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라는 뜻의 고사성어다. 꼼꼼히 새겨 보면 말로는 쉽지만 실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선 꽤나 복잡한 고차 방정식이 필요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 문재인 민주당 의원과 서울 노원병 보궐 선거에 나선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 고사성어를 쓰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 의원과 안 후보는 누가 뭐래도 앞으로 야권을 이끌어갈 지도자급 정치인들이다. 문 의원은 127석을 가진 제1 야당의 울타리 안에 있는 반면, 안 후보는 ‘새 정치’를 명분으로 기존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두 사람은 본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모두 2017년 차기 대권의 유력 주자로 거론된다. 이 때문에 신율 명지대 교수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출발선 자체만 놓고 보면 어떤 식으로든 긴장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 의원은 기존 정치권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새 정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한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뒤 ‘안철수 효과’의 최대 수혜자라는 얘기가 나왔던 건 이 때문이다. 안 후보 역시 기존 정치권과 협력적 유대 관계를 맺고자 할 때 그 통로로서 문 의원만 한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 지난해 대선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 대해 실망한 지지층이 많았던 것은 그만큼 두 사람이 만들어낼 시너지 효과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안 후보가 4·24 재보선에 전격 출마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일단 외견상으로는 문 의원이 다가가려 하는 반면, 안 후보는 다소 주저하는 모습이다. 서울 노원병 출마 과정을 두고 야권 내에서 비판론이 나오자 문 의원은 “잘한 결정”이라고 안 후보를 편들었다. 민주당이 공천 여부로 고민할 때도 무공천에 힘을 실었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선거운동 지원에 나설 생각이 있음도 내비쳤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측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한 측근은 공개적으로 “민주당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문 의원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문재인 의원의 지원 의사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일 것이란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출마 과정에 대한 논란이나 민주당의 무공천 과정에서 문 의원이 도움을 줬던 것에 대해서도 의례적인 인사치레조차 없었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문 의원이 마음이 착해서 그렇지 참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라고 안 후보측을 비난했다.
야권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빚’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대표적인 친문(親文) 의원으로 알려진 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대선 당시 안 후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등을 두고 격렬한 논쟁 끝에 노원병 무공천을 결정한 것”이라며 “안 후보의 당선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후보에 대한 문 의원의 호의적인 태도를 “빚을 갚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안 후보측 핵심 관계자는 “문 의원이 대선 과정에서 안 후보에게 진 빚을 이번 재보선에서 얼렁뚱땅 털고 가려는 건 오산”이라고 말했다.
양측이 이처럼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친노 진영의 김태년 의원은 “대선 때 실제로 문 의원이 빚을 졌는지와는 무관하게 어쨌든 안 후보가 중도에 사퇴하면서 자연스럽게 후보 단일화가 이뤄졌고, 이로 인해 많은 국민이 ‘문 의원이 안 후보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며 “우리로선 어떤 식으로든 그 부분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친노·주류 진영의 핵심 인사들은 문 의원이 안 후보에게 “빚진 게 없다”는 생각이 강하다. 지난해 대선 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안 후보가 전격 사퇴한 뒤 제대로 돕지 않았다는 불신이 큰 것이다. 최근 두 사람 간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안 후보가 민주당에 입당 의사를 밝혔느니, 안 후보가 ‘차기 대통령은 안철수’임을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다느니 하는 주장을 두고 문 의원측과 안 후보측이 감정싸움을 벌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대방에 불신을 갖기는 안 후보측도 마찬가지다. 안 후보의 정책 분야 조언가인 한 교수는 “안 후보가 대선 후보직을 사퇴할 당시를 전후해 민주당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공세를 폈는지 아느냐”며 “그 과정을 공개하면 문 의원이나 주변 사람들은 얼굴 들고 다니기 어려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후보의 노원병 보궐 선거 캠프에 합류한 한 측근은 “우리가 문 의원에게 받아야 할 빚은 보궐 선거 때 얼굴 한두 번 내비치거나 지원 유세 한두 번 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노원병 선거는 자력으로 이겨낸 뒤 정말 긴요할 때 활용하겠다는 얘기다.
이러한 양측의 관계에 대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5년 후 차기 대선을 내다보면 긴장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다만 두 사람의 관계가 생산적인 방향으로 가서 ‘윈윈’하는 결과를 낳으려면 무엇보다 문 의원과 안 후보의 정치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어차피 2017년 대선까지는 양측이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지만 그때까지 양측 모두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문 의원이나 안 후보 모두 주변에서 조성되는 갈등 관계를 조정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다.
민주당 한 핵심 당직자의 생각도 비슷했다. 주류와 비주류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이 당직자는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나 새누리당의 과반 의석이 무너지지 않는 한 문 의원과 안 후보가 협력적 긴장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야권의 정치적 입지는 지속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문 의원과 안 후보는, 야당 지도자 시절 끊임없이 협력하고 견제하며 결국은 함께 커나갔던 김대중·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을 모델로 삼아 본인들의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두 남자 사이에 낀 박원순 박 시장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문 의원과 안 후보 사이에서 실질적인 가교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 박 시장과 문 의원은 인권변호사 시절부터 친분이 남달랐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박 시장이 주도했던 아름다운재단 활동 등에 문 의원이 적잖은 도움을 줬다. 박 시장과 안 후보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 때 ‘아름다운 단일화’를 이뤄냈고, 이번 노원병 출마 전에도 안 후보는 박 시장에게 직접 전화를 했을 만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비상대책위원은 “안 후보가 국회에 입성한 뒤 민주당이 급격히 흔들린다 싶으면 문 의원보다는 박 시장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며 “문 의원은 적어도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전면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 세 사람 모두가 서로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박 시장과 가까운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시기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박 시장도 대선에 대한 꿈을 갖고 있지 않겠느냐”며 “박 시장이 대권을 본격적으로 생각하는 순간 문 의원과 안 후보 모두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겉으로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앞으로 야권의 권력 지도는 문재인·안철수·박원순의 삼정립 구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