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비튼다고 기름값 잡히나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3.04.0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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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정유 4사 전자상거래 참여 종용 논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기름값 안정을 이유로 국내 정유업계의 수출 경쟁력까지 약화시키고 있다.” 최근 기자가 만난 한 정유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의 기름값 인하 정책에 강한 불만을 내비쳤다. 기름값을 잡겠다는 취지 자체에는 공감했다. 출혈을 감수하면서 정부 정책에 일정 부분 호응도 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계속해서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고 이 관계자는 하소연한다. 그는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하는 석유 제품의 수출 경쟁력까지 훼손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K에너지를 제외한 정유 3사가 지난해 처음으로 수천억 원 규모의 영업적자를 냈다. 정부의 기름값 인하 정책이 수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을’인 정유업계 관계자가 ‘갑’인 정부를 상대로 쓴소리를 내뱉은 이유는 뭘까. 산업부는 3월14일 SK에너지·GS칼텍스·에스오일·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와 대한석유협회에 협조 요청서를 발송했다. 정유사의 전자상거래 참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업계의 생각은 달랐다. ‘협조’를 가장한 ‘협박’으로 인식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산업부는 지난해 3월 석유 제품 전자상거래 제도를 도입하면서 수입 경유에 대해 3%의 관세 면세 혜택을 주고 있다. 정유 4사가 전자상거래에 참여하지 않으면 현재의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정부의 무리한 개입에 정유업계 ‘끙끙’

<시사저널>이 입수한 산업부 내부 자료에는 관련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석유 전자상거래 참여 협조 요청’이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정유사가 계속 전자상거래에 참여하지 않으면 2013년 하반기 수요 제출이 불가피하다’고 나와 있다. 정유사가 전자상거래에 참여하지 않으면 수입 경유에 대한 관세 혜택을 6개월 더 연장한다는 얘기였다. 산업부는 구체적인 날짜까지 적시했다. 문건에는 ‘4월(단기), 6월(중기)까지 참여 방식이나 규모 등에 대해 4사 협의한다’고 돼 있다. 업계에서는 “정부의 시장 개입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면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산업부 역시 “시장을 주도하는 정유 4사가 전자상거래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정부와 정유업계의 악연은 지난해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산업부는 한국거래소를 통해 석유 제품을 거래하는 전자상거래 제도를 도입했다. 정유 4사의 독과점 구도를 깨서 기름값을 안정시키겠다는 취지였다. 현재 정유 4사와 주유소는 대부분 독점 계약을 맺고 있다. 정부는 전자상거래 도입을 통해 주유소가 싼 기름을 자율적으로 선택하면 기름값을 다소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자상거래 참여를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정유업계는 기존 대리점 간의 계약 관행을 들어 전자상거래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참여가 없자 정부는 일본에서 수입하는 경유에 대한 면세 혜택까지 부여했다. 그 결과 경유 수입업체가 받는 혜택이 ℓ당 50원 안팎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논란도 있었다. 세제 혜택에도 주유소에서 판매되는 경유 가격에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 수입하는 경유는 현재 국내에서 수출하는 가격보다 ℓ당 30원 이상 높다. 그렇지 않아도 대일 적자가 가중되는 마당에 비싼 일본 경유를 역수입하면서 국부 유출 논란까지 벌어졌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대한화학회 회장)는 “수입 경유를 들여오면서 세제 혜택을 주는 정부의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꼬집었다.

1년이 지난 3월 현재의 상황은 어떨까. 3월21일을 기준으로 국내 주유소의 휘발유와 경유 판매 가격은 각각 평균 1983.04원, 1781.29원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67%, 4.07% 떨어졌다. 경유 가격 하락 폭이 휘발유에 비해 1.4% 정도 컸다. 산업부나 한국거래소측은 “알뜰주유소 확대와 전자상거래 제도 도입이 정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설명했다. 산업부 석유산업과 관계자는 “전자상거래를 통해 거래한 비중을 감안할 때 세제 혜택의 80% 정도는 가격에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유 가격 하락 폭이 휘발유에 비해 큰 이유에 대해서도 “수입 경유의 세액 공제로 전자상거래 거래가 늘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유업계의 생각은 다르다. 정부가 수입 경유를 들여오기 위해 쏟아부은 세금만 수백억 원대에 이른다. 이 금액을 고려하면 실제 가격 인하 효과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석유유통 전문지 월간 <주유소>는 지난해 말 각종 세제 혜택을 주는 전자상거래용 수입 경유의 유가 인하 효과가 4원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 매체는 세제 혜택이 시장 가격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이유를 중간 유통 마진 때문으로 분석했다. 이 매체는 ‘수입 경유에 부여되는 할당 관세 면제 등 세제 혜택 환산액이 ℓ당 53원인 점을 고려하면 실제 소비자가 인하 효과는 8%에 불과하다. 중간 유통 단계에서 마진이 대부분 흡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부 “시장 지배 업자 참여 당연”

정부가 3월 정유 4사에 협조 공문을 보낸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무리한 정책 피로도를 줄이기 위해 정유사 참여를 조건으로 할당 관세를 없애는 ‘딜’을 한 것이라고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뜻을 마냥 거스를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니냐”며 “현재 석유협회를 중심으로 전자상거래 참여 여부를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조치는 정부 스스로가 정책의 문제점을 인정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문식 한국주유소협회 회장은 “고유가의 원인은 기름값의 50%에 육박하는 유류세”라며 “유류세를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합리적인 방안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바이오에너지업계의 부담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중되고 있는 점도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현행법은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 경유에 바이오디젤 연료를 섞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수입 경유는 바이오디젤 연료 혼합 의무까지 면제받았다. 일본 수입 경유의 점유율이 늘어날수록 바이오에너지업계의 부담은 커지는 셈이다. 신종은 바이오에너지협회 회장도 “바이오디젤 생산용 원료의 30%가 국내에서 수거된 폐식용유다. 수입 경유 전자상거래 혜택 폐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산업부측은 “시장을 과점한 정유업계가 전자상거래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자상거래 참여 방안 역시 정유 4사와의 협의를 통해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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