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전쟁, 그 치열함이 침대 시트를 적신다
  • 김형자│과학 칼럼니스트 ()
  • 승인 2013.05.15 10:3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회 사정에 3억개 분출…자궁 밖으로 쫓겨난 정자들의 역류가 습기 만들어

사람의 새 생명은 남녀의 성관계에서 남성의 정자가 여성의 난자와 결합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시작된다. 남성 고환에서 만들어진 정자는 여성의 질에서 자궁 경관을 거쳐 자궁으로 들어가 난관에서 난자와 만남으로써 수정이 이뤄진다. 그런데 남녀가 성관계를 하다 보면 두 육체가 뿜어내는 열기와 분비물로 어느새 침대 시트가 축축이 젖어들기 시작한다. 여성의 경우 오르가슴을 느끼게 되면 자궁이 미칠 듯한 속도로 욱신욱신 수축 운동을 해나가면서 마치 모르핀을 맞은 것처럼 힘이 쫙 빠져나가고, 절정에 이른 남성은 성기에 가해지는 자극에 의해 사정 중추가 흥분하면서 남성의 생식기에서 정액을 반사적으로 내쏟는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두 사람의 분비물로 시트가 축축이 젖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 일러스트 임성구
난관 향해 17㎝ 거리 헤엄쳐 가

<정자 전쟁>의 작가 로빈 베이커에 따르면, 정사 후 이처럼 시트가 젖는 이유는 여성의 몸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쫓겨난 정자들의 역류 현상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몸이 남성의 정자를 쫓아내는 이유는 ‘수정’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한 일종의 작전이라는 것이 로빈 베이커의 답이다.

정자는 남성의 몸 밖으로 나와 여성의 몸으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전진, 또 전진한다. 난자를 만나기 위해 아주 긴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여성의 질 안에 들어온 정자는 자궁 속을 지나 수란관을 헤엄쳐 간다. 난소가 있는 난관을 향해 약 17㎝의 거리를 헤엄쳐 가야 한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 같지만 자신의 몸길이(약 0.05㎜)보다 3000배 이상 먼 곳을 헤엄치는 것이다. 정자는 1분에 3㎜의 운동 능력으로 난자에 접근해간다. 정자의 편모에 의해 움직이면서 난자가 유인하는 분비물을 따라 길을 찾아간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정자에 대해 그저 빨리 난자에게로만 헤엄쳐 가려는, 저돌적이고 경쟁밖에 모를 것 같은 이미지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로빈 베이커는 이런 편견을 깨고 있다. 그는 “오히려 난자가 정자와 만나는 과정에서 훨씬 더 적극적이고 강한 역할을 맡는다”고 설명한다. 그저 꼬리만 흔들며 맥없이 헤엄쳐 가는 비리비리한 정자들을 난자가 활성화시켜 자기 쪽으로 강하게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질에서 시작해 난소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모든 생식기 계통은 제때 제 장소에 최상의 정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잘 짜인 프로그램처럼 계획적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짜임새 있게 작용하는 난자 밑에서 오매불망 자기를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며 얌전히 대기하던 정자들 가운데 단 하나의 운 좋은 정자만이 난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1회에 사정되는 약 3억개의 수많은 정자 중에서 난자 근처로 갈 수 있는 정자는 100개 정도뿐이다. 그 이유는 정자가 헤엄쳐 나가는 자궁과 난관 내부에는 복잡한 주름과 섬모가 있어 힘든 장애물 경주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정자가 들어가면 난자의 세포막에서 전기 반응이 일어나 다른 경쟁 정자들은 난자의 세포막에서 떨어지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난자의 겉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이 딱딱하게 굳어 다른 정자는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결국 난자 근처로 간 정자 100개 중 한 개를 빼고는 모두 들러리를 서는 것이다.

한 여성 생식기에 두 남성 정자 경쟁 치열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먼저 오르가슴에 도달하거나 또는 전혀 절정감을 느끼지 못한 경우에는 비교적 적은 수의 정자를 보유한다. 그러나 남성이 사정하는 순간, 또는 그 후에 여성이 극치감을 맛보면 비교적 많은 정자를 몸에 지니게 된다. 남성의 사정 후에 오르가슴에 이르면 자궁 내부의 압력이 상승해 질에 있는 정액을 더 많이 자궁 안으로 빨아들이기 때문에 정자가 몸속에 많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대다수 정자는 발을 들이지도 못하고 자궁 밖으로 쫓겨난다. 그 이유는 외부 물질에 대항해 자기의 몸을 보호하려는 여성의 몸이 갖는 특성에 있다. 자궁 경부를 침투하는 남성의 정자 역시 외부 물질 취급을 받기 때문에 난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정자를 받아들이고 많은 수의 정자가 내쫓김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게 쫓겨난 정자들의 역류 현상으로 침대 시트가 축축이 젖는 것이다. 열렬한 정사 뒤에는 더욱 축축이 젖는다.

로빈 베이커는 “정자들의 싸움은 여성이 각기 다른 두 남성과 성관계를 맺어서 여성의 생식기에 두 남자의 정자가 보관돼 있을 때 더욱 치열하다”고 주장한다. 즉, 불륜 관계에 놓인 남성의 정자와 남편의 정자가 각각 먼저 난자와 수정하려고 치열한 경주를 벌이기 때문이라는 것. 남성의 정자가 여성의 질에 동시에 보관되었다는 것은, 여성이 5일 간격으로 다른 두 남성과 연이어 성관계를 가졌다는 얘기다.

조사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영국에서 태어난 아기의 4%가 두 남성의 정자 경쟁을 통해 잉태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영국 여성 4000명을 대상으로 불륜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서는 첫 경험 이후 총 50회의 섹스를 하기까지 두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은 5명 중 1명, 총 500회까지는 2명 중 1명이 두 남성과 성관계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두 남성과 즐기는 여성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면, 대다수 영국 여성의 몸속에서는 최소한 한 번쯤 각기 다른 남성의 정자 싸움이 일어났다고 보는 게 맞다.

여성은 좀 더 좋은 수정란을 얻기 위해 항상 젊은 정자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정자 경쟁의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한 사내들은 노쇠한 정자를 버리고 싱싱한 정자를 상비하기 위해 자위행위를 하거나 배우자 외의 여성과 관계를 가져왔다. 남성 쪽에서 두 명 이상의 여성과 관계를 맺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여성이 남성을 바꿔가며 성관계를 해 정자 경쟁을 시키는 시대가 된 것일까.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난자 가까이 갈수록 힘 펄펄 


정자는 여성의 몸속에 들어가면 여성이 보내는 화학적 신호에 반응해 움직임이 매우 격렬해진다. 보통 정자는 알칼리성이 될수록 빨리 움직인다. 예컨대 높은 산성을 띤 남성 생식기에서 움직임이 둔하던 정자가 여성 생식기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알칼리성이 강해지는 난자 쪽으로 접근하면서 활발해지고, 난자와 거의 닿을 무렵 최고의 속도를 낸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알려져왔다. 하지만 어떤 메커니즘 속에서 정자가 스스로의 산성도를 바꾸는지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의문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생리학자 유리 키리초크(Yuriy Kirichock) 박사팀은 남성의 정자가 스스로 산성도를 조절해 활발하게 움직이거나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이 의문을 풀었다. 연구팀에 따르면 Hv1이라는 정자 내부 물질이 산성의 양성자 방출을 적절히 제어함으로써 정자의 움직임을 때로는 활발하게 때로는 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해 정자가 알칼리성으로 바뀌어 활동성을 높여야 할 때를 안다는 것이다. 정자가 난자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Hv1이라는 물질이 정자 표면의 미세한 구멍을 확 열고 산성 물질의 양성자를 바깥으로 내보내 정자 내부를 알칼리성으로 만들어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반대로 힘을 아껴야 할 때는 구멍을 닫아 산성 물질을 유지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