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싸지 않으면 강제로 끌어낸다
  • 이승욱·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3.04.0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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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맨’ 비리 의혹 담은 문건 쏟아져… 공공기관 대대적 ‘물갈이’ 예고

18대 대선을 눈앞에 둔 지난해 12월 초, 일부 공공기관 수장(首長)들이 정치권 언저리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정황이 여의도 정가 곳곳에서 포착됐다. 대선이라는 민감한 시기에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공공기관장들의 행보는 구설을 사기에 딱 좋았다. 기자가 정치권과 업계 관계자 등을 통해 접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공기업 ㄱ사의 ㄴ사장을 둘러싼 얘기였다.

ㄴ사장은 고위 공직자 출신으로, 이명박(MB) 정부 시절 임명된 ‘MB 낙하산’ 인사였다. ㄱ사는 국내 대표적인 공기업이다. 그런데 대선 당시 일각에서 ㄴ사장이 여당이 아닌 야당 중진인 ㄷ의원을 통해 정치권과 자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여권 인사로 분류된 그가 대선을 앞두고 야당에 줄을 섰다는 말이 나돈 것이다.

하지만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자 ㄴ사장을 둘러싸고 또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그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사들과 선을 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ㄴ사장이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인수위 고위 관계자와 만나려고 했다는 좀 더 구체적인 정보도 뒤따랐다. 업계 관계자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 옛 정부의 낙하산 인사를 물갈이하는 게 수순이다. ‘MB맨’으로 낙인찍힌 ㄴ사장이 정권 교체 후에도 살아남기 위해 보험용으로 여야를 넘나들며 로비를 했다”고 말했다.

ⓒ 시사저널 사진자료
공공기관 경영 평가는 요식 행위?

5년 전인 MB 정부 초기 시절, ‘민주 정부 10년 지우기’가 정국을 강타했다. 5년 만에 새 정부가 출범한 지금, 다시 박근혜 정부의 ‘MB 지우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지난 정부의 낙하산 인사들이 포진한 공공기관이 주요 타깃이다. 표면적으로는 경영 평가를 내세우고 있지만 공공기관장의 비리·비위를 찾기 위해 사정기관이 총동원되는 등 전 방위 압박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특히 <시사저널>은 소위 MB맨으로 분류되는 코스콤과 코레일, 그리고 민영화됐지만 공기업 성격이 짙은 KT&G 등의 수장이 연루된 비리 의혹 문건들을 잇달아 입수했다. 이들 문건들은 지난해 대선을 전후로 정치권·업계, 사정기관을 통해 입수한 것으로, MB의 낙하산 인사들을 사퇴시키기 위한 압박용으로 추정된다.

기획재정부가 운영하는 공공기관 정보 사이트인 ‘알리오’에 따르면 공기업·준정부기관·기타공공기관 등 공공기관은 295곳에 달한다. 이들 공공기관 인사는 청와대와 정부 부처 등이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들 공공기관은 대부분 별도의 추천위원회를 두고 공모 절차를 진행하지만 관행상 대통령과 부처 장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대선 후 신·구 정권 교체기가 되면 으레 공공기관 물갈이와 낙하산 인사 논란이 되풀이되는 이유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도 공공기관 물갈이는 예고된 수순이었다. 이미 기획재정부는 지난 3월27일 111개 공공기관과 지난해 말 기준 6개월 이상 재직한 기관장 100명, 상임감사 58명 등을 대상으로 공공기관 경영 실적 평가에 들어갔다. 하지만 경영 실적 평가는 요식 행위일 뿐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앞서 소개한 공기업 ㄴ사장의 우려처럼 박근혜 정부의 공공기관 물갈이는 사실상 전 정권의 낙하산인 MB맨들 정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 박 대통령은 지난 3월11월 첫 국무회의에서 공공기관장 인선과 관련해 “부처 산하 기관과 공공기관 인사가 앞으로 많을 텐데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인물로 임명하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실상 과거 정부에서 논공행상식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공공기관장을 퇴진시키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에 따라 올해 공공기관장 임기가 종료되는 50곳과 ‘낙하산 인사의 꽃’으로 불리는 상임감사 자리 등을 포함하면 새 정부 들어 물갈이될 공공기관은 100여 곳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 입수한 공공기관장의 비리 의혹이 담긴 문건들. ⓒ 시사저널 최준필
사장 비난 괴문서 도는 공공기관들,  “음해” 일축 

청와대와 해당 부처의 압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공기관의 MB 지우기 움직임은 기관 내부에서부터 불거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MB 낙하산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반대파와 노조 등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공공기관 주변에서 MB맨을 공격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괴문서들이 유포되고 있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코스콤 새로운 사장 즉시 선임’이라는 제목의 A4용지 4장짜리 문건에는 공공기관인 코스콤의 우주하 사장 교체를 주장하는 글이 빼곡히 담겨 있다. 해당 문서에서 우 사장 교체를 주장하는 측은 ‘MB 정권에서 임명된 비전문 관료 낙하산 인사인 코스콤 우주하 사장은 독단 경영, 청렴 위반 의혹, 각종 소송을 통한 부당징계, 부당해고 등 노동 탄압을 자행해 국가 및 조직 발전은 물론 노사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 코스콤과 신정부 정책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전문성·능력 있는 새로운 사장 즉시 선임과 낙하산 사장 조기 퇴진으로, 정부가 받고 있는 낙하산 인사 오명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코스콤 관계자는 “해당 문건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내용으로 확인을 해봐야할 것 같다”며 “현재 조직 내부 분위기는 별 동요없이 평소와 똑같다”고 전했다.

공공기관의 사업 추진 과정에서 빚어진 난맥상이 MB맨들의 발목을 잡는 사례도 있다. 임기가 오는 2015년까지인 정창영 코레일 사장은 벌써부터 용퇴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 부도 사태에 대한 정 사장의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 사장은 용산 개발을 두고 민간 사업자들과 ‘치킨 게임’을 하다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용산개발사업 부도 사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서부이촌동 주민들은 3월21일 “정창영 사장을 탄핵해야 한다”며 정 사장 해임 탄원서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그동안 KTX 경쟁 체제 도입 등 각종 현안마다 해당 부처인 국토부와 갈등을 빚은 모습도 정 사장의 거취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코스콤의 경우처럼 정 사장을 비난하는 출처 불명의 문건들이 나돌고, 그 가운데 일부는 인수위로 전달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 사장 역시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본지 3월13일자 ‘용산 드림허브 열차 탈선 위기’ 기사 참조).

하지만 코레일 관계자는 정 사장의 거취 문제와 관련해 “공기업이 책임 경영을 다한다는 차원에서 그동안 용산 개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면서 “해임 탄원서는 청와대에 제출된 만큼 청와대가 판단할 문제이지 더 이상 언급할 게 없다”고 말했다. 또 이 관계자는 “정권 교체기를 틈타서 정 사장을 음해하는 세력이 괴문건을 돌리고 있지만, 사실무근인 것으로 결론이 난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왼쪽부터)김건호 수자원공사 사장. 이지송 LH 사장 ⓒ 시사저널 최준필. 장석효 도로공사 사장 ⓒ 연합뉴스
“공기업 비리 찾아라” 촉수 세우는 사정기관

박근혜 정부의 공공기관 내 MB 지우기가 본격화되면서 일찌감치 ‘알아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김건호 수자원공사(수공) 사장은 지난 3월12일 사표를 제출했다. 김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을 도맡는 등 남다른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취재 결과 김 사장의 사퇴 결정은 일찌감치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수공 관계자는 “김 사장은 박 대통령의 취임식 직후 사표를 제출하려고 했다”면서 “하지만 자기를 임명한 전 정부의 권도엽 장관에게 사표를 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새로운 장관이 온 후 사의 표명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사장은 서승환 국토교통부장관이 임명된 지 하루 만에 사표를 냈다. 국토부 산하 공기업 중 한 곳이자 MB 낙하산 논란을 낳았던 LH의 이지송 사장도 오는 9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일찌감치 사의를 표명하면서 사퇴 도미노에 가세했다.

반면 MB맨이라는 이유만으로 새 정부의 물갈이 대상으로 찍히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기관들도 있다. 서울시 행정2부시장 출신인 장석효 한국도로공사(도공) 사장은 이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청계천복원추진본부장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MB맨이라는 점에서 물갈이 후보로 거론된다. 장 사장은 취임 이후인 2011년 기관장 경영 평가에서 A등급을 받았다. 임기도 1년 이상 남은 상태다. 이에 따라 도공 내부에서는 장 사장이 물갈이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도공 관계자는 “조직 내부에서는 장 사장의 거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금기시되는 분위기”라면서도 “사장이 그동안 경영을 못했다면 모를까, 잘하고 있는 사람을 MB 측근이라는 둥 물갈이 대상이라는 둥 자꾸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MB 정부의 공공기관장들이 현 정부의 사퇴 압박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 정부의 사정 칼바람이 점차 목줄을 조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낙하산 인사들이 검찰·경찰·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 등 사정기관의 집중적인 모니터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도 새 정부의 최근 기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공공기관장 물갈이가 예고된 상황에서 상부에서도 공공기관장과 관련한 정보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국세청·검찰·경찰 달라붙은 KT&G 

민영화되긴 했지만 공기업 성격이 강한 KT&G의 민영진 사장을 둘러싸고 사정기관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KT&G는 지난 2002년 민영화됐지만 여전히 직간접으로 권력 입김이 미치는 곳이다. 경북 문경 출신인 민 사장은 2010년 KT&G 사장으로 선임된 후 전 정권 실세와의 친분이 논란을 불러왔다. 민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촌 처남인 김재홍 KT&G복지재단 전 이사장과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등 MB 최측근들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배경 탓에 민 사장은 현재 MB 최측근들이 연루된 특혜성 시비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 있다. <시사저널>은 지난 1월 KT&G 민영진 사장과 관련해 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A4용지 20여 장 분량의 문건을 입수했다. ‘KT&G 사장 민영진’이라는 제목의 이 문건에는 납품·비자금 비리와 권력 실세의 공모 절차 개입, 경영 실패 등 각종 의혹이 담겨 있다. 본지가 이 문건을 토대로 취재를 진행하던 지난 3월6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KT&G 사옥과 대전 평촌동 본사 사무실 등에 조사요원 100여 명을 투입해 특별 세무조사를 벌였다. 앞선 2월5일 민주노총 계열인 KT&G 제2노조는 “민 사장이 부임한 이후 자회사를 통해 신생 광고사인 ‘상상애드윌’에 80억원 규모의 광고 대행을 맡겼다”며 “하지만 상상애드윌은 2011년 설립돼 실적이 전무하고 그 회사 대표는 김희중 전 청와대 부속실장과 처남·매형 사이”라고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노조는 “KT&G가 남대문시장 인근에 신축 예정인 호텔의 용역을 김 전 이사장과 친분이 있는 특정 업체에 수의 계약을 통해 맡겨 수십억 원의 특혜를 줬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노조가 의혹을 제기한 지 한 달 만에 세무 당국이 특별 세무조사에 나선 셈이다. 최근 검찰과 경찰도 경쟁적으로 민 사장의 업무상 배임 혐의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사정 당국의 ‘MB 지우기’ 작업이 본격화된 것이 아니냐는 시선을 받고 있다. 

하지만 KT&G 관계자는 “민 사장과 관련해 제기된 의혹은 이사회 내 감사위원회를 통해 확인한 결과 모두 허위 사실로 드러났다”면서 “세무조사도 통상적인 조사일 뿐 특혜성 시비와는 무관한 것이고 세무조사가 끝나면 모든 의혹이 명명백백히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KT&G 관계자들이 경찰 소환조사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달랐다”면서 “사장 선임은 공정하게 이뤄지고 있고, 신뢰받는 기업으로서 최선을 다해 투명한 경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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