조어’

‘등골 백팩’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될 만큼 비싼 책가방을 뜻하는 신조어다. 주로 초등학생이 어깨에 메는 고가의 가방 브랜드를 이르는 이 말이 2012년의 대표적인 신조어로 꼽힌 것을 보면 가방 하나 때문에 ‘등골이 휠 지경’에 이른 부모들이 꽤 많은 모양이다.

국립국어원(원장 민현식)은 2011년 7월1일부터 2012년 6월30일까지 한 해 동안 일간지와 인터넷 매체 등 총 139개 매체에서 사용한 신조어를 정리해 ‘2012년 신어 기초 자료’ 보고서를 최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각박한 현실’을 반영하는 신조어가 여럿 등장해 눈길을 끈다.

우선 심각한 취업난과 경제난으로 인해 만들어진 신조어들이 눈에 띈다. ‘기생중년’은 결혼하지 않은 채 부모에게 얹혀사는 중년을 빗댄 신조어다. 이와 유사한 부류의 신조어로는 ‘찰러리맨(child salaried man)’이 있다. ‘찰러리맨’은 취업 후에도 부모에게 심리적·물질적으로 기대어 사는 사람을 뜻한다.

접미사로 ‘-푸어(poor)’가 붙는 신조어들 또한 팍팍한 현실을 보여준다. 비싼 전세나 월세 지출로 주머니가 얇아져 살기 어려운 사람을 뜻하는 렌트푸어(rent poor), 직장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학력과 학점, 토익 점수 따위를 올리기 위한 비용 지출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을 뜻하는 스펙푸어(specification poor)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 외에 웨딩푸어(결혼을 위해 대출을 받아 가난한 사람), 에듀푸어(과다한 교육비 지출로 살기 어려운 사람), 베이비푸어(과다한 출산비 지출로 살기 어려운 사람), 펫푸어(반려동물을 기르는 비용으로 인해 점점 가난해지는 사람) 등의 신조어가 같은 계열로 묶인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세대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신조어도 많다. 실업과 빈곤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세대를 뜻하는 ‘좌절세대’가 대표적 사례다. 맹수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땅속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의 모습을 빗댄 신조어 ‘타조세대’는 노후에 대한 불안은 크지만 대책은 전혀 없는 세대를 뜻하는 신조어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시대를 뜻하는 ‘삼포시대’라는 신조어 또한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행복한 감정을 사치처럼 여기는 풍조가 생겨난 탓인지 ‘웃프다(재미가 있어 웃을 만하면서도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말까지 등장했다.

또 쪼그라든 주머니 사정에 맞춰 현명하게 대처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실속형 소비를 하는 여성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간장녀’, 생활력이 강한 여자를 줄여서 말한 ‘생강녀’가 이에 해당한다. ‘간장녀’나 ‘생강녀’는 2006년 인터넷을 휩쓴 신조어로 급부상한 ‘된장녀’와는 정반대 의미를 지닌 말이다.

‘카톡 감금’ 등 스마트폰 영향 신조어 많아

예전과 달라진 세태를 반영하는 신조어 또한 눈길을 끈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서울 대치동에 전세를 얻는 아빠를 이르는 신조어인 ‘대전동아빠’가 여기에 속한다. ‘대전동아빠’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교육열을 뜻하는 대명사 격으로 쓰였던 ‘대치동엄마’를 대신하는 신조어로 새로운 사회 풍속도를 담고 있다.

달라진 자녀 양육 풍속을 읽을 수 있는 신조어도 있다. 맞벌이하는 자녀를 대신해 조부모가 손자·손녀를 돌보며 생기는 정신적 스트레스 등 건강상의 문제점을 이르는 ‘손주병’이나, 처갓집에 자녀를 맡기다 보니 생겨난 ‘처월드’는 달라진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저출산 시대를 맞아 자녀를 귀하게 키우는 부모를 이르는 말인 ‘펭귄부부’도 마찬가지다. ‘펭귄부부’는 식생활·외식·여가 등 가족생활 패턴을 모두 어린 자녀에 맞추는 부부를 뜻한다.

신주거 풍속을 담은 말도 있다. 경제적으로는 자립했지만 독립하지 않은 채 부모에게 집값을 내고 부모와 함께 사는 자녀를 이르는 ‘신캥거루족’과 거주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가족이 아닌 사람과 집을 같이 쓰는 사람을 뜻하는 ‘하메족(housemate族)’ 등이 이에 해당된다.

스마트폰 보급에 영향을 받은 신조어도 여럿 등장했다. 가령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고 돈을 버는 사람을 뜻하는 ‘앱테크족(application tech族)’이나 ‘SNS 피로증후군(과다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이용으로 발생하는 피로감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증후군)’과 같은 말들이 이에 해당된다.

또 ‘카톡 감금(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의 단체 대화방에 강제로 초대당해 원하지 않지만 계속해서 메시지 도착 알람을 받아야 하는 경우를 감금된 상태에 빗대 이르는 말)’이나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 ‘카톡 감옥’ 또한 스마트폰으로 인해 생겨난 신풍속이다.

신조어는 세태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좌절세대’ ‘스펙푸어’ ‘손주병’과 같이 지난해 신조어는 과거에 비해 확연히 어두워진 것이 특징이다. 10여 년 전인 2000~06년에 등장한 신조어와 비교해도 이를 알 수 있다. 2002년 등장한 대표적인 신조어는 ‘꽃미남’, 2003년은 ‘몸짱’, 2006년은 ‘듣보잡’ 같은 것들이다. 2012년의 우울한 말들과는 다른 여유가 느껴진다.

유독 암울한 뉘앙스의 ‘2012년 신조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번 ‘신어 기초 자료’ 조사에 참여한 이승재 국립국어원 언어정보팀장은 “이번에 발표한 신조어는 지난해 새롭게 생겨난 말의 형태를 모아놓은 것이다. 새로운 세태를 보여주는 말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며 “과거에 등장한 ‘된장녀’와 같은 말들 또한 꾸준히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령 ‘된장녀’와 ‘생강녀’ 중 어느 것이 자주 쓰이는 말인지, 또 현실을 더 반영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국립국어원은 ‘2012 신어 기초 자료’에 오른 신조어 가운데 일부를 오는 10월 정식 공개하는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우리말샘)에 게재할 방침이다. ‘우리말샘’은 일반인이 편집에 참여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 형식의 온라인 국어대사전으로, 사용자가 직접 단어를 올리거나 단어 설명에 대한 의견을 남길 수 있다. 이승재 팀장은 “이번 보고서에 실린 500여 개의 신어 가운데 정치적·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단어 위주로 선정해 사전에 실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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