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말재주로 표 얻은 ‘망언 종결자’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3.05.2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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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일본 오사카 시장, ‘위안부 궤변’에 지지율 급락

개혁가, 선동가, 괴물, 포퓰리스트.

전혀 다른 이 단어들은 한 사람을 가리킨다. 주인공은 하시모토 도루 일본유신회 대표 겸 오사카 시장. 다양한 별칭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미디어의 인기인이다. 그런 하시모토가 “위안부가 필요했다”라는 망언으로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한때는 제3 세력의 대표 주자로 기세를 올렸던 그이지만 추락 속도 또한 상승 속도만큼이나 빠르다.

하시모토는 2011년 11월 오사카 시장 선거를 앞두고 오사카 부 지사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보다 작지만 알짜인 오사카 시장 자리에 출마해 ‘오사카 도 구상’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오사카 부와 시를 합쳐 오사카 도(道)를 만든 뒤 긴키(近畿) 지역의 교토 부, 효고 현, 오카야마 현, 나라 현과 합쳐 긴키 도(都)와 같은 광역 도시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도쿄 도에 버금가는 제2의 수도를 만들겠다는 이 공약으로 하시모토가 이끄는 오사카 유신회는 오사카 부 지사와 시장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다. 오사카 유신회가 전국 정당으로 발전한 것이 ‘일본유신회’다.

잘나가던 하시모토였다. 지난해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자민당 총재이던 아베 신조 총리가 러브콜을 보낸 첫 번째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아베조차 하시모토의 “전쟁 당시에는 위안부가 필요했다”는 망언을 감싸기는 부담스러웠다. 최근 역사 인식 논란이 국내외로 확대되자 부담감을 느껴 한발 빼려던 아베 정부였는데, 하시모토가 도로 불을 지펴버린 것이다. 도대체 하시모토는 왜 그랬을까.

하시모토는 달변가다. 나름으로 유능한 변호사였고 TV에도 맞는 캐릭터였다. 그렇게 연결된 TV 평론가라는 경력은 하시모토를 이해하는 하나의 축이다. 그의 미디어 경력은 정치인으로서의 경력과 연결된다. 하시모토는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TV 평론가 시절 ‘뚜렷한 특징이 없으면 시청자들에게 내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평론가는 복잡한 사건을 선명한 단면으로 잘라내야 하고, 때로는 극단적인 해설로 안방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려면 말에서 모호한 표현을 덜어내야 했고, 흑백으로 단순화시켜야 했으며 과격해야 했다.

지난해 5월24일, 오사카 시의회에 출석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하시모토 도루 일본유신회 대표 겸 오사카 시장. ⓒ AP 연합
정계에서 찬반 양론 대립극 연출

하시모토의 이런 경향은 TV를 빠져나온 후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서도 계속 표출됐다. 정치평론가 모리나 미노루는 하시모토의 이런 답습을 ‘정치와 행정의 극장화’라고 표현했다. 그는 “하시모토는 무대를 선거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의 회의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계속 펼쳤다. 이를 언론에 공개하고 찬반양론이 일어나는 대립극을 연출해왔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대립극은 오사카 부 지사 시절 오사카의 재정 재건을 위해 벌였던 긴축 정책이다. 오사카 부는 당시 6조 엔 가까운 채무 때문에 재정 건전성이 일본 전체에서 가장 떨어지는 곳 중 하나였다. 하시모토는 취임 첫날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정부는 파산하고 있는 회사이고, 여러분은 그 회사의 직원이다”라고 말했다. 수장의 흥미로운 발언에 달려드는 미디어를 통해 하시모토는 자신의 재정 건전화 방법을 설명하며 지지를 끌어모았다. 2008년도 예산안의 전면 백지화, 공무원 임금 3.5~16% 삭감이 주된 내용이었다. 경기 불황 시대와 고용 불안정 시대에 신분이 보장된 공무원은 일반 시민들에게 미운 존재였는데 이런 대립 구도를 교묘하게 부추기면서 하시모토의 지지율은 점점 올라갔다.

하시모토는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디어에 민감한 정치인의 행동 기준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것’이다. 하시모토를 ‘포퓰리스트’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하시모토는 어떻게 해야 여론에 맞는 행동인가에만 관심을 둔다”고 비판한다.

하시모토의 이번 위안부 망언도 그런 맥락에 닿아 있다. 현재 우경화된 일본 국민의 분위기, 7월에 있을 참의원 선거를 계산한 정치적 수사였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부족한 게 하나 있다면 그 부작용의 크기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망언을 한 다음 날 자신의 트위터에 “당시 세계 각국의 군대는 군인의 성적 욕구 해소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는 글을 올려 재차 강조한 것을 봐도 하시모토는 확신범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하시모토는 중요한 이슈에 대립극을 연출하곤 했다. 2012년께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본은 비핵 3원칙(핵무기를 제조하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을 표방한 나라이지만 하시모토는 비핵 3원칙의 수정을 언급했다. 중의원 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둔 11월10일 “비핵 3원칙의 기본은 유지하더라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항목은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선거를 앞두고 일본 내 보수 여론을 등에 업으려는 발언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는 부메랑 효과가 미미했다는 점이다.

이번 망언의 후폭풍에서 하시모토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망언 직후인 5월18~19일 마이니치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어느 정당을 지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일본유신회는 5%의 지지를 얻었다. 4월20일 같은 조사에서 얻은 지지율은 11%였으니 절반 이상이 빠져나갔다. 일본 내에서는 일본유신회의 해산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하시모토가 느끼는 위기감을 보여주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하시모토 그 자신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는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취재 거부까지 선언하던 그가 변했다. 5월17일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망언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역정을 내며 ‘취재 거부’를 선언했지만, 불과 3일 뒤인 5월20일 스스로 취재 거부를 슬며시 풀어버렸다. 게다가 각종 방송국의 시사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해 “발언 진의가 왜곡되었다”며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나섰다. 그중에는 자신과 가장 관계가 나쁜 아사히TV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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