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5만원권 어디로 갔나
  • 이혜숙 객원기자 ()
  • 승인 2013.04.3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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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 안방 금고에서 낮잠…탈세 목적으로 숨겨둬

4월25일 저녁, 서울 도심 한복판에 어둠이 깔리자 볼품없는 매장 앞에 검은색 벤츠 한 대가 멈춰 섰다. 이내 비서인 듯한 사람이 내려 뒷좌석 문을 열자 70대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본 후 매장 안으로 사라졌다.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와 탈세 방지 방침이 발표된 4월4일 이후 서울 을지로 일대 전문 금고 매장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서울 강남 지역과 성북동 일대, 경기 용인 등 부촌에서 자주 찾아온다. 멀게는 부산 해운대 등지에서 오시는 분도 있다. 해운대 일대에서 사업하는 분들은 현금 보유량이 많기로 유명하다. 대부분 늦은 저녁에 비서를 대동하고 오지만, 정작 매장 안에는 혼자 들어와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고만 간다. 2~3일 후 어디 어디로 배달해달라는 주문 전화가 오면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 시사저널 이상민·전영기
“경기 나쁠수록 금고 많이 팔려”

서울 을지로에서 50년 넘게 금고를 팔고 있는 ㅂ금고 사장의 말이다. 그는 “돈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며 “직접 방문해서 눈으로 확인하고 설명을 다 들은 후에 사지, 그냥은 안 산다”며 혀를 내둘렀다.

“은밀한 이유(비자금 보관용)로 금고를 사려는 사람은 대놓고 말을 안 해도 딱 보면 안다. 그런 분들은 내화용(화재 대비용) 금고가 아니라 특수 강력 금고를 찾기 때문이다. 내화용은 철판에 내화재만 들어갔다. 반면 특수 강력 금고는 특수 소재를 사용해 드릴로도 안 뚫린다. 가격도 내화용에 비해 5배 이상 비싸다. 그것도 모자라 간혹 특수 주문·제작을 의뢰하는 사람이 많다. 이분들은 한결같이 가격은 얼마라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튼튼하게 만들어달라고 주문한다.”

금고를 판매한 지 30년 됐고 을지로 일대에서만 6년 됐다는 김 아무개씨는 “금고 판매는 경제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보면 된다. 경기가 나쁠수록 금고 판매량은 늘어난다”며 “돈 좀 만진다는 회장님들이야 집에 기본 금고 하나씩은 다 갖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씨는 “금고를 사는 사람들의 특성상 개인정보 유출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밤에 은밀하게 신문지로 싸서 배달해달라는 사람도 있다”며 “집 안 깊은 곳에 아무도 보지 못하게 깊숙이 설치해달라는 사람이 많다”고 밝혔다.

앞서 언급한 ㅂ금고 관계자는 “금고 배달을 나가 보면 집이 너무 커서 거실에서 방으로 통하는 복도가 길고 구불구불해 한 번 들어간 것만으로는 기억하기 힘들 정도인데도 혹시나 배달 기사가 비밀번호를 알까 봐 본사에 여러 차례 확인 전화를 거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배달 기사 모두 신원 보증을 마친 사람들로 한국은행 금고 설치에도 파견된 확실한 사람들’이란 설명을 듣고서야 안심한다”고 밝혔다.

최근 국세청이 지하경제 양성화 차원에서 대대적인 세원 발굴에 나서자 고액 자산가들이 5만원권을 현금 다발로 인출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동시에 개인용 금고 판매량도 올 들어 급증하고 있어 사라진 5만원권이 부자들의 안방에서 잠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서울 을지로4가에 위치한 한 금고 매장. ⓒ 시사저널 이상민
고액 자산가들 5만원권 대량 인출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4월11일 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5만원권에 대한 수요가 많고, 또 5만원권을 많이 찍어내지만 대부분이 탈세 목적으로 개인 금고에 잠들어 있다”며 “5만원권으로 15억원을 보관할 수 있는 개인 금고 판매량이 최근 20% 늘었다는 점만 봐도 엄청나게 찍어낸 5만원권이 개인 금고로 숨어들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5만원권 품귀 현상은 금융소득 과세 강화 분위기 속에서 자산가들이 탈세 목적으로 현금을 찾아 개인 금고 등에 넣어두는 이른바 ‘화폐 퇴장(退藏)’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이 최고위원은 4월18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2011년부터 해외 금융 계좌 신고제가 도입되면서 해외 계좌에 재산을 숨길 방법이 제한되다 보니 고액이면서 부피가 작은 5만원권을 개인 금고에 숨기고 있다”면서 “탈세 목적으로 현금을 숨기는 고액 자산가들을 적발하기 위해서는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금융 거래 정보와 금융감독원의 불공정 거래 내역, 공정거래위원회가 가진 대주주 주식 거래 정보, 비상장 계열사 내부 거래 내역 등의 자료에 과세 당국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최고위원의 주장이 나온 후 국회 정무위원회 소위는 4월23일 국세청의 개인 금융 거래 정보 파악 범위를 확대하는 FIU법을 통과시켰다.

FIU법 개정안은 FIU가 보유한 고액 현금 거래 보고(CTR)와 의심 거래 정보(STR) 등을 국세청의 탈세·탈루 혐의 조사 때 제공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그동안은 범죄 사실이 확인된 조세 범칙 조사 때만 FIU 정보를 볼 수 있어 지하경제를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 법안의 대상이 되는 고액 현금 거래 정보는 거래 금액이 총 2000만원 이상인 경우다. 이에 따라 거액의 자산가들이 국세청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법안 통과 전 여러 차례에 걸쳐 5만원권을 인출한 후 개인 금고에 보관하는 바람에 5만원권 품귀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3월21일 한국은행이 발행한 ‘2012년도 지급결제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말 현재 화폐 발행 잔액은 전년 말에 비해 11.7% 늘어난 54조3000억원에 달했다. 화폐 종류별로는 5만원권이 전년 대비 26.2% 증가한 반면, 1만원권은 7.0% 감소했다. 5만원권 비중(53.5%→60.3%)이 커지면서 1만원권(31.2%)의 두 배에 달했다. 5만원권이 우리나라 화폐의 주역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가정용 금고에 5만원권 22억원 보관 가능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2009년 6월만 해도 전체 화폐 발행 잔액 중 5만원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7.7%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60%를 훌쩍 넘었다. 발행 액수도 2009년 6월 2조4835억원에서 6개월 뒤인 2010년 2월 12조원을 넘어섰다. 그러더니 2012년 30조원을 돌파했다. 5만원권이 그동안 화폐 대명사였던 1만원권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중에 대량으로 풀린 5만원권은 모두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지난해 상반기를 기준으로 발행된 화폐 중 은행이 지급을 위해 창고에 보관한 현금(시재금) 10조2611억원과 기업이 투자를 위해 가지고 있는 돈 9조1853억원을 뺀 31조원가량이 시중에 나돌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를 5000만명으로 봤을 때 한 사람당 평균 62만원 정도의 현금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중 5만원권이 28조6399억원으로 가장 많다. 발행 장수로 보면 총 5억7278만8000장으로 1인당 5만원권을 11장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국민 1인당 소지한 현금 62만원 중 55만원은 5만원권이란 얘기다.

그러나 조사 결과 국내 성인이 보유하고 있는 5만원권은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민이 지갑·가방에 소지한 거래 목적의 현금은 평균 8만4576원이다. 이 중 5만원권은 2만8291원으로 2명당 1장을 가진 것으로 집계됐다. 결국 국민 중 절반은 5만원권이 없거나, 5만원권 55장을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 주변에서 5만원권을 쉽게 볼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바로 ‘환수율’에 있다. 환수율이란 특정 기간 동안 한국은행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량 가운데 다시 돌아온 화폐량의 비율을 말한다.

한국은행(한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5만원권 발행액은 5조7593억원이었고, 은행의 지급 결제 등으로 한은에 들어온 환수액은 3조3734억원이다. 환수율 58.6%로 지난해 같은 기간(71.6%)이나 4분기(86.7%)에 비해 훨씬 낮았다. 5만원권 10장 중 4장이 시중에 돌지 않고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다는 의미로 세금을 포탈한 검은돈이거나 뇌물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혜훈 최고위원의 주장대로 사라진 5만원권의 행방과 가정용 개인 금고의 판매량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해답을 얻기 위해 찾은 서울 을지로4가의 한 매장에서는 특수 금고 주문·제작을 위해 방문한 손님 한 명이 매장 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장 주인에 따르면, 이 손님은 1000억원대 자산가로 소문난 사업가인데 이번에 가정용 개인 금고를 특수 주문·제작하기 위해 들른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특수 제작을 위해 찾는 사람들 대다수는 자신이 원하는 금고를 만들어줄 수만 있다면 비용을 개의치 않고 선뜻 거액을 지불한다고 한다.

최근 TV 드라마의 소품으로도 자주 등장하는 ㅅ금고의 한 관계자 얘기다. “요즘 시중 은행들의 금리 인하와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질 것이란 소문이 나돌면서 가정용 개인 금고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직접 매장을 방문하거나 유명 백화점을 찾아 문의하는 사람이 하루 평균 5~6명으로 올 들어 판매량이 30%가량 증가했다.”

5만원권이 개인 금고에서 잠자고 있다고 주장한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 ⓒ 시사저널 박은숙
“돈 얼마든 줄 테니 특수 금고 만들어달라”

실제로 이 매장은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해 공장을 풀가동하는데도 주문한 후 일주일은 기다려야 물건을 배송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손님 중에는 노골적으로 ‘이 금고에 5만원권 지폐가 얼마나 들어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면서 “금고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높이 877mm, 길이 501mm, 폭 501mm인 경우 내부 서랍을 빼면 5만원권으로 최대 22억원까지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ㅅ금고는 3월19일부터 3일간 현대백화점 압구정지점에서 5만원권 지폐 크기의 종이뭉치와 금괴를 가득 채운 금고를 전시하기도 했다.

지난해 2월에는 서울의 한 사립학교 교장 자택 금고에서 5만원권으로 현금 17억원이 쏟아져 나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 지역에 사는 ㄱ교장은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자택 압수수색 과정에서 가정용 개인 금고에 보관하던 뭉칫돈이 드러났다. 검찰은 공금 11억원을 횡령하고 교사 채용 대가로 억대의 돈을 받은 혐의 등으로 이 교장을 불구속 기소했지만 돈다발의 정체에 대해선 현금이라는 이유로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5만원권은 자금 추적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피에 비해 액수가 커서 비자금 은닉이나 로비용으로 애용된다. 5만원권 100장을 묶은 다발 20개면 1억원이 되는데 무게는 고작 2kg 정도이고 높이도 22cm에 불과하다.

지난해 4월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발견된 110억원 돈뭉치의 상당수가 5만원권이고, 서울 여의도에 있는 한 물품 보관업체가 보관하고 있던 10억원 박스도 5만원권으로 채워져 있었다.

최근 장진수 전 총리실 주무관이 민간 사찰 은폐 대가로 건네받았다고 주장하는 5000만원어치 돈다발은 5만원권이 한국은행 발행 띠지도 풀지 않은 채 100장씩 10개의 묶음으로 돼 있었다.

5만원권은 고액 전문직 종사자들의 탈세에도 자주 등장한다. 서울 강남에서 유명 여성 전문 병원을 운영하는 한 의사의 오피스텔에서 5만원권 다발로 24억원이나 발견됐다. 또 다른 강남 성형외과의 한 원장은 비밀 창고에 현금으로 받은 수술비 3억원을 5만원권으로 보관해오다 적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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