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담아둔 고통이나 사랑 드러내겠다”
  • 조철 기자·문정빈 인턴기자 ()
  • 승인 2013.05.2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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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번째 영화 <화장> 만드는 임권택 감독

임권택 감독은 영화계에서 아버지 같은 존재다. 후배 감독 중에는 임 감독이 영화계 기둥처럼 우뚝 서 있기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좇아 영화에 뛰어들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임 감독은 평생을 앞장서 걸으며 한국 영화의 길을 열어온 주인공이다. 이런 찬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최근 그가 102번째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그는 1934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이다. 팔순에 이른 이 현역 감독의 열정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실험했다. 어떤 때는 관객을 놀라게 했고, 어떤 때는 제작자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시행착오의 대가’라고 불렀다. 그동안 해온 시행착오의 결과물을 기어코 만들겠다는 의지가 102번째에 다다른 것이다.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들어보니 그의 실험들은 운명적이다. 정부에서 <태백산맥>을 찍지 못하게 해, 노느니 만들어보자고 한 것이 <서편제>였다. 올해 운명처럼 새 제작자 심재명 명필름 대표를 만났고, 영화 원작으로 김훈의 단편 <화장(火葬)>을 선택했다. 시나리오 작업 중인 그를 어버이날 다음 날인 5월9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 자택에서 만났다.

 

ⓒ 시사저널 전영기
102번째 영화 <화장>을 계획 중이라는데 감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인가.

명필름 같은 좋은 영화사와 하게 돼서 너무 좋다. 지금은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임 감독을 만나기 전에 김훈 작가와 통화했는데, 임 감독이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영광이라고 하더라. 소설을 어떻게 각색하든 일절 간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원작자와 만난 적이 있나.

아직 못 만났다. 출판사와 영화사 관계자가 접촉해 계약이 성사된 것이고, 나는 감독으로서 임할 뿐이다.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만날 계획이다.

<화장>을 선택한 계기가 있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어려운 소재일 것 같은데.

김훈 작가의 엄청난 힘이 실린 문장을 영상으로 옮긴다고 생각했을 때 문제가 많아진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다. 김훈 작가에게 자문을 구할 생각이다. 어려운 과제에 부딪혀보자는 생각은 이전에도 내가 늘 품은 것이다. 아직도 도전 의식이 있다. 그게 뜻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다.

어려운 숙제만 계속 골라서 하는 것 같다.

나는 편안하게 영화를 만들 위인이 못 된다. 멜로영화는 젊었을 때 찍는 것이다. <서편제>에서 판소리가 보이는 영화를 만들려 했던 것처럼, 맘에 담아두고 내보이지 않았던 고통이나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영화가 될 것이다. <화장>은 사랑 얘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얘기할 때 너무 가리고 싶어 하는 부분을 영화로 드러내서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겠다.

글쎄… 눈물을 흘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저렇게 사는구나’ 하고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연 배우는 결정했나.

아직 결정한 건 없고 생각 중이다.

부산영상위원회가 올해 ‘영화 기획·개발 지원 사업’을 벌이면서 지원작 10편을 선정했는데 그중 <화장>도 포함됐다.

<화장>이라는 영화를 부산에서 찍을 생각을 하고 있고, 거기 학생들도 동원하려고 한다. 그것 때문에 격려 차원에서 지원해주는 것 같은데 소중하게 생각한다.

전남 장성 출신인데 부산과 인연이 많다. 부산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

한국전쟁 당시 피란 시절에 시작됐다. 고향 쪽에서는 친척들이 좌익 쪽에 가담해 분위기가 아주 험악했다. 전쟁이 난 뒤 집에 도저히 있을 수 없어 가출해 부산으로 갔다. 열여덟 살 무렵이었는데 그게 인연이었다. 한 1년 거기서 막노동하고 그러며 연명했는데 1953년 휴전이 됐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시작한 건 부산에서 만난 사업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먹고살자고 일을 도와주다가 이뤄진 것이다. 나는 그분의 도움으로 장사를 해봤지만 다 말아먹고 나서 입에 풀칠하려 영화 일을 돕다가 감독까지 하게 됐다.

부산 동서대에 임 감독의 이름을 딴 ‘임권택 영화예술대학’과 ‘임권택 영화박물관’이 생겼다. 이 인연은 어떻게 닿은 건가.

내가 서울에 있는 몇 대학에 강의를 가봐서 대학 형편을 아는데, 내 이름을 달겠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보다 훨씬 시설과 장비를 잘 갖춰놓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내 명성이 별것 아닌데 한 개인의 이름을 학부 이름으로 쓰려는 발상이 과감해 보였다. 사실 말리려고 했는데, 내 이름을 쓰는 것이나 투자하는 것이나 다 과감해 보여 잘되리라 생각했다.

과감한 게 아니라 임 감독 명성 정도면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처음에 걱정을 했다. 내 이름을 건 대학이 있다는 것이 영광스럽지만 이게 잘 안 되었을 때 평생 살아온 것에 흙탕물 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동서대 총장을 만났는데 내 이름을 따서 인기를 노리고 한 결정이 아니었다. 진짜 잘해보려는 의지가 보였다. 또 학교라는 게 뭘 잘하고 싶다고 해도 의견을 모아 채택하고 실행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동서대에서는 바로바로 진행됐다. 내 이름이 대학 발전에 방해가 안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101번째 영화까지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는 누구인가.

곤란한 질문이다. 한두 사람과 일한 것이 아니라 평생 많은 연기자와 동고동락했는데 누구를 꼭 집어 말할 수가 없다. 다 소중하다. 나는 내 영화를 잘 안 본다. 대표적인 작품이 뭐냐고 물어도 얘기하라면 못 한다. 단지 영화적 성과가 객관적으로 드러난 것. <서편제> <취화선> <만다라>처럼 많은 관객이 봐주었거나 영화제에서 성과를 낸 영화. 그런 영화는 얘기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그 영화들에서 열연한 연기자들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후배들이 만든 한국 영화 중 어떤 것들이 눈길을 끌었나.

독립영화 중에 볼만한 게 많다. <똥파리>를 참 재밌게 봤다. 단편영화제가 생기면서 제작비가 열악해도 재능 있는 감독들이 많이들 도전하는 것 같다. 그런 좋은 감독들이 프로들 세계에 와서도 성과를 내면서 한국 영화가 잘되고 있는 것 같다.

ⓒ 시사저널 전영기
‘임권택’이라는 큰 기둥을 믿고 후배 감독들이 영화에 계속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글쎄, 그것은 모르겠는데. 나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매번 턱걸이를 했기에. 내 영화 만드는 것만 해도 너무 숨 가쁘게 살아와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서편제>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후배 감독들이 한번 해보자, 이랬을 것 같다.

한 가지 자랑할 게 있다면, 뭔가 하고 싶은 것을 저질러보는 용기가 있다는 것이다. ‘시행착오의 대가’라 하면 임 아무개 감독이다. 그런데 시행착오야말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 실험성이라고까지 할 수 없을지라도 끊임없이 달라지고자 했고, 어떤 소신을 갖기 시작하면 밀어붙이고. 그랬더니 더러 성과가 난 것이 있었다.

101편을 찍으면서 시행착오에 해당하는 작품은 몇 편 정도인가.

대다수가 그렇다. <서편제> 찍을 때도 그런 걸 각오하고 찍었다. 판소리를 부르기도 듣기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에는 판소리란 배워봤자 돈벌이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것을 판소리가 보이는 영상으로 찍어내자는 건데, 소신은 있지만 실제로 영화가 그렇게 찍힐지도 의문이었다. 그 전에 비슷한 영화를 해 본 경험도 없었다. 그러니 찍는 동안에 스태프나 연기자들이나 무슨 영화를 찍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감독인 나도 밀어붙이고는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고 스태프와 연기자들에게 설명하지 못했다.

대박을 낸 영화인데 그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서편제> 개봉 전 판소리 완창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전에 짬짬이 들었던 판소리와 다르게 전율이 이는 감동을 받았다. ‘판소리를 제대로 몰랐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며 후회했다. 심지어 개봉하지 말고 덮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사랑을 받을 줄 몰랐다.

지난해 한국 영화를 본 국내 관객이 1억명을 넘었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도 많은데 올해도 <7번방의 선물>이 기록을 세웠다.

썩 잘 만든 영화라고 해서 반드시 흥행이 되는 것은 아니더라. 교도소를 배경으로 했으면 우리 삶과 진솔하게 닿아야 하는데, 너무 코미디식으로 만든 것에 대해 거부감이 생기기도 했다. 관객이 많이 늘었다고 하니 한국 영화를 위해서 다행이다.

1962년에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신인 감독상을 받았다.

1961년에 영화를 찍었고, 개봉을 62년 설날에 했다. 그러니까 나는 굉장히 운이 좋은 감독이었다. 신인 감독이면서 당시 액션 스타들을 거의 다 기용했을 정도다. 제작자를 잘 만난 덕이다. 스태프들도 당시로서는 일급이었는데, 감독만 어렸다.

어떻게 감독으로 입문하게 됐나.

영화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따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다. 당시엔 영화적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다 드러낼 방법도 없었다. 그러니 감독을 하고자 애쓴 적도 없고, 내가 무슨 감독을 하랴 하는 자격지심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제의를 받았다. 연출부 생활을 할 때 열심히 했다. 당시 감독이 조감독한테 예고편을 만들게 하고 그랬는데, 당시 감독이 내게도 만들어보라고 했다. 그걸 괜찮게 했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것들이 좋게 보여 감독을 해보라고 했던 것 같다.

뚝심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그런 뚝심은 물려받은 것인가.

어린 시절부터 한국 수난사를 직·간접으로 겪어오면서 겁이 없어진 것 같다. 부산에서 막노동을 할 때도 견뎠는데 하면서 모든 일에 임했다.

젊은 시나리오 작가 중에는 기승전결을 많이 따지는 경우가 있다.

그게 미국식 영화 방식이다. 전에는 그런 틀이 꼭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런 틀이 아니고도 영화가 생명력을 갖출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흥행이 안 되면 왜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또 따진다.

흥행이 안 되었어도 나중에 좋게 평가받는 영화가 있다. 생명력이 있는 영화다. <축제> <춘향뎐> 등 몇 작품은 내가 ‘꼭 해야지’ 해서 찍었던 영화인데, 무참하게 흥행에 실패해 타격을 받았다. <축제> 시사회에서 원작자인 이청준 선생에게 영화를 본 소감을 물었다. 이 선생은 <서편제>보다 더 좋다고 말했다. 나도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서편제>보다 <축제>가 훨씬 더 어른스러운 영화다. 흥행 결과는 무참했지만.

국내 독립영화의 잠재력을 어떻게 보나.

독립영화들이 깨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단지 조건이 열악하다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탄탄한 연출력이나 영화에 대한 열정 같은 것들을 보면 미래가 밝다. 전에는 제작 환경뿐만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수준도 많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것들이 지금은 많이 개선됐다. 어떤 감독은 당장 프로 세계로 와도 손색이 없겠더라. 그런 재능을 높이 사는 제작자가 나서거나 투자사들이 생겨날 것이다. 생겨나야 한다고 본다.

영화계에 종사하는 후배들에게 주문할 것이 있다면….

없다. 주문 사항이 없는 것은 나 또한 옛날에 허무맹랑한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삶과 전혀 무관한 얘기를 했다. 나이가 차츰 들어가면서 그런 쪽에 흥미를 잃고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진솔한 얘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웃음을 주는 영화도 있어야 하고, 나 같은 영화를 찍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영화가 다양하게 제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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