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농구가 인생의 전부”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4.0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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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스타에서 우승 청부사로 변신한 전주원

우리은행 여자농구단에게는 2003~06년이 절정기였다. 통합 우승만 3번을 했다. 하지만 2006년 겨울리그 우승을 끝으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신한은행 여자농구단은 2007년 이후 내리 6연패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4년간 계속 꼴찌였다.

두 라이벌의 운명이 반전된 것은 2012~13시즌. 지난해 꼴찌였던 우리은행 여자농구단이 KDB 금융그룹 2012~13 여자프로농구 정규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정규 리그에서도 1등, 챔피언결정전에서도 1등. 1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11년과 2012년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은행 감독과 코치가 바뀐 것밖에 없다. 신한은행의 위성우 코치와 전주원 코치가 우리은행의 감독과 코치로 온 것이다. 이들은 팀을 옮기자마자 꼴찌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한국 여자농구의 간판선수에서 지도자로 변신한 전주원을 만났다. 전주원이 2011년 겨울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자 신한은행은 전주원의 등 번호 0번을 영구 결번할 만큼 전주원은 신한은행의 간판이었다. 그런 그가 2012년 4월 우리은행으로 가겠다고 나서자 신한은행에서 반대한 것은 당연했다.

전주원도 이 부분을 지금도 제일 미안해하고 있다. “신한은행에서 너무 잘해줬는데 나는 좀 더 깨우치길 원했다. 코치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옮겨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거기 있으면 몸도 마음도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깨워야 하는 시기라 팀을 옮겨서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처럼 좋은 성적을 냈느냐는 물음에 그는 운으로 돌렸다. “운이 좋은 것 같다. 운동 열심히 안 하는 선수가 어디 있나. 결과에 따라서 조명을 받느냐, 안 받느냐의 차이뿐이다. 위 감독이 워낙에 잘하셔서 결과가 좋았다.” 자신을 낮추는 자세가 대스타 출신답다.

사고가 계속 일어나면 조직이 술렁이기 마련이다. 우리은행이 그랬다. 성추행, 선수 폭행, 연이은 감독 경질. 그 문제에 대해 전주원은 이렇게 말했다. “안 좋은 일은 지나가버리면 그만이다. 문제는 선수 간의 단합이다. 술 마시고 놀 때의 단합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단합이 잘 돼야 진짜다. 서로 어울릴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한 팀이라는 마음이 든다. 시즌 중에 경기를 이기기 시작하니까 끈끈함도 생기더라.”

선수의 기량과 단합을 끌어내는 것은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위 감독과 그런 얘기를 했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훈련을 시키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내년에 무슨 말로 선수를 끌고 가나’라고. 다행히 이번에 결과가 좋았지만 우승보다는 선수 개개인이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는 동기 부여를 해줬다는 게 중요하다. 지난 몇 년간 선수들이 항상 못한다는 말을 들어왔는데 본인에게 그게 얼마나 힘들었겠나. 우승으로 자신감이 생겼으니까, 그게 좋다.”

ⓒ 시사저널 이종현
사람을 움직이는 건 자신감과 자존감

우리은행이 통합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사람의 응원과 땀이 숨어 있다. 그중에는 전주원의 어머니도 있다. 전주원의 어머니는 늘 딸을 응원했다. 농구를 시작할 때는 반대했지만, 선수가 된 뒤에는 온 정성을 기울였다. 농구를 위해 서울 선일초등학교로 전학시킨 것도 어머니였다. 이번 챔피언결정전 2차전 때는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떡과 식혜를 만들어 춘천까지 왔다. 그런 어머니가 경기를 보고 집에 돌아가서 주무시듯 그 다음 날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3차전 경기일은 어머니 돌아가신 다음 날. 전주원은 3차전에도 계속 코트에 섰다. “엄마도 그걸 바라셨을 것이다. 아직은 아무 생각이 안 난다”는 그는 영전에 챔피언 트로피를 바쳤다.

“내가 농구한 것을 후회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욕할 것이다. 내 인생은 농구에 다 바쳤다. 어릴 때는 그게 후회됐는데 지금 생각엔 ‘내가 그렇게 해서 이 자리에 있구나’라고 여겨져 감사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 많은 사람이 희생을 했고 “그들 덕분에 지금 내가 있다”고 말했다. 그를 위해 희생한 사람에는 부모님과 시어머니, 남편, 딸이 포함된다. “누구는 ‘인생의 전부가 농구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농구가 전부다. 확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가정과 농구 중 농구에 100을 투입하는데 잘해야 하지 않나.(웃음) 시어머니가 딸을 키워주고 남편이 합숙소로 들어가는 나를 이해해준다. 그래서 내가 살 수 있다.”

‘농구에 100을 투입한다’고 말하지만 그도 엄마이고 아내다. “얼마 전에 딸과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면서 펑펑 울었다. 사실 남편과 딸이 먼저 봤다. 딸이 두 번째는 엄마를 위해서 다시 봐준 것이다. 엄마가 반 친구들도 알아보는 선수로 뛰다가 코치를 한다고 하니까 ‘선수 하면 안 돼?’라고 하다가 요즘은 ‘엄마가 덜 힘들면 코치도 괜찮은 것 같아’라고 말해준다. 애가 철이 너무 빨리 든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자 선수가 결혼 뒤에 운동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적극 환영했다. 이번에 MVP를 수상한 우리은행의 30대 임영희 선수도 기혼이다. “영희는 남편이 복덩이다. 결혼하면서 기량이 확 늘었다. 그래서 나이 든 선수에게는 결혼을 권한다. 물론 합숙을 이해해주는 남편을 만나야 한다. 우리 남편은 ‘운동선수를 사귀는 배우자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33세에 출산을 경험한 그는 “30대 초반에 출산하면 운동선수로 복귀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며 마흔 살까지 뛴 자신을 예로 들었다.

내 삶의 열쇠는 긍정적인 자세

인터뷰에 임하는 전주원의 모습은 선수 시절보다 더 날렵해 보였다. 당장 코트로 복귀해도 될 듯싶었다. “더 뛸 수도 있었는데, 좋은 모습일 때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 은퇴했다”는 그는 프로필에는 176cm-67kg으로 나와 있지만 은퇴 이후 64kg 정도로 날씬해졌다. 말은 “선수 때는 뛰어야 하니까 먹기 싫어도 억지로 먹으며 유지해야 했다. “이제는 운동량이 줄어드니까 근육이 좀 빠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기 관리에 엄격한 듯했다.

태릉선수촌의 쥐띠 모임 중에서 그가 현역에 가장 오래 있었다. 실업 무대에 데뷔한 이후 대표팀에서 빠진 것은 부상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사실상 슬럼프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에게는 어려운 일, 스트레스가 없었을까. “사람들은 잘한 것만 기억하는데 나도 어려웠던 시기가 많았다. 무릎 수술만 4번을 받았고 무릎 연골이 없다. 몸무게가 1kg 늘어날 때 무릎이 받는 하중이 4kg 늘어난다고 한다. 종아리 운동과 근력 운동으로 계속 재활을 해야 무리 없이 생활할 수 있다.” 부상 위협도 그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그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비결에 대해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장점만 보려고 한다. 나쁜 것을 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나쁜 와중에도 제일 좋은 것을 하나 찾아서 ‘이걸 이렇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전했다.

당대 최고의 선수였고, 코치로 우승까지 했으니 때가 되면 감독이 되는 것 아닐까. 더구나 스포츠 세계에서는 여성 감독이 귀하다. “감독이고 코치고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즐겁게 농구를 가르칠 수 있으면 된다. 감독은 여러 가지를 잘해야 하는 직책이다. ‘농구만 가르쳐라’ 그러면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이란 직책이 아직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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