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세게 몰려오는 영화다. 주연 배우들이 강렬한 기억을 남겼던 전작의 잔상에서 기인한다. 15년 전 유괴 사건으로 딸을 잃은 여자 하경을 연기하는 엄정화에게서는 <오로라 공주>(2005년)가, 공소시효가 다가오는 시점까지 사건 해결에 집착하는 형사 청호 역의 김상경에게서는 <살인의 추억>(2003년)이 떠오른다. 엄정화라고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처음에 <몽타주>의 출연을 망설였다고 한다.
“큰 이야기를 쥐고 있는 여자이지만 분량도 많지 않은 편이고 신인 감독과 작업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게다가 <오로라 공주>를 촬영할 때 감정적으로 너무 슬프고 힘들었던 게 떠올랐다. 그렇게 힘든 감정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근섭 감독은 “엄정화가 아니면 안 된다”고 부지런히 설득했고, 결국 엄정화는 아이를 잃고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긴 엄마를 다시 한번 받아들였다.
연기자로 인정받기까지 변신 거듭
결과적으로 영화는 엄정화에 의한, 엄정화를 위한 것이 됐다. 표면적으로는 하경과 청호, 15년 전 하경이 딸을 유괴당한 방식과 똑같이 손녀를 유괴당한 한철(송영창)이 공평한 롤을 나눠가진 듯이 보이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몽타주>는 하경, 그러니까 엄정화의 영화다. 비단 반전의 열쇠를 지닌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경의 비극적 사연과 엄정화의 열연이 한 덩어리가 돼 구르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영화의 흐름을 좌우한 것이다. 엄정화는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보는 이를 가슴 저리게 설득하고, 기어이 마음을 붙들어 맨다.
엄정화는 <몽타주>를 촬영하면서 “<오로라 공주>에서 다 쓰지 못하고 남아 있던 감정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하경을 통해 그때 남아 있던 감정을 비로소 다 써버렸다”고 덧붙였다.
꽤 영리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몽타주>는 단점도 분명한 영화다. 거의 모든 장면은 후반부의 반전을 위한 단서로 기능한다. 때문에 매 순간 치밀하고자 하는 화법이 때로는 강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스릴러 장르 문법에 눈이 밝은 관객이라면 디테일이 허술하다고 느낄 만한 지점도 더러 있다. 그러나 누군가 <몽타주>가 왜 괜찮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엄정화의 열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엄정화의 연기력을 논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그는 늘 좋은 배우였다. ‘가수 출신 연기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배우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심어준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년)부터 최근작 <댄싱퀸>(2012년)까지 다양한 영화가 엄정화를 통해 펄떡이는 생명력을 얻었다. 엄정화는 배우 개인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역할에 투영되는 부류의 배우는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완벽하게 캐릭터 안으로 잠입하는 데 익숙한 배우다.
엄정화 고유의 이미지와 재능에 빚진 영화는 <댄싱퀸> 정도가 유일할 뿐, 그가 연기한 대다수 캐릭터는 하나의 수사나 이미지 아래 묶일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싱글즈>(2003년)의 천방지축 30대 여성 동미, <베스트셀러>(2010년)의 히스테릭한 소설가 희수, <마마>(2011년)의 청승맞은 엄마 동숙 사이의 넓디넓은 간극을 어떻게 하나로 좁힐 수 있단 말인가. ‘연기 변신’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배우가 맡은 캐릭터가 달라질 때마다 남발될 게 아니라 이럴 때 써야 옳다.
엄정화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가 그 캐릭터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이면 하고, 아니면 안 한다”고 말한다. “연기를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다. 그보다 온전히 시나리오 속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내가 그 여자에게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연기해버리고 말았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니까.”
모든 여배우가 이미 그렇게 연기하고 있으며, 각자 나름의 존재감은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국 영화계에 가뭄에 콩 나듯 제작되는 여자 배우 원톱 영화의 주인공을 엄정화가 꽤 여러 번 꿰찼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로라 공주>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년) <베스트셀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정화라는 배우의 힘에 기댄 영화들이다.
엄정화는 한때 “기성 감독들이 나를 찾지 않아서 갈증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엄정화는 <몽타주>를 비롯한 대다수 작품을 신인 감독과 작업했다. 이는 엄정화가 생각하는 어떤 한계일 수는 있어도, 결과적으로는 그에게 득이 된 과정이다. 현장 경험이 없는 감독들과 주로 작업하면서 엄정화는 ‘내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영화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연출가에게 기대는 대신 탄탄한 연기력을 쌓았다.
감독에 기대지 않고 연기력 쌓다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는 와중에도 무대 위의 화려한 디바로서의 활동을 병행한 것 역시 주요했다. 덕분에 엄정화는 스스로에게 별다른 제약을 둘 필요가 없었다. “극중에서 촌스러운 엄마 역할이면 어떤가. 나는 무대에서 얼마든지 화려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데….”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국내에서 여배우와 디바 사이를 이토록 활발하게, 또 안정적으로 오가는 이가 엄정화 외에 누가 있는지 떠올려보라.
2010년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잠시 활동이 주춤했던 엄정화는 “<댄싱퀸>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댄싱퀸>이 활력을 되찾는 계기였다면, <몽타주>는 엄정화의 새로운 정점이다. 그가 보여주는 에너지는 전작에서 오는 기시감을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큼 강렬하다. 비슷한 역할에 도전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몽타주>는 엄정화가 점점 더 좋은 배우가 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자, 그의 새로운 대표작이 될 만하다. 여전히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배우. 엄정화는 또 한 번 엄정화를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