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싱퀸의 가슴이 찢겨졌다
  • 이은선│<매거진 M> 기자 ()
  • 승인 2013.05.2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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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타주>에서 유괴 사건으로 딸 잃은 엄마 열연한 엄정화

<몽타주>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세게 몰려오는 영화다. 주연 배우들이 강렬한 기억을 남겼던 전작의 잔상에서 기인한다. 15년 전 유괴 사건으로 딸을 잃은 여자 하경을 연기하는 엄정화에게서는 <오로라 공주>(2005년)가, 공소시효가 다가오는 시점까지 사건 해결에 집착하는 형사 청호 역의 김상경에게서는 <살인의 추억>(2003년)이 떠오른다. 엄정화라고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처음에 <몽타주>의 출연을 망설였다고 한다.

“큰 이야기를 쥐고 있는 여자이지만 분량도 많지 않은 편이고 신인 감독과 작업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게다가 <오로라 공주>를 촬영할 때 감정적으로 너무 슬프고 힘들었던 게 떠올랐다. 그렇게 힘든 감정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근섭 감독은 “엄정화가 아니면 안 된다”고 부지런히 설득했고, 결국 엄정화는 아이를 잃고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긴 엄마를 다시 한번 받아들였다.

ⓒ 이은선 제공
연기자로 인정받기까지 변신 거듭

결과적으로 영화는 엄정화에 의한, 엄정화를 위한 것이 됐다. 표면적으로는 하경과 청호, 15년 전 하경이 딸을 유괴당한 방식과 똑같이 손녀를 유괴당한 한철(송영창)이 공평한 롤을 나눠가진 듯이 보이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몽타주>는 하경, 그러니까 엄정화의 영화다. 비단 반전의 열쇠를 지닌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경의 비극적 사연과 엄정화의 열연이 한 덩어리가 돼 구르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영화의 흐름을 좌우한 것이다. 엄정화는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보는 이를 가슴 저리게 설득하고, 기어이 마음을 붙들어 맨다.

엄정화는 <몽타주>를 촬영하면서 “<오로라 공주>에서 다 쓰지 못하고 남아 있던 감정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하경을 통해 그때 남아 있던 감정을 비로소 다 써버렸다”고 덧붙였다.

꽤 영리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몽타주>는 단점도 분명한 영화다. 거의 모든 장면은 후반부의 반전을 위한 단서로 기능한다. 때문에 매 순간 치밀하고자 하는 화법이 때로는 강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스릴러 장르 문법에 눈이 밝은 관객이라면 디테일이 허술하다고 느낄 만한 지점도 더러 있다. 그러나 누군가 <몽타주>가 왜 괜찮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엄정화의 열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엄정화의 연기력을 논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그는 늘 좋은 배우였다. ‘가수 출신 연기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배우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심어준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년)부터 최근작 <댄싱퀸>(2012년)까지 다양한 영화가 엄정화를 통해 펄떡이는 생명력을 얻었다. 엄정화는 배우 개인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역할에 투영되는 부류의 배우는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완벽하게 캐릭터 안으로 잠입하는 데 익숙한 배우다.

엄정화 고유의 이미지와 재능에 빚진 영화는 <댄싱퀸> 정도가 유일할 뿐, 그가 연기한 대다수 캐릭터는 하나의 수사나 이미지 아래 묶일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싱글즈>(2003년)의 천방지축 30대 여성 동미, <베스트셀러>(2010년)의 히스테릭한 소설가 희수, <마마>(2011년)의 청승맞은 엄마 동숙 사이의 넓디넓은 간극을 어떻게 하나로 좁힐 수 있단 말인가. ‘연기 변신’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배우가 맡은 캐릭터가 달라질 때마다 남발될 게 아니라 이럴 때 써야 옳다.

엄정화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가 그 캐릭터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이면 하고, 아니면 안 한다”고 말한다. “연기를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다. 그보다 온전히 시나리오 속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내가 그 여자에게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연기해버리고 말았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니까.”

모든 여배우가 이미 그렇게 연기하고 있으며, 각자 나름의 존재감은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국 영화계에 가뭄에 콩 나듯 제작되는 여자 배우 원톱 영화의 주인공을 엄정화가 꽤 여러 번 꿰찼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로라 공주>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년) <베스트셀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정화라는 배우의 힘에 기댄 영화들이다.

엄정화는 한때 “기성 감독들이 나를 찾지 않아서 갈증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엄정화는 <몽타주>를 비롯한 대다수 작품을 신인 감독과 작업했다. 이는 엄정화가 생각하는 어떤 한계일 수는 있어도, 결과적으로는 그에게 득이 된 과정이다. 현장 경험이 없는 감독들과 주로 작업하면서 엄정화는 ‘내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영화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연출가에게 기대는 대신 탄탄한 연기력을 쌓았다.

ⓒ 미인픽쳐스 제공
감독에 기대지 않고 연기력 쌓다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는 와중에도 무대 위의 화려한 디바로서의 활동을 병행한 것 역시 주요했다. 덕분에 엄정화는 스스로에게 별다른 제약을 둘 필요가 없었다. “극중에서 촌스러운 엄마 역할이면 어떤가. 나는 무대에서 얼마든지 화려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데….”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국내에서 여배우와 디바 사이를 이토록 활발하게, 또 안정적으로 오가는 이가 엄정화 외에 누가 있는지 떠올려보라.

2010년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잠시 활동이 주춤했던 엄정화는 “<댄싱퀸>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댄싱퀸>이 활력을 되찾는 계기였다면, <몽타주>는 엄정화의 새로운 정점이다. 그가 보여주는 에너지는 전작에서 오는 기시감을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큼 강렬하다. 비슷한 역할에 도전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몽타주>는 엄정화가 점점 더 좋은 배우가 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자, 그의 새로운 대표작이 될 만하다. 여전히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배우. 엄정화는 또 한 번 엄정화를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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