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다시 한번?
  • 안동현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 승인 2013.04.0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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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버블이 정점으로 치닫던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회사 본질은 그대로 유지한 채 이름에만 ‘닷컴(.com)’을 붙이는 관행이 유행했다. 퍼듀 대학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98년과 1999년에 닷컴(.com)이나 닷넷(.net)으로 이름을 변경한 95개 기업의 주가가 평균 74%나 폭등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에 따르면, Computer Literacy라는 기업의 경우 고객이 회사 이름을 기억하는 데 애로가 있어 fatbrain.com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하루 전날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날만 주가가 33%나 뛰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AppNet이라는 회사가 증시 거래용 약어(ticker symbol)를 APPN으로 배정받아 상장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 나스닥의 장외 보드 시장에 Appian Technology라는 회사가 동일한 약어로 거래되고 있었다. AppNet의 상장 접수 소식이 알려지자 엉뚱하게 Appian Technology 주가가 이틀 만에 1400배 이상 폭등했다. 하루에 200주도 거래되지 않던 주식이 700만주 이상 거래된 것이다.

IT 기업의 버블은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2000년 당시 코스닥 지수를 지금 지수로 환산하면 2900이 넘는다. 지금 지수가 550 선으로 당시 지수에서 80% 폭락한 수준이니 벤처 산업 열풍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국정 기조의 핵심 가치로 ‘창조경제’를 내세우고 있다. 창조경제가 정확하게 무슨 개념인지 주무 부서 장관 임명자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정치권에서 비판을 제기했다. 선거 전에는 경제 민주화 개념에 대해 논란이 일더니 선거 후에는 창조경제가 논란의 중심이 된 것이다. 정부 설명에 따르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벤처와 창업을 활성화하고 창의적 아이디어가 사업화로 이어질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주요 내용인 것 같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노무현 정부에서의 혁신경제, MB 정부에서의 그린경제를 거쳐 다시 DJ 정부 때의 벤처경제로 돌아간 느낌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

일전 국회 세미나에 갔다가 김진표 민주통합당 의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DJ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차관과 정책기획수석을 역임해 당시 벤처 활성화 정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당시 벤처 산업에서 모럴해저드의 극치를 보았다고 한다. 실제 당시 수많은 벤처기업 중 현재까지 살아남아 중견 기업 이상으로 성장한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벤처는 문자 그대로 모험 산업이다. 금광 채굴과 비슷한 위험과 수익 구조를 가지고 있어 100개를 시도해 하나 정도 건지면 준수한 성과다. 그 하나가 도태된 나머지 기업에 투자된 자금을 보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야 남는 장사다. 문제는 이렇게 실패 확률이 높다 보니 사업 위험성과 경영진 위험성의 구분이 명확치 않아 모럴해저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사후적으로라도 사업이 수익성 문제로 실패했는지, 업주의 모럴해저드로 실패했는지에 대한 분석과 이를 통해 재기의 기회를 줄 것인지에 대한 엄정한 잣대가 전제돼야 한다. 이스라엘 벤처업계가 세계 최고로 올라선 배경에는 이런 철저한 관리 시스템이 존재했음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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