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화’가 밟은 길 ‘등산화’가 오르고 ‘운동화’가 다시 밀어냈다
  • 조현주 기자·양창희 인턴기자 ()
  • 승인 2013.04.3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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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때부터 이명박 정권까지 낙하산 실태…공기업을 전리품으로 인식

역대 정권에서 낙하산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권마다 인사 병폐의 대표적인 사례로 공기업에 대한 낙하산 인사가 꼽혔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한 5·6 공화국 시절까지는 정부 투자 기관의 기관장 거의 대부분이 군인 출신이어서 낙하산 인사라는 표현 자체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역대 정권에서 논란이 됐던 낙하산 인사 대상자에는 어떤 이들이 있을까. <시사저널>은 언론 보도, 낙하산 인사와 관련된 연구 논문, 전문가 분석 등을 통해 지난 정권의 공기업 낙하산 실태를 정리했다.

2001년 12월11일 민주산악회 제12차 운영위원회 및 송년의 밤 행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회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작은 사진은 김 전 대통령이 민주산악회 회원들과 산행하는 모습. ⓒ 시사저널 사진자료
군사 정권 정부 기관은 ‘퇴역 장성 노후 대책’

군사 정권 시절의 공기업 낙하산 인사와 관련된 언론 보도는 예상외로 드문 편이다. <시사저널>은 1997년 ‘정부 투자 기관 임원의 충원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한 이명석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장을 통해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의 모든 정부 투자 기관 임원 현황 자료를 입수했다. 이 교수는 “박정희 정부는 자료를 입수할 수 없어 부득이 전두환 정부 때부터 연구 조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아래서 주요 기관장을 역임한 군부 출신 명단을 살펴보면 유독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육사 8기 출신으로 수경사령관을 지낸 윤필용씨다. 그는 1980년에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역임한 이후 1987년에는 한국전매공사 이사장, 1989년에는 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 자리까지 꿰찼다. 남다른 이력 탓인지 그에게는 늘 ‘직업이 사장’이라는 별칭이 뒤따랐다.

그와 유사한 이력을 지닌 이들은 또 있다. 합참의장 출신의 김윤호씨는 1984년 대한석탄공사 이사장직에 오른다. 1년후 에 그는 한국가스공사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마찬가지로 합참의장을 지낸 정진권씨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한국관광공사 이사장에 올랐다. 노태우 정권 때인 1989년에는 대한광업진흥공사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육군훈련소장 출신인 이필조씨도 1992년에는 한국조폐공사 이사장이었지만, 그 이전에는 교통안전진흥공단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당시 여러 공공기관을 두루 거친 군 출신 임원 수가 워낙 많아 정부 투자 기관 이사장 자리는 ‘퇴역 장성의 노후 대책용’이라는 여론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YS 정부 때는 민주산악회가 공기업 장악

김영삼(YS) 정부가 들어선 이후부터는 대통령의 사조직이 낙하산 인사의 근원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이 가택연금으로 인해 약해진 체력을 보완하기 위해 등산을 시작하면서 태동한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이다. 1992년 대선 직후 대통령 사조직 해체 지시에 따라 같은 해 12월 해산했지만, 이는 오히려 민주산악회 출신이 낙하산으로 ‘한몫’ 차지할 수 있는 명분이 됐다.

<일요신문>이 1995년 4월23일 보도한 민주산악회의 공기업 장악 실태에 따르면 국영기업체의 경우 사장급 10여 명을 포함해 요직을 차지한 60여 명의 인사가 모두 민주산악회 출신이었다. 1994년 약 1조원의 매출액을 기록하는 등 현금 동원력이 막강했던 마사회의 경우 아예 민주산악회가 장악해 문제가 됐다. 당시 마사회 회장이던 오경의씨와 부회장 김용각씨, 총무이사 노병구씨를 포함한 주요 임원들뿐만 아니라 경마 보안과 계약직에도 민주산악회 출신이 내려갔다.

역대 정권에서 공공기관장 인사 문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자,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1999년 처음으로 공공기관장 공모제가 도입됐다.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전문성을 갖춘 인물을 선발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도입 이후 오히려 ‘낙하산 인사’ 시비는 더 빈발했다. 공모제라는 형식만 빌렸을 뿐 실제로는 대통령 측근을 공공기관 요직에 앉혔기 때문이다. 공모제를 통해 명분과 잇속을 동시에 챙긴 셈이다.

특히 논란이 된 것은 정치권 출신이 대거 공공기관장에 임명된 점이다. <시사저널>은 2001년 5월24일자에서 김대중 정권의 ‘정치권 출신 공기업 낙하산 인사 실태’를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 첫해인 1998년에는 22명의 정치권 인사가 공공기관장에 임명됐다. 1999년 23명에 이어 2000년에는 가장 많은 39명이 무더기로 낙하산을 타고 공기업에 내려갔다.

정치권 낙하산 인사가 관련 부처와 주요 산하 기관장 자리를 독식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건설행정 분야가 두드러졌다. 김대중 정권 시절 김용채 토지공사 사장에 이어 권해옥 주택공사 사장 등 건설행정 요직이 자민련 인사들로 채워져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의 결과물로, 지분을 나누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한국마사회 또한 정치권 출신 낙하산이 장악했는데, 오영우·서생현 전 회장에 이어 윤영호 전 사장 모두 민주당 출신 정치인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취임 초부터 ‘청맥회’라는 모임이 논란이 됐다. 청맥회는 노무현 정권 탄생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기업 및 유관 기관에 진출한 인사들의 친목단체였는데, 이것이 낙하산 인사를 양성하는 모임으로 의미가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병국 당시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은 2006년 3월17일 열린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노 정권은 청맥회를 중심으로 인사를 하고 있다”며 청맥회의 자진 해산을 요구했다.

2006년 3월11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청맥회 출신 정치권 인사 134명이 112개 정부 산하 기관, 공기업 등의 회장·감사 등으로 진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맥회 출신 주요 낙하산 인사로는 당시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 원장이었던 유대운씨가 꼽히는데 그는 청맥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 밖에 대한광업진흥공사, 대한보훈복지의료공단 등은 사장·이사장·감사직에 청맥회 출신이 포진해 문제가 됐다.

이명박 정부, 법 무시한 채 ‘무조건 물갈이’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골적으로 ‘공기업 인사 물갈이’가 단행됐다. 진보 정권 집권에 따른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3월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김대중·노무현 정권 인사는 사퇴하는 것이 옳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법에 의해 임기가 보장된 305개 공공기관장들에 대한 물갈이에 나섰다.

같은 해 6월24일 기획재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는 305개 공공기관 중 임기 만료 또는 공석 중인 기관장을 제외하고 총 236명의 기관장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총 200명으로부터 사직서를 받았고, 131명을 면직시켰으며 69명에 대해서는 유임 결정을 내렸다. 역대 정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대적인 제거 작전이었다.

2008년 11월4일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가 발표한 ‘2008 공공기관장 교체 분석 보고서’는 이명박 정권의 공공기관장 교체에 대해 ‘법에 보장된 기관장의 임기를 무시한 채 사표 제출을 강요해 위법 논란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파행적으로 운영해 새 기관장의 선임 과정상 적법성 시비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부적격 시비로 선임·취임되자마자 자진 사퇴한 인사도 여럿이다. 2008년 6월20일 코스콤 사장에 선임된 정연태씨는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 자문 교수로 활동하는 등 이 대통령의 측근 인사로 알려져 낙하산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개인파산 선고를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임된 지 11일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같은 해 6월17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원장으로 선임된 장종호씨 역시 부적격 시비로 취임 50일 만인 8월7일 자진 사퇴했다. 그는 의료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국의료재단연합회 회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적합성 논란을 샀고, 강동가톨릭병원 병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직원들의 건강보험료를 비롯한 각종 세금을 체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군화(군 출신)에서 등산화(민주산악회) 그리고 운동화(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운동권 인사)까지. 공기업의 낙하산 인사 논란은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워낙 ‘일반화된 현상’이라 문제 제기 자체가 식상하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이명석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장은 “군사 정권 시절만 해도 공기업 임원이나 사장은 거의가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낙하산 인사라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며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를 저지할 관련법이 여럿 제·개정 됐음에도 논란이 이어지는 데 대해 “낙하산 인사들의 정치색이 짙다는 것이 가장 문제”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정권 교체기에 낙하산 인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령 YS 때는 민주당에서 낙하산 인사를 심하게 비판하다가 정권이 바뀌면 바로 자기네 사람을 심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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