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갚겠다는데 안 받겠다는 묘한 사이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3.04.09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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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앙금 남은 문재인과 안철수의 신경전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라는 뜻의 고사성어다. 꼼꼼히 새겨 보면 말로는 쉽지만 실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선 꽤나 복잡한 고차 방정식이 필요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 문재인 민주당 의원과 서울 노원병 보궐 선거에 나선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 고사성어를 쓰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 의원과 안 후보는 누가 뭐래도 앞으로 야권을 이끌어갈 지도자급 정치인들이다. 문 의원은 127석을 가진 제1 야당의 울타리 안에 있는 반면, 안 후보는 ‘새 정치’를 명분으로 기존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두 사람은 본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모두 2017년 차기 대권의 유력 주자로 거론된다. 이 때문에 신율 명지대 교수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출발선 자체만 놓고 보면 어떤 식으로든 긴장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 의원은 기존 정치권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새 정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한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뒤 ‘안철수 효과’의 최대 수혜자라는 얘기가 나왔던 건 이 때문이다. 안 후보 역시 기존 정치권과 협력적 유대 관계를 맺고자 할 때 그 통로로서 문 의원만 한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 지난해 대선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 대해 실망한 지지층이 많았던 것은 그만큼 두 사람이 만들어낼 시너지 효과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안 후보가 4·24 재보선에 전격 출마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일단 외견상으로는 문 의원이 다가가려 하는 반면, 안 후보는 다소 주저하는 모습이다. 서울 노원병 출마 과정을 두고 야권 내에서 비판론이 나오자 문 의원은 “잘한 결정”이라고 안 후보를 편들었다. 민주당이 공천 여부로 고민할 때도 무공천에 힘을 실었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선거운동 지원에 나설 생각이 있음도 내비쳤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측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한 측근은 공개적으로 “민주당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문 의원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문재인 의원의 지원 의사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일 것이란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출마 과정에 대한 논란이나 민주당의 무공천 과정에서 문 의원이 도움을 줬던 것에 대해서도 의례적인 인사치레조차 없었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문 의원이 마음이 착해서 그렇지 참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라고 안 후보측을 비난했다.

야권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빚’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대표적인 친문(親文) 의원으로 알려진 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대선 당시 안 후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등을 두고 격렬한 논쟁 끝에 노원병 무공천을 결정한 것”이라며 “안 후보의 당선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후보에 대한 문 의원의 호의적인 태도를 “빚을 갚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안 후보측 핵심 관계자는 “문 의원이 대선 과정에서 안 후보에게 진 빚을 이번 재보선에서 얼렁뚱땅 털고 가려는 건 오산”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18일 저녁 민주당 문재인 후보(오른쪽)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 관련 회동을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YS와 DJ처럼 협력하고 견제해야”

양측이 이처럼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친노 진영의 김태년 의원은 “대선 때 실제로 문 의원이 빚을 졌는지와는 무관하게 어쨌든 안 후보가 중도에 사퇴하면서 자연스럽게 후보 단일화가 이뤄졌고, 이로 인해 많은 국민이 ‘문 의원이 안 후보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며 “우리로선 어떤 식으로든 그 부분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친노·주류 진영의 핵심 인사들은 문 의원이 안 후보에게 “빚진 게 없다”는 생각이 강하다. 지난해 대선 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안 후보가 전격 사퇴한 뒤 제대로 돕지 않았다는 불신이 큰 것이다. 최근 두 사람 간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안 후보가 민주당에 입당 의사를 밝혔느니, 안 후보가 ‘차기 대통령은 안철수’임을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다느니 하는 주장을 두고 문 의원측과 안 후보측이 감정싸움을 벌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대방에 불신을 갖기는 안 후보측도 마찬가지다. 안 후보의 정책 분야 조언가인 한 교수는 “안 후보가 대선 후보직을 사퇴할 당시를 전후해 민주당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공세를 폈는지 아느냐”며 “그 과정을 공개하면 문 의원이나 주변 사람들은 얼굴 들고 다니기 어려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후보의 노원병 보궐 선거 캠프에 합류한 한 측근은 “우리가 문 의원에게 받아야 할 빚은 보궐 선거 때 얼굴 한두 번 내비치거나 지원 유세 한두 번 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노원병 선거는 자력으로 이겨낸 뒤 정말 긴요할 때 활용하겠다는 얘기다.

이러한 양측의 관계에 대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5년 후 차기 대선을 내다보면 긴장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다만 두 사람의 관계가 생산적인 방향으로 가서 ‘윈윈’하는 결과를 낳으려면 무엇보다 문 의원과 안 후보의 정치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어차피 2017년 대선까지는 양측이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지만 그때까지 양측 모두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문 의원이나 안 후보 모두 주변에서 조성되는 갈등 관계를 조정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다.

민주당 한 핵심 당직자의 생각도 비슷했다. 주류와 비주류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이 당직자는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나 새누리당의 과반 의석이 무너지지 않는 한 문 의원과 안 후보가 협력적 긴장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야권의 정치적 입지는 지속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문 의원과 안 후보는, 야당 지도자 시절 끊임없이 협력하고 견제하며 결국은 함께 커나갔던 김대중·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을 모델로 삼아 본인들의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두 남자 사이에 낀 박원순  

정치권 내에서는 야권 인사 가운데 문재인 민주당 의원과 안철수 서울 노원병 보궐 선거 무소속 후보와 함께 박원순 서울시장을 주목하는 이들이 많다. 현직 서울시장이면서 내년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할 경우 차기 대권에 가장 근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미 박 시장 측근들은 재선을 목표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 시장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문 의원과 안 후보 사이에서 실질적인 가교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 박 시장과 문 의원은 인권변호사 시절부터 친분이 남달랐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박 시장이 주도했던 아름다운재단 활동 등에 문 의원이 적잖은 도움을 줬다. 박 시장과 안 후보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 때 ‘아름다운 단일화’를 이뤄냈고, 이번 노원병 출마 전에도 안 후보는 박 시장에게 직접 전화를 했을 만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비상대책위원은 “안 후보가 국회에 입성한 뒤 민주당이 급격히 흔들린다 싶으면 문 의원보다는 박 시장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며 “문 의원은 적어도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전면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 세 사람 모두가 서로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박 시장과 가까운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시기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박 시장도 대선에 대한 꿈을 갖고 있지 않겠느냐”며 “박 시장이 대권을 본격적으로 생각하는 순간 문 의원과 안 후보 모두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겉으로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앞으로 야권의 권력 지도는 문재인·안철수·박원순의 삼정립 구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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