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떼 가득한 평양 하늘에 비둘기 날다
  • 이영종│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3.04.0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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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파 박봉주 화려한 부활…장성택 등 ‘온건파’에 힘 실리는 듯

한때 그는 북한 권력에서 가장 잘나가는 관료였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노동당과 군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모든 문제는 박봉주와 상의하라”고 지시한 것이 계기가 됐다. 김정일이 이런 식으로 특정인에게 최고의 힘을 실어주는 언급을 한 이는 박봉주와 군부 실세 김격식(현 인민무력부장)뿐이다. 김격식에 대해서는 “나와 김격식 동지는 격식이 없는 사이”라고 말한 게 우리 대북첩보망에 포착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정일의 두터운 신임으로 2003년 9월 내각 총리에 오른 박봉주는 4년 가까이 승승장구했다. 앞서 2002년 10월에는 북한 경제시찰단에 포함돼 한국에 왔다.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당시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함께 온 그는 서울의 발전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갔다. 당시 상황에 밝은 정부 당국자는 “박봉주 일행은 ‘눈이 두 개라 남한에서 본 걸 다 못 담아 간다’며 상당한 충격을 받았음을 우회적으로 밝힌 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그해 7월에는 임금 현실화와 배급제·공급망 개선 등을 담은 7·1 경제 관리 개선 조치 추진에도 관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가 개방파 경제 관료로 분류되는 것도 이런 행보 때문이다.

지난해 7월3일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장성택(맨 오른쪽)·박봉주(오른쪽 두 번째)와 함께 개점을 앞둔 아동백화점을 찾아 진열된 상품을 점검하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군부 강경파 견제 대상이었던 박봉주

그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대 같은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다. 출신 성분도 두드러지게 파악된 적이 없다. 덕천공업대학을 나와 기계제작기사 자격증을 받은 경제 관료다.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당 책임비서 등을 거쳐 화학공업상(장관)에 올랐다.

박봉주 총리는 북한 군부 강경파의 견제 대상이었다. 그는 고층아파트와 건물의 엘리베이터 정상 운행을 지시했다. 전기를 아낀다며 가동을 중단해 주민 불편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부 강경파가 “군대에 보낼 전기도 없는데 반혁명적 망동을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건설 자재나 공업 원료를 친분이 있는 공장과 기업소 지배인에게 우선 배정해주고 있다는 음해 투서가 잇따랐다. 김정일도 결국 그를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던 그는, 김정은 후계 체제가 본격화한 2010년 8월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복권됐다. 지난해 4월에는 장관급인 경공업부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지난 4월1일 열린 최고인민회의(국회)에서 다시 총리로 컴백했다.

‘총리 박봉주’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선택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수산·화학공업·원유공업·국가자원개발 등 경제 부처를 중심으로 10여 명의 장관급 인사도 교체했다. 특히 지난해 10월 농업상에 임명된 황민을 반 년 만에 해임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번엔 농업상 자리를 부총리급 부서로 격상시켰다. 자신의 뜻대로 경제 문제, 특히 농업 부문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을 이번의 대폭 물갈이 인사로 표출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먹는 문제 해결에 매달리겠다는 뜻도 드러난다.

박봉주 총리 임용을 놓고 북한 개혁·개방파에 힘이 실리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핵과 미사일 카드를 앞세운 대남·대미 도발 위협을 파상적으로 벌여나가면서도 김정은이 경제 챙기기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반도 긴장 국면 이후의 출구 전략으로 경제 문제를 잡았고, 이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경제 관료로 짜인 내각 인사를 단행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를 잡지 않고는 권력 안정을 이룰 수 없다는 절박감이 드러난다는 관측도 있다.

3월6일 북한 군부 강경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영철 군 정찰총국장이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겠다고 위협했다. ⓒ 조선중앙통신
장성택·김경희 부부가 박봉주 천거한 듯

김정은은 지난해 4월 첫 공개 연설에서 “인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3월31일 김정은이 노동당 전원회의 연설에서 “경제 문제와 핵 개발을 병진하는 노선을 채택했다”고 선언했지만, 경제가 나아지리라는 전망은 불투명하다. 유독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자신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김정은의 모습 때문이다.

이는 후계자 시절인 2009년 11월 말 화폐 개혁을 주도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실패한 트라우마 때문이란 게 정부 당국과 북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당시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을 희생양 삼아 총살하는 극약 처방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김정은으로서는 아픈 추억일 수 있다.

박봉주의 컴백과 관련해 주목받는 인물은 김정은의 고모와 고모부인 김경희 노동당 비서와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다. 김정일 시대 사람인 박봉주를 천거한 사람이 이들 부부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박봉주가 지난해 4월 김정은 체제 공식 출범 때 노동당 경공업부장에 임명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공업부는 김경희가 오랜 기간 맡아온 자리라는 측면에서다.

이들 부부는 김정은 권력의 핵심 후견인이다. 권력 기반이 취약하고 리더십을 아직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29세의 김정은이 상당 부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정보 당국은 장성택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최고인민회의 개최에 앞서 한·미 정보 당국은 장성택의 총리 기용을 점치기도 했다.

장성택을 만나본 정부 당국자나 북한 전문가들은 그가 개혁·개방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본다. 소련 유학을 했고, 빈번한 외유를 통해 서구 문물에 대해 밝은 편이기 때문이다.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으로 남한에 왔을 때는 시가 100만원이 넘는 발렌타인 30년산 양주로 폭탄주를 만들어 먹는 등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실세로서의 면모도 드러냈다. 장성택의 폭음 때문에 이튿날 출발 일정이 늦어져도 북측 인사 누구도 장성택을 깨울 생각을 못 했다는 전언이다. 당국자는 “장성택이 뒤늦게 문을 열고 나서면 70대 장관급 노간부들이 벽에 찰싹 달라붙어 길을 내줄 정도로 기세등등했다”고 귀띔했다. 삼성전자를 방문했을 땐 장성택이 김치냉장고에 관심을 보이자 정부가 판문점을 통해 시찰단 참가자에게 각각 한 대씩 선물로 보내줬다는 후문이다.

장성택이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정은 체제가 개혁·개방으로 가도록 물꼬를 트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최근 김정은과 군부가 주도하는 대외적인 초강경 대립 국면에서 장성택의 모습이 일절 드러나지 않는 데서도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장성택이 군부 강경파의 반발에 부딪혀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고 점친다. 농업 개혁이나 외자 유치 등이 불발에 그치고 식량난 때문에 김정은 체제에 대한 주민 불만이 폭발할 경우 ‘장성택 숙청’이라는 극단적 카드로 수습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다. 김정일도 생전에 후계 수업을 하면서 고모부 장성택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메시지를 아들에게 분명하게 남겼을 것이라는 얘기다.

개방파로 간주되는 박봉주를 주축으로 한 경제 관료의 약진과 장성택·김경희 부부의 보이지 않는 후견 손길 그리고 이에 맞서는 군부 주도의 강경파 목소리가 불협화음을 낼 경우 김정은 권력은 소용돌이칠 수 있다. 아버지 김정일이 뽑아들었던 ‘총리 박봉주’ 카드를 10년 만에 다시 빼든 김정은의 선택이 주목받고 있고, 그 결과에 따라 격동에 휩싸인 한반도의 운명도 좌우될 전망이다. 


4월3일 북한이 개성공단 출경을 불허해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출경을 기다리던 개성공단 차량이 되돌아가고 있다. ⓒ 연합뉴스
이 때문에 개성공단 문을 닫는 문제를 둘러싸고 북한 권력 내부에서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개성공단이 강·온파 사이 갈등의 핵으로 처음 등장한 건 2000년 6월이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개성을 내주겠다. 군인들을 제대시켜 공업지구에 30만명의 노동력을 대주겠다”고 말했다. 해주 대신 개성을 남북 경협공단으로 지정한 것이다. 이후 공단 조성 사업은 탄력을 받았다. 이 지역에 주둔하던 북한군 부대는 모두 개성공단 부지 조성 사업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전략 요충지를 남쪽에 내주고 어쩌자는 말이냐”는 볼멘소리도 나왔지만 절대 권력자의 한마디에 묻혀버렸다.

1998년 11월 시작된 금강산 관광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부는 군사 작전상의 문제를 들어 금강산 관광은 물론 장전항 개방에 반기를 들었다. 관광선의 정박을 위해 군항인 장전만을 내줘야 하고, 군사 요새로 여기는 금강산에까지 남한 관광객이 드나드는 상황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요구였다.

그해 6월 이뤄진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 떼 방북 때도 북한 군부는 반대했다. 소 떼를 실은 남한 트럭이 줄지어 판문점을 넘어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우리 군부가 어떻게 지킨 분계선(휴전선)인데 남조선의 재벌 영감탱이가 소를 끌고 넘어가게 하느냐”는 얘기까지 나왔다는 것이 정부 당국자의 전언이다.

그렇지만 김정일은 현대와의 대규모 경협 프로젝트로 달러벌이라는 실리를 챙기자는 김용순 노동당 통전부장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군부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소 떼 방북과 금강산 개방은 안 된다고 김정일을 압박해 답을 얻어냈지만, 김용순이 직접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번복시켰다는 얘기도 있다. 북한 대남 사업 종사자들 사이에 ‘용순 아바이’로 불리던 김용순의 이런 무용담과 군부와의 갈등 스토리는 북측이 남한 당국자들에게 귀띔하면서 알려졌다.

북한의 이번 개성공단 폐쇄 위협 강도는 전례 없이 높다. 공단 관리를 담당하는 북한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은 3월30일 담화를 통해 “우리의 존엄(김정은 지칭)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려 든다면 공업지구를 가차 없이 차단, 폐쇄해버리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연간 800억원이 넘는 달러 수입이 고스란히 김정은 주머니로 흘러들어간다는 남한 언론의 지적에 불쾌감을 표시한 것이다. 개성공단은 북한 권력 내부 갈등의 향배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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