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세계 제패했는데, 우리도 질 수 없다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3.05.15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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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프로젝트 성공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독일 축구

한때 세계 자동차 시장은 일본 메이커가 장악했다. 토요타로 대표되는 일본 차는 최대 시장인 미국까지 석권하며 위세를 자랑했다. 그러나 독일 차의 반격에 흐름은 바뀌고 있다. 튼튼함과 효율성의 상징이던 독일 차는 소비자가 원하는 혁신과 고급이라는 아이덴티티로 갈아타면서 반격을 펼쳤다. 이제 독일 차는 프레임과 엔진뿐만 아니라 익스테리어와 인테리어 디자인에서도 일류다.

최근 시작된 독일 축구의 부활은 독일 차와 닮았다. 지난 4월 말 유럽 축구계는 독일 분데스리가 클럽들이 일으킨 지진에 요동쳤다. 현재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두 클럽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세계 최고의 클럽이라고 자부하던 스페인의 두 명문 클럽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나란히 진출했다.

뮌헨은 바르셀로나를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4-0, 원정에서 열린 2차전에서 3-0으로 누르고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도르트문트는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4-1로 누르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원정 2차전에서 0-2로 패했지만, 골 득실에서 앞서며 결승에 올랐다. 분데스리가 클럽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맞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결승전에서 엘 클라시코(El Clasico, 전통적 라이벌전)를 꿈꿨던 스페인의 두 무적함대를 전차군단이 깨부순 것이다.

5월1일 열린 챔피언스리그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의 토머스뮬러가 헤딩슛을 하고 있다. ⓒ AP 연합
지도자·유소년 육성에 1조원 넘게 쏟아부어

각 나라 리그의 최강 팀이 참가하는 챔피언스리그는 유럽 축구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다. 분데스리가가 지난 10여 년간 유럽 축구를 양분한 프리미어리그(잉글랜드), 프리메라리가(스페인)를 물리치고 그들만의 결승전을 만든 것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분데스리가는 자신들이 10년간 남모르게 준비해온 프로젝트의 결실을 만방에 알렸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분데스리가의 잔치로 확정되자 축구계는 독일 축구의 저력과 부활 요인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이미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의 리그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적 권위의 축구 전문지 <월드사커>는 최신호에서 세계 축구 리그 순위를 매기면서 분데스리가를 1위로 꼽았다. 관중 수, 재정 안정성, 스타플레이어 확보, 경기장 시설 등 8개 항목을 평가했는데 분데스리가는 총점 60점으로 55점의 프리미어리그, 46점의 프리메라리가를 제쳤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 것은 관중 수였다. 분데스리가는 지난 2011-12시즌에 평균 관중 4만5116명을 기록했다. 3만4600명의 프리미어리그와 2만8796명의 프리메라리가를 크게 따돌렸다. 그 외의 항목에서도 고른 배점을 받았다.

한때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다. 차범근이 활약했던 1970~80년대 분데스리가는 월드스타의 집결지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추락을 거듭했다. 독일 통일 후 국가 재건과 동서 균형 발전에 국가 경제가 집중되며 분데스리가는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사이 어마어마한 재정력을 갖춘 프리미어리그가 치고 나왔다. 그 후에는 화수분 같은 선수 육성이 가능한 프리메라리가가 패권을 잡았다. 대외 경쟁력과 화려함의 실종으로 분데스리가는 쇠락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 그들은 열심히 발길질 중이었다.

눈앞의 현실이 아닌 미래를 준비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과 유로2000에서 실패를 맛본 게 자극제였다. 통일 후 안정을 되찾은 독일 정부는 스포츠를 통한 국가 안정을 꾀했다. 그런 장려와 지원 속에 분데스리가는 유스 시스템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지난해 분데스리가는 총 매출의 4% 수준인 1100억원을 유스 시스템에 투자했다. 2009년 독일은 유럽 U-17, U-19, U-21 챔피언십을 모두 석권했다. 마누엘 노이어, 메수트 외질, 사미 케디라, 마츠 훔멜스 등 현재 대표팀의 주축이 된 선수가 이 시점에 쏟아져 나왔다. 최근 유럽 명문 클럽은 유능한 선수를 찾기 위해 분데스리가로 향한다. 지금 분데스리가엔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없지만, 향후 10년을 책임질 선수가 계속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의 기린아로 꼽히는 손흥민 역시 분데스리가 시스템을 통해 완성됐다. 2008년 대한축구협회의 지원을 받아 함부르크SV 유스팀에 입단한 손흥민은 2년 만에 성인 팀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현재 손흥민은 분데스리가 최고 수준의 공격수로 성장해 한국 대표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토트넘, 첼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등 이른바 프리미어리그의 빅 클럽들이 손흥민 영입 경쟁에 뛰어들었다.

도르트문트 선수들이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확정한 후 기뻐하고 있다. ⓒ EPA 연합
튼튼한 내수 시장과 흔들리지 않는 경제력

좋은 선수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좋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독일 축구는 이 점도 잊지 않았다. 독일은 지도자 라이선스를 유럽에서 가장 먼저 도입했다. 총 4등급으로 나눴고, 1부 리그와 대표팀 감독이 되기 위해선 최상위 등급의 라이선스를 보유해야 한다. 라이선스 시스템을 통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지도자는 전국 각지로 흩어져 어린 선수들을 키우고 있다. 이러한 독일의 지도자 관리 시스템은 FIFA의 롤 모델로 정착됐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지도자 연수를 하고 돌아온 서정원 수원삼성 감독은 “굉장히 체계적이다. 다음 등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굉장한 노력이 요구된다”며 “단순히 축구를 가르치는 것을 넘어 운동생리학·심리학 등 많은 지식을 갖추도록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10년간 분데스리가가 선수와 지도자 육성을 위해 투자한 돈은 1조원이 넘는다.

최근 분데스리가는 그 열매를 맺고 있다. 지난 네 시즌 동안 각기 다른 3개 클럽(바이에른, 도르트문트, 샬케)을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시킨 유일한 리그다. 뮌헨과 도르트문트는 대외 경쟁력 강화의 상징이다. 뮌헨은 2010년과 2012년에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랐다. 다음 시즌부터는 전 바르셀로나 감독이었던 펩 과르디올라가 지휘봉을 잡는다. 올 시즌에도 트레블(3관왕) 달성이 유력해 지난 5년간 바르셀로나가 차지했던 유럽 축구의 패권을 쥘 가장 유력한 팀으로 꼽힌다. 그런 뮌헨을 밀어내고 지난 두 시즌 동안 분데스리가를 제패했던 도르트문트도 눈에 띈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감독 위르겐 클롭의 지도력에 유럽 각국에서 데려온 재능 있는 선수가 뭉치며 힘을 내고 있다.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시티를 꺾었다. 함부르크를 떠날 가능성이 큰 손흥민 영입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 팀이다.

이처럼 저력 있는 팀을 만든 것은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방식을 택한 분데스리가 시스템이다. 분데스리가는 1조원에 근접한 중계권료를 최대한 공평하게 나눈다. 최근 네 시즌의 성적을 기준으로 배분하되 편차를 줄인다. 뮌헨·도르트문트 등 최상위권 팀이 매년 500억원 내외의 중계권료를 받아가지만 아우크스부르크 같은 하위권 팀도 300억원가량은 챙길 수 있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전체 중계권의 절반을 가져가는 등 돈의 집중화가 벌어지는 다른 리그와 달리, 함께 성장해가는 분데스리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분데스리가에서는 리그 전체 비용의 38%만이 인건비에 쓰인다. 거물급 선수를 많이 데려올 순 없지만, 대신 재정 건전성과 안정을 택한 것이다. 외국 자본을 등에 업고 돈을 펑펑 쓰며 선수를 사들이고 있는 프리미어리그가 그 대가로 서서히 재정 위기를 맞는 상황을 보면 분데스리가의 선택은 옳다고 볼 수 있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외국 출신의 재벌이 쉽게 구단을 소유할 수 없게끔 특정 개인이 구단 지분의 49% 이상을 차지할 수 없도록 하는 룰도 만들었다. 프리미어리그나 프리메라리가처럼 아시아로 투어를 떠나진 않지만 연고 지역의 사랑을 듬뿍 받는 클럽이 됐고, 그것이 평균 관중 수 1위로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 경제 위기가 닥쳐도 독일은 내수 시스템으로 충분히 돌아가는 리그이기에 프리미어리그, 프리메라리가, 세리에A에 비해 변수가 적다.

이제 분데스리가는 전 세계 축구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되고 있다. 안정성과 형평성에 기반을 둔 그들은 리그 전체가 경쟁력을 높였다. 독일 축구의 저력은 곧 독일이라는 국가와 사회가 지닌 힘과 성향에 비례한다. 저변 강화, 국가 지원, 팬의 합리적이면서도 애정 어린 소비가 리그를 더욱 튼튼하게 하고 있다.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클럽이 지역민과 함께 성장하고, 유스 시스템을 통해 성장한 선수가 검증된 지도자와 함께 팀을 키워가는 시스템은 이제 세계 축구의 새 패러다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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