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표팀은 자기 것만 잘하려 한다”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3.06.0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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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로 돌아온 ‘진공청소기’ 김남일

‘진공청소기’ 김남일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지난 5월16일 최강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김남일에게 다시 태극마크를 안겼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이후 3년 가까이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대표팀 은퇴를 한 것 같았던 김남일의 극적인 귀환이다.

최강희 감독은 “나이는 상관없다. 현 시점에서의 경기력을 보고 뽑았다. 김남일은 현재 K리그 클래식 최고의 미드필더”라고 말했다. 과거처럼 활발하게 뛰어다니며 중원을 헤집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원숙한 플레이와 경험으로 후배들을 이끈다. 소속팀 인천의 돌풍을 이끌고 있는 주장 김남일은 장고처럼 화려하게 돌아왔다.

 

ⓒ 인천유나이티드 제공
기성용·구자철이 아닌 김남일이 선택된 이유

대표팀 명단 발표 후 김남일은 부쩍 바빠진 모습이다. 수비형 미드필더는 잘해도 그렇게 빛나는 자리가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지도자의 몫이다. 인천의 김봉길 감독은 일찌감치 “우리 팀의 주역은 김남일이다. 지금도 국가대표로 손색없다”라며 대표팀에 공개 추천했다. 지난 시즌 후반기부터 김남일을 주목해온 최강희 감독은 올 시즌 한층 올라온 경기력을 보이자 주저 없이 김남일을 선택했다. 오직 김남일 본인만이 이런 분위기를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다.

“모르겠다. 왜 최강희 감독님이 나를 선택하셨는지, 만나면 묻고 싶다. 나 아니어도 지금 대표팀엔 좋은 미드필더가 정말 많다. (기)성용이도 있고 (구)자철이도 있다. 젊고, 유럽에서 잘하는 후배들인데 다 늙은 내게 뭘 원하는지 진짜 궁금하다.”(웃음)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만 인천에서 김남일이 보여주는 활약은 알차다. 활동량, 패스 차단, 태클, 패스 정확도 등에서 모두 팀 내 1위다. 공수 가교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다. “지난 시즌엔 팀 합류가 늦었고 전 소속팀과의 임금 체불 문제로 스트레스도 있었다. 하지만 올 시즌은 동계 훈련을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체력에 자신감이 생겼다. 나도 이 정도로 할 줄은 몰랐다”는 게 김남일의 답변이다.

대표팀 명단 발표 당시 김남일의 선발은 어느 정도 예견됐다. 놀라운 것은 최강희 감독이 그동안 팀의 중심이던 기성용·구자철을 배제할 정도로 김남일에게 강한 신뢰를 보냈다는 것이다. 6월에 열리는 월드컵 최종예선 3연전은 대표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승부다. 현재 한국은 최종예선 A조에서 3승 1무 1패로 한 경기를 더 치른 우즈베키스탄(3승 2무 1패)에 승점 1점이 뒤진 조 2위다. 레바논(원정), 우즈베키스탄(홈), 이란(홈)을 상대로 최소 2승 이상은 거둬야 확정지을 수 있다. 최강희 감독은 “구자철은 부상으로 최근에야 경기에 나왔다. 기성용은 경고 누적으로 레바논전에 뛸 수 없고 역시 부상을 안고 있다. 몇몇 선수의 컨디션 회복보다는 팀이 하나가 돼 전력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말로 배경을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팀 분위기를 위해 기성용과 구자철이 제외됐다는 얘기도 있다. 두 선수는 지난 3월 있었던 카타르와의 최종예선을 준비하는 도중에 각각 열애설과 결혼설로 시끄러웠다. 개인사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한 경기, 한 경기가 애타는 시기에 경기 외적인 일로 시끄럽게 해 팀 분위기가 와해됐다는 것이다. 최강희 감독은 선수 개인의 능력이 아닌 팀 전체를 살리기 위한 분위기를 택하는 스타일이고, 중심이 되어줄 베테랑 김남일을 원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김남일은 최근 대표팀이 보여준 모습을 곱게 보지 않았다. “안에 있을 때보다 밖에 있으면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지금 대표팀은 헌신하고 희생하기보다 자기 것만 잘하려고 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 같다. 그래서는 한국 축구가 보여준 강한 모습을 발휘할 수 없다. 한·일월드컵 4강이나 런던올림픽 동메달 모두 팀을 위해 하나가 됐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과거 김남일은 대표팀에서 주장을 맡았다. 그 역시 홍명보처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강인한 리더십을 보유하고 있다. 올 시즌 인천에서도 주장직을 잘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대표팀에 돌아와서 주장 역할을 다시 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자신의 역할은 급한 불을 끄는 소방수에 불과하다고 한정 지었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선배라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진 않다. 그냥 묵묵히 내 역할을 소화하고 열심히 훈련을 소화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모 아니면 도다. 첫 경기인 레바논전에 올인할 것이다. 사실 내 역할은 거기까지라고 본다. 레바논을 잡으면 다음 경기들은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남아공의 악몽 딛고 브라질로 가고 싶다”

대표팀은 한동안 김남일에게 트라우마였다. 그는 A매치 97경기에 출전했다. 그 와중에 몇 차례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 2001년 체코전의 백패스 미스, 2008년 북한전에서의 페널티킥 허용 등. 그러나 마지막 A매치만큼의 파장은 아니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이었던 나이지리아전에서 김남일은 후반 19분 교체 투입됐다. 그리고는 4분 만에 어이없는 태클로 페널티킥을 허용했다. 2-1로 앞서 있던 대표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나이지리아는 김남일이 내준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2-2로 쫓아왔다. 거기서 실점을 더 해 패하면 대표팀은 16강 진출에 실패하는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무승부로 경기를 마친 대표팀은 16강 진출에 성공했지만 김남일만큼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축제를 내가 망쳐버린 셈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허정무 감독님이 괜찮다면서 안아주셨지만 나는 정말 부끄러워서 어디에 숨고 싶었다. 그때도 서른세 살로 팀에서 고참급이었는데 후배들에게 폐만 끼쳤다. 그 후로는 대표팀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욕할까 봐. 그 난리를 쳐놓고 또 대표팀에 가겠다고 하면 누가 좋은 말을 해주겠나.”

특히 김남일이 가슴 아팠던 것은 나이지리아전이 가족에게 남긴 상처였다. 2007년 말 KBS 아나운서 김보민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그는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 피해를 입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 나이지리아전 이후 아내의 미니홈피는 욕설로 도배가 됐다. 김남일은 “나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생했다. 대표팀이란 곳이 잘하면 찬사받고 못하면 욕먹는 곳이지만, 그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나이지리아 생각만 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밤에 악몽을 꿀 정도”라고 회상했다. 2008년 아들 서우군이 태어날 때 김남일은 함께하지 못했다. 요르단과의 월드컵 예선을 위해 대표팀에 합류해 있었기 때문이다.

김남일이 다시 일어나 대표팀에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가족 덕분이다. 인천 홈경기가 열릴 때면 김보민씨는 아들 서우군을 데리고 응원을 펼쳐 경기장에선 유명 인사가 됐다. “아내가 많은 걸 이해해주고 내가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준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가 내 마음대로 안 돼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전이시키진 않을까 늘 조심한다. 쉬는 날에는 최대한 아들과 놀아주려고 한다.”

대표팀으로 인해 웃기도 했지만 울어야 했던 김남일.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직 불꽃이 살아 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을 향한 불꽃이다. “밖에서 나이 먹고 욕심만 찼다고 할까 봐 표현은 못 하지만 브라질에 가고 싶다. 다른 이유가 있겠나. 선수로 뛰는 한 우승과 월드컵은 모두가 꿈꾸는 목표다. 명예롭게 물러나고 싶다. 대표팀도 마찬가지다. 박수받으며 떠나는 게 내가 그리는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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