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뭐 하러 갚나, 나라가 갚아줄 텐데”
  • 조재길│한국경제신문 기자 ()
  • 승인 2013.04.09 15:0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채 탕감해주고 연금 더 주고…정부가 모럴 해저드 조장

“수천만 원 빚이 있어도 절반으로 깎아준다고 하던데 왜 나만 안 된다는 겁니까.”

자산관리공사(캠코)가 대전에서 운영하고 있는 서민금융종합콜센터 ‘1397’에는 이런 전화가 하루에 수백 통씩 쏟아진다. 정부가 ‘국민행복기금’으로 빚을 대폭 탕감해주겠다고 발표한 뒤 일어난 일이다. 금융 당국이 “연체자 빚 탕감이 이번 한 번뿐”이라고 강조했지만, 홈쇼핑 방송의 매진 임박 멘트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지난해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경쟁적으로 ‘빚 탕감’ 약속을 내놓았듯 앞으로도 ‘선거의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초연금에 이은 행복기금 도입 논란이 계층 간 박탈감을 야기하는 것은 물론 국가 재정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형평성 논란 빚는 국민행복기금

3월28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정책점검회의에서 새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에 대해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민행복기금(이하 행복기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다. 박 대통령은 대선 기간 동안 “18조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322만명의 신용유의자를 구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탄생한 행복기금은 지난 2월28일 기준으로 6개월 이상, 1억원 이하를 연체한 채무자의 빚을 최대 50% 탕감하고, 나머지는 최장 10년간 나눠 갚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금융위원회는 행복기금을 통해 총 32만6000여 명이 채무 재조정을 받고, 향후 5년간 34만2000여 명이 바꿔드림론(전환 대출)을 이용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구제받는 사람이 모두 67만명에 달할 것이란 계산이다. 3월22일부터 접수를 받아 상반기 중에 본격적인 상담 및 지원에 나선다.

문제는 형평성이다. 정부는 개인 워크아웃이나 개인 회생, 파산 등 기존 신용회복제도를 이용 중인 사람에 대해서는 행복기금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했다. 행복기금과 비슷한 개인 워크아웃의 경우 원금 감면 혜택을 주고 있지만, 금융회사가 이미 상각한 채권(회수를 사실상 포기한 채권)에 대해서만 최고 50%까지 감면해준다. 상각하기 전 채권은 이보다 감면율이 낮게 적용된다. 평균 감면율은 약 30%다. ‘조건 없이 최고 50%까지’ 원금을 탕감해주는 행복기금에 비해 불리한 조건이다.

신용회복위원회 역시 워크아웃을 신청한 뒤 1년 이상 성실하게 상환한 사람에게 추가로 10% 정도 깎아주는 제도를 운용 중이지만, 한꺼번에 빚을 다 갚아야 하는 등 구제 조건이 까다롭다.

고금리 학자금 전환 대출을 이용하고 있는 사람도 행복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전환 대출을 받은 대학생은 연 20% 이상의 고금리 대신 6%대 이자만 내면 되지만, 원금 감면과 같은 파격적인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채무 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적극적으로 빚을 갚아온 사람을 배제한 채 오랫동안 연체를 거듭한 사람만 공적 자금으로 구제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 신용불량자는 신용회복위에 전화를 걸어 “부채 감면율이 더 높은 행복기금을 이용할 수 있도록 현재 진행하고 있는 절차를 당장 중단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저축은행에 5000만원 이상 예금했다가 영업정지를 당해 돈을 날린 피해자도 “멀쩡한 예금은 못 찾고 대출받은 돈만 탕감해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캠코 등 행복기금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는 ‘기금이 공공성 자금으로 운영될 텐데 국민이 나눠서 빚을 갚아주는 것 아니냐’ ‘성실한 소시민에게 상실감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정책’ 등의 비판하는 글이 많다.

선거 때마다 쏟아지는 선심성 공약

행복기금 재원은 1조5000억원 규모다. 이는 신용회복기금 5000억원과 차입금, 후순위 채권 발행 등으로 조달하기로 했다. 당장 국가 재정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결국은 나랏돈으로 갚아주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도덕적 해이다. 특히 제2 금융권 대출을 많이 쓰는 사람들 사이에선 지난해 선거 때부터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천에 사는 송 아무개씨(53)는 지난해 말 시중 은행 미소금융재단을 통해 지원받은 창업 자금의 원리금 상환을 중단했다. 행복기금 대상자가 되면 원금 자체를 감면받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송씨는 “6개월 이상 연체한 사람만 원금 탕감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그런 기준을 누가 세웠나. 다음 대책이 나올 때까지 빚을 갚지 않고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송씨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서민 전용 저금리 대출 상품인 햇살론의 연체율은 2011년 말 4.8%에서 지난해 말 9.9%로 치솟았다. 같은 기간 미소금융 대출 연체율은 3.1%에서 5.7%로 높아졌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정부가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상당수 연체자의 ‘기대’와는 달리 행복기금 수혜자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8월부터 6개월 이상 연체된 채무자만 신청할 수 있다. 행복기금에 대해 부푼 꿈을 가졌다가 훨씬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정부는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차단하기 위해 단 1년만 기금을 운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부 소비자단체와 정치인들은 ‘행복기금으로도 부족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진보정의당은 “국민행복기금 지원 대상에 포함되지 못할 정도로 힘든 서민에게는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논평을 냈다. 송광호 새누리당 의원은 “행복기금의 효과가 좋으면 몇 차례 더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선심성 공약은 선거 때마다 경쟁적으로 쏟아진다. 보육료 등을 국가에서 지원하는 누리 과정, 유아에 대한 양육 수당 등은 공약이 현실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됐지만 일부 시·도에선 벌써부터 예산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노인 기초연금 이슈는 새 정부 초기부터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정부는 기초연금을 두 배 인상하면서 국민연금 수령자에게는 더 적은 액수를 주기로 결정했다가 철회했다. 국민연금 납부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임의 가입자 수천 명이 한꺼번에 탈퇴하는 소동을 빚었고, 국민연금 무용론으로 확대됐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행복기금과 같이 정부가 나서서 연체자 빚을 대폭 탕감해주는 식의 정책은 도덕적 해이만 키울 수 있다. 철학 없는 정권의 철없는 정책이란 지적이 나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