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스타일'이 잉태한 '젠틀맨'
  • 김봉현│대중음악 평론가 ()
  • 승인 2013.04.2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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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의 뮤직비디오와 뮤직비디오 캡쳐 사진.
싸이와 조용필의 신곡이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이좋게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둘 다 대체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두 곡에 대한 찬사에는 음악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어떤 무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조용필의 신곡 <바운스(Bounce)>에 대한 찬사는 음악의 준수한 완성도라는 기본 전제 위에 ‘가왕’의 업적에 대한 경외심, 10년 만의 컴백에 대한 반가움, 그 나이에 시대에 뒤처지지 않았다는 노장 프리미엄(?) 등이 어우러진 결과로 비친다. 우리는 그가 ‘웬만한’ 것 이상만 들고 나온다면 마땅히 환호할 준비를 오래전에 마친 상태였다.

반면, 싸이의 신곡 <젠틀맨>에 대한 찬사는 국위 선양이나 애국 따위의 개념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인인 우리에게 그는 ‘나의 삶과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이런 맥락을 걷어낸 채 바라본 <젠틀맨>은 역시 ‘<강남스타일>의 성공이 탄생시킨 상품’에 가깝다. <강남스타일>의 세계적인 성공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같은 모습의 <젠틀맨>이라는 곡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강남스타일>의 세계적인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후속곡에서 필연적으로 고려해야 했거나 무시할 수 없었던 요소가 소리와 글자를 통해 <젠틀맨> 곳곳에 담겨 있는 양상이다.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거둔 <강남스타일>과 달리 <젠틀맨>은 마치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향해 정교하게 조준된, <강남스타일>의 업그레이드 복제품 같다. 사운드와 구성 등 모든 면에서 <강남스타일>을 떠올리게 한다. 즉, <젠틀맨>에 혁신 같은 건 없다.

이 말은 폄하의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싸이의 포지션에 대한 존중으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혹자는 <강남스타일>과의 유사성을 들어 <젠틀맨>을 ‘게으른 산물’로 규정지을 수도 있겠지만, 예술가로서의 작가적 역량보다는 대중의 기호와 구미를 기민하게 파악하는 상업 가수의 정체성을 견지하는 싸이에게 <젠틀맨>이라는 결과물은 엄청난 고민의 산물일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젠틀맨>의 가사에서 등장하는 특정 영어 단어와 유사한 발음의 한국어 사용, 영어 욕설을 비껴가는 언어유희 등을 즐거워한다. 그 결과 <젠틀맨>이 서사가 전혀 없는 가사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물론 기승전결 같은 개념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강남스타일>의 제목과 가사는 어떠한 함의와 징후를 담고 있었다.

<강남스타일>에 비하면 <젠틀맨>의 가사는 ‘한글’임이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최소한의 서사조차 포기하는 대신 애초에 유사한 발음의 단어를 오밀조밀하게 배치해 라임의 모양새를 갖추거나 일부러 발음을 뭉뚱그리는 광경은 곧 이 곡의 가사가 ‘의미를 갖춘 텍스트’로서가 아닌 ‘또 하나의 악기’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힙합 애호가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영어 랩의 ‘플로우’만 감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자체가 어떠한 우열을 절대적으로 담보하진 않는다. 다만 두 노래 간의 차이를 드러낼 뿐이다. <강남스타일>의 경험이 <젠틀맨>을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젠틀맨>과 세계 시장의 조우는 앞으로 또 어떠한 미래를 만들어낼까.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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