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천장 부수려다 자신들이 깨질 판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05.0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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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여성임원할당제’ 법안 부결로 집권당 분열 양상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하는 ‘유리 천장’은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표현하는 단어다. 이게 비단 우리만의 일은 아닌가 보다. 여성 리더십의 표본인 독일에서는 최근 ‘여성 문제’ 때문에 의회에서 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지난 4월18일 부결된 ‘여성할당제 법안’이 문제였다. 이 법안은 독일 기업 이사회의 30%를 여성 임원으로 채워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야당인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이 제안한 이 법안은 지난 한 달간 여야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을 일으킨 주범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당인 기독민주연합(CDU) 내의 논쟁이다. 여성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 법안에 반대했다. “능력 없는 여성 임원을 양산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라는 논리에서다. 그런데 같은 당 여성 정치인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노동장관은 “소신에 따라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밝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동안 꾸준히 기업의 여성할당제 도입을 주장해온 라이엔 장관은 메르켈 총리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순식간에 그녀의 ‘맞수’로 자리매김했다.

‘유리 천장’에 균열이 가기를 기대했던 독일 시민사회와 언론의 시선은 시간이 갈수록 냉랭해졌다. 여성할당제 논쟁이 점점 산으로 가면서부터다. 법안의 기대 효과에 관한 논의는 갈수록 희미해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빤한 여야 간의 자존심 대결과 정치적 이해관계만 남았다.

원래 여성할당제는 야당이 발의한 법안이지만, 여당인 기민련도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지지세가 적지 않았다. 야당이 2023년까지 이사진의 40%를 주장한 데 비해 기민련은 2020년까지 30%를 주장하는 것 정도가 달랐다. 여성의 진급을 가로막는 유리 천장을 제거해야 한다는 데는 여야가 공감했다.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터져나왔다. 독일에서 여성할당제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유일한 정당인 기민련의 연합정부 파트너 자유민주당(FDP)이 나선 것이다. 자민당은 “일부 기민련 의원들이 소신 투표를 하는 것은 연정 계약 위반”이라며 압력을 행사했다.

이때부터 상황은 급변했고, 결국 법안에 찬성하는 의원들을 포함한 기민련 전체가 일제히 반대표를 던지면서 야당의 여성할당제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심지어 대표적 찬성론자인 라이엔 노동장관조차 기민련과 자민당의 비판에 못 이겨 소신을 접고 반대표를 던졌다.

여성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맨 왼쪽)는 ‘여성할당제 법안’의 대표적인 반대론자다. 결국 이 법안은 4월18일에 부결됐다. ⓒ EPA연합
자민당이 몽니 부리자 상황 급변해

사실 독일의 정당과 공공기관에서는 이미 여성할당제가 시행되고 있다. 1979년 녹색당이 창당되면서 당내 공직의 50%를 무조건 여성 몫으로 정한 뒤 사민당, 좌파당, 심지어 기민련의 자매 정당인 바이에른의 기독사회연합(CSU)도 주요 당직의 40~50%를 여성 정치인들로 채우고 있다. 공공 부문에서는 2001년 제정된 연방평등실현법이 시행되면서 동일한 조건일 경우 여성을 우선하도록 했다.

논란이 되는 것은 ‘여성할당제가 공공의 영역을 넘어 기업의 의무로 정할 수 있는 내용인가’라는 점이다. 연정 파트너이자 친기업적인 자민당은 “정부가 기업의 결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강제로 숫자를 맞추기보다 기업이 스스로 여성의 승진 기회를 개선하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민당의 바람과 달리 개선 속도는 더디다. 민간 부문에 여성 임원을 할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2001년 재계와 정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강제력이 없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여성이사연맹(FidAR) 조사에 따르면 2013년 3월을 기준으로 독일의 대표적인 종합주가지수인 닥스(DAX)에 상장된 독일 기업의 여성 이사 비율은 평균 16.2%로 1년 전 12.8%에 비해 소폭 증가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힘을 가진 경영진 중에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5.9%에 불과했다. 게다가 닥스에 상장한 기업 중 4분의 1은 단 한 명의 여성 임원도 두지 않고 있다.

여성 임원 할당제가 얼마나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냉정한 목소리도 있다.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닥스(DAX) 상장 기업 이사진의 여성 비율을 야당의 요구대로 40%까지 끌어올려도 고작 386명의 운명이 바뀔 뿐이다. 수천만 명의 보통 독일 여성은 일터에서 이들과는 전혀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다”며 여성할당제 자체를 ‘엘리트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여성할당제 논의가 평범한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으니 이왕 할 것이라면 모든 직급에 적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논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본 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전공하는 마리아 루츠 씨는 여성이지만 ‘여성할당제’에 반대한다. 그는 “여성할당제는 소수의 대기업 이사진에만 적용되는데, 이것이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다”며 여성할당제 효과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부결됐지만 여성할당제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표결을 불과 사흘 앞둔 지난 4월15일, 기민련 당 지도부는 소신론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2020년까지 여성할당제를 선거 공약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독일 여당이 얼마나 명분 없는 정치적 싸움에만 몰두했는지 증명하는 대목이다.

여성할당제로 인해 독일 정계가 받은 상처는 크다. 독일의 여론조사 기관인 Emnid가 매주 일요일 발표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기민련의 지지율은 여성할당제를 부결시킨 이후 2%가량 하락했다. 게다가 친여당 성향의 독일 프로축구 바이에른 뮌헨의 울리 회네스 구단주가 스위스 은행에 예치한 예금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은 ‘탈세 스캔들’이 알려지면서 지지율 추락이 가속화하고 있다.

독일의 미래 권력 후보군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독일의 차기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라이엔 장관의 정치적 생명에 주목하는 시선이 많다. 여성할당제를 찬성한 라이엔 장관을 두고 메르켈 총리는 ‘변함없는 신뢰’를 약속했지만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재집권을 노리는 메르켈 총리의 눈 밖에 난 장관들은 모두 사표를 쓴 전례가 있다. ‘유리 천장’을 깨부수려는 노력이 의외의 곳에서 마찰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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