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밴 뻔뻔하고 천박한 습성
  • 김선우 | 시인 겸 소설가 ()
  • 승인 2013.05.2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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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우 (시인 겸 소설가)                      강원대 국어교육학과                      1996년 창작과비평 등단                      49회 현대문학상                      9회 천상병시상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워싱턴 메트로폴리탄 경찰국의 성범죄 전담 부서에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기자회견에서 그가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이름 석 자를 걸고” 운운할 때부터 치솟던 짜증은 “저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라고 단언하는 순간 헛웃음이 되어 터졌더랬다. 돌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저런 언어와 행동, 참으로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윤창중씨 사건에 대해 내 주위의 많은 여성이 보인 압도적인 반응은 이런 것이다. “미국에 가서도 저 지경인데, 그동안 한국에서는 오죽했겠느냐”는 것. 또 많은 사람이 이렇게 입을 모았다. “한국에선 저런 짓을 해도 아무 일 없이 버젓이 다닐 거다. 청와대 권력을 등에 업고 쥐도 새도 모르게 덮어버리거나 피해 여성만 애꿎은 꽃뱀 취급당했을 거다”라고.

이것은 비단 윤창중씨 개인의 비윤리성에 국한되는 일이라기보다 한국 사회에서 청와대라는 뒷배를 가진 남성 고위 공직자들의 권력 행사 방식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기도 하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는 무의식적 상하 의식,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비하하는 것이 몸에 밴 뻔뻔하고 천박한 습성 말이다. 윤창중씨만이 아니라 많은 남성 고위 공직자가 자신의 권력을 그렇게 남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마 윤창중씨는 한국에서 하던 대로 미국에서도 했을 것이다.

언젠가 최연희 전 한나라당 의원의 성추행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최씨는 여성 기자를 “음식점 주인으로 착각해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명했다. 윤창중씨는 인턴 여성을 ‘가이드’라 칭했다. 기자가 아니라 음식점 주인이고 인턴이 아니라 가이드면 성추행해도 된단 말인가. 이들의 언행 속에는 한국 사회의 남성 권력이 여성과 약자에 대해 자신의 힘을 표출하는 폭력적인 방식이 짙게 배어 있다. 기본적인 인권 감수성이 낙제점인 인간들!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성희롱·성추행에 연루되면 정치생명이 끝나야 마땅하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성추행 사건이 알려진 후에도 의원직을 유지한 최연희 전 의원, 제수 성폭행 미수 사건이 드러나고도 의원직을 내놓지 않은 김형태 국회의원 등을 보라. 정말이지 기괴하기 짝이 없다. 거기에 윤창중씨 사건까지 보태지니 이것 참, 한국의 고위 공직자 세계에서 ‘상식’과 ‘윤리’라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인 걸까. 이들이 일으킨 사건은 ‘섹스 스캔들’이 아니라 성추행, 성폭력이다. 이것은 인권 유린의 범죄 행위다.

많은 사람이 반대한 윤창중씨를 끝내 대변인에 발탁한 사람은 대통령이었다. 다 늦어서야 자신도 그에게 실망했다는 논평을 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처럼 잘못된 인선이 강행되었는가를 심도 있게 성찰하는 자세가 대통령에게는 꼭 필요해 보인다. 스스로 ‘여성 대통령’을 강조해온 박 대통령은 이 사건에 은폐와 축소의 의혹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비하시키며 권력의 위계로 억압·유린하는 이런 종류의 범죄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여성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는 공허한 레토릭으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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