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재벌 회장님도 단골 책 대신 칼 잡고 ‘소고기’ 공부 중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3.2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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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MBA 출신, 이준용 ‘팔판정육점’ 사장

2주 교육에 수천만 원을 받는 교육 프로그램을 대기업에 팔기 위해 양복을 차려입고 고층빌딩을 오가며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밤늦게까지 사람을 만나던 도시 생활자 이준용씨. 그가 요즘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주식회사 팔판정육점’으로 출근한다. 오후 5시께 가게 문을 닫으면 저녁 7시까지는 집에 들어가 10시만 되면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잠든다. 미국에서 국제경영(MBA)을 전공한 엘리트가 왜 동네 정육점에서 고기를 팔고 있을까.    

1939년에 문을 연 곰탕집 ‘하동관’, 1946년에 개업한 ‘우래옥’ 등 장안의 유명 식당과 50년 넘게 대를 이어가며 거래하고 있는 곳이 팔판정육점이다.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골목에 자리 잡은 이곳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정육점이다. 하지만 팔판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서울 시내 유명 식당과 호텔 등에 고기 공급을 도맡아온 축산업계의 큰손이다. 가게 뒤편에는 한우만 240마리 정도가 들어가는 대형 창고 건물이 있다.

창업주인 이영근씨가 대대로 살던 팔판동에 정육점을 연 것은 한국전쟁 직후. 2대인 이경수 사장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대구 내당동에 피난 갔다가 돌아온 직후 아버지가 동대문에 과일가게, 팔판동에 정육점을 열었다”고 기억했다. 팔판정육점은 이영근씨의 셋째 아들인 이경수씨가 1974년 가게를 ‘인수’해 영업해오다 2011년 7월부터 그의 둘째 아들인 이준용씨가 합류해 3대를 이어오고 있다. 팔판은 동네 정육점인 만큼 소매도 한다. 같은 골목에 있는 총리공관 사람들도 손님이고, 근처 성북동이나 평창동에 사는 재벌 회장, 삼청동 노인정도 단골이다. 김황식 총리가 퇴임하기 열흘 전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갑자기 내려 “그동안 맛있는 고기를 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의 생일이 12월14일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 집 부엌에 고기를 공급해서 알 수 있었던, 삼청동만의 풍경이다.

이경수 사장은 애초 이 직업을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 살림이 궁해 고기를 못 사 먹는 처지에도 푸줏간이라면 다시 한번 쳐다보는 게 20세기까지의 한국 사회 풍경이다. 이경수 사장의 부인은 미국으로 유학 간 큰 아들이 미국 버지니아 공대 교수로 재직 중이고, 경영학을 전공한 둘째 아들이 귀국한 후 대기업을 거쳐 교육회사 CEO가 된 것을 자랑    스러워했다. 그러다 갑자기 병석에 누운 남편이 아들 둘 중 하나에게 이 일을 맡기자고 해 6개월 동안 울었다고 한다.

3월19일 서울 삼청동길에 있는 팔판정육점 앞에 앉은 이준용 사장. ⓒ 시사저널 이종현
3대째 푸줏간…한자리에서 60년 넘게 영업

이준용씨는 “아버지가 병이 나신 뒤에 제의를 하셨다. 나이도 있으시고 이제 뒷일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신 것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아들은 선선히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미국에서 오래 교육받아서 그런지 일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 가업인 데다가 아버지가 좀 덜 고생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합류했다.”

이경수 사장은 아들에게 뒤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낚싯밥’을 던졌다. “대기업에서 받는 것보다 월급을 더 주겠다”고 제의한 것. 재미있는 점은 1대에서 2대로 사장이 바뀔 때도 부자지간이지만 매매를 했다는 것이다. 이경수 사장은 처가에서 돈을 빌려 가게를 인수했다. 부자지간일지라도 돈 계산만은 철저히 한 것이다. 그는 “물건 값은 100% 다 드리고 가게 값은 시세의 절반 정도를 드렸다. 부모나 처가가 부자라고 해도 나는 거지였다. 그 마음으로 30년을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1974년 가게를 인수한 뒤 명절도 없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명절 때는 매상이 더 좋으니 손을 놓을 수 없었다”는 그는 큰며느리를 얻고서야 명절 당일에는 가게 문을 닫았다.

재벌 회장들 수십 년 찾는 이유는 ‘신용’

창업주(이영근)는 아들(이경수)을 데리고 전국 우시장을 누비며 현장 실습을 시켰다. 82세까지 아들을 장에 데리고 다녔다. 좋은 물건이 나오면 다른 이는 손도 못 대게 할 정도로 값을 불러 반드시 가져왔다. 울릉도에서도 ‘대장’이라는 별명으로 이영근씨를 알 정도였다. 이경수 사장은 “강원도 소는 예전부터 콩깍지나 옥수수를 많이 먹여 육질이 좋았다. 충청도나 경기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고기 색깔이고 강원도산은 약간 흐리다. 전남이나 경남 바닷가에서 키운 소고기 색깔은 검붉은 편이다. 제주도는 더 검고. 예전에 제주도 고기는 너무 검어서 물에 담가서 색을 좀 빼고 진열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일소가 늙으면 잡아먹는 게 고작이던 우리 식문화에서 소고기를 일상으로 먹는 일은 없었다. 마블링을 ‘신성시’하는 풍속도 최근 일이다. 이경수 사장은 “1970년대에는 마블링에 신경을 안 썼다. 마장동 시대가 막을 내리고 가락동에 도매시장이 생기면서 마블링 얘기가 나왔다”고 전했다.

이경수 사장은 부친을 따라 전국 소시장을 20여 년간 돌았지만, 아들을 데리고 다니지는 않았다. “10년 전부터는 장에 안 간다. 수원장, 안성장, 안중장, 평택장 이런 데가 다 죽었다. 축산업자가, 좋은 것은 도매시장으로 보내고 안 좋은 것만 장에 내니까 서울 업자들이 한두 번 당하다가 시장을 외면했다.” 초음파 진단기로 소의 몸을 미리 스캔하고 마블링이 좋은 것을 걸러 내면서 생긴 현상이다.

3세 사장은 아직도 실습 중이다. 정육의 세계를 알기 위해 책으로 공부할 수 있는 것이면 다 했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그래서 그는 직접 칼을 잡고 해체 작업을 거들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얀 것은 지방이고 붉은 것은 살’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나 이 부위가 소의 어느 부위에 어떻게 매달려 있고 양이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썰어야 하는지를 터득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그는 소고기의 값과 소비 행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좀 있는 듯했다.

그는 10년 전쯤부터 등장한 특정 지역 이름을 붙인 소고기에 대해 “가락시장에서 400마리를 도축해도 암소 1++ 등급 고기는 고작 3마리 정도가 나온다. ‘XX한우’가 좋다고 하더라도 좋은 등급은 전체 사육량의 15%를 넘기기 힘들고, 거기 소를 모두 도축해도 서울의 하루 소비량이 안 된다. 그래도 시장에는 ‘XX한우 전문점’이 지천이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젊은 초보 사장이 보기에도 소비자들이 한우에 대해 잘못된 환상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이다. “암소 1++는 팔수록 밑지는 품목이다. 황소 한 마리를 팔면 암소 4마리를 판 이익이 남는다. 소비자들이 그걸 아나. TV에 한우 이야기 나오는 것을 보면 답답하다. 현실을 모른다. 암소 1++는 양심을 갖고 팔 수밖에 없다. 내가 최고를 팔아야 그 손님이 다른 손님을 데려온다. 아버지도 돈만 남기려고 하면 장사는 오래 못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경영 방식에는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다. 아버지의 기존 방식을 지키면서 말이다. 이를 테면 아버지가 챙기는 장부는 아버지 방식대로 장부에 자로 줄을 긋고 일일이 손으로 거래액을 기록하지만 가게를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신용카드 관련 거래장을 통일시키는 등 시대에 맞게 바꾸고 있다.

“얼마 전 휴일에 일곱 살 먹은 둘째 아들이 친구를 데려왔기에 고기를 구워줬는데 아이들이 저마다 아빠 자랑을 하더라. 아들이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를 판다’고 자랑하더라. 그게 너무 귀엽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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