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뜯어고쳐도 학원엔 간다
  • 양창희 인턴기자 ()
  • 승인 2013.06.1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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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식 사교육과의 전쟁’, 일선 교육 현장에선 부정적

지난해 12월16일, 대선을 사흘 앞두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간의 제3차 TV토론이 열렸다. 이날 사교육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선행학습’을 실질적으로 금지하겠다는 박근혜 후보에게 문재인 후보가 물었다.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겠다는 것입니까?” 박 후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문 후보가 재차 물었다. “선행학습 못 하도록 강제하겠다는 것입니까?” 박 후보가 곧바로 대답했다. “강제해야죠.”

발언의 파장은 컸다. 일선 학교뿐 아니라 학원에서도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선행학습을 막겠다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실행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정작 후보 공약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있지 않았다.

새누리당의 제18대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는 ‘각종 시험에서 교육과정을 넘어서는 문제 출제를 금지한다’는 언급은 있었지만 선행학습을 금지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토론회 직후 박 후보 캠프에서는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시험을 막겠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4월23일 국무회의에서 “교과서 외의 것은 시험에 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왼쪽). 선행학습금지법 제정 촉구 1인 시위에 나선 시민단체 회원(오른쪽). ⓒ 연합뉴스
“공교육정상화법은 순진한 주장”

‘선행학습 금지 발언’은 말실수처럼 비쳤지만, 선행학습 억제책으로 사교육을 잡으려는 박근혜정부의 각오는 여전하다. 지난 4월23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교과서 외의 것은 절대 (수능시험 등에) 출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법안도 준비됐다. 강은희 새누리당 의원은 4월30일 ‘공교육 정상화 촉진에 관한 특별법안’(공교육정상화법)을 대표 발의했다. 역대 정부들처럼 박근혜정부도 ‘사교육과의 전쟁’에 돌입한 셈이다. 주요 전략은 선행학습을 규제하는 것이고, 꺼내든 무기는 공교육정상화법이다.

이 법 발의안에 따르면, 사교육 시장에서 선행교육이 성행하는 이유는 공교육에 있다. 선행학습 내용이 등장하는 학교 시험, 고교 교육과정 내용 밖에서 출제되는 대입 논술·적성·구술 시험 등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학교 시험을 통제하면 선행학습도 줄어들고, 사교육도 잡힐 것이라는 얘기다.

발의안은 이 논리에 충실하다. 지필평가·수행평가 등 모든 종류의 시험과 각종 교내 대회에서 교육과정 범위와 수준을 벗어난 문제 출제를 금지하는 방안이 담겼다. 학교 입학전형에서도 바로 이전 단계의 교육과정 내용까지만 요구하도록 했다. 고등학교 입학전형에는 중학교 과정만, 중학교 입학전형에는 초등학교 과정만 담는 식이다.

공교육정상화법이 사교육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까. 여론은 부정적이다. 무엇보다 제도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다. 아무리 학교 내의 시험이 배운 내용에서만 나온다고 해도, 여전히 사교육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매력적인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경기도 안양의 한 학부모는 “학교에서 시험문제를 정직하게 낸다고 해서 학생들이 학원에 가는 발길을 끊을 것이라는 예측은 너무 순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사는 “현재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선행학습을 하는 것이 분명히 유리하다. 이런 상황에서 시험문제만 규제한다고 해서 사교육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너무 많은 학습을 강요하는 교육과정의 체계 자체가 문제라는 분석도 있다. 권대봉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행 교육과정은 학문 중심이다. 학습량이 많은 사람, 또는 미리 학습한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학문 중심 교육과정을 생활 역량 중심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선행학습과 사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학원의 선행교육을 직접적으로 규제하면 어떨까. 사교육비를 확 줄이는 가시적인 효과가 나오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구상된 법안이 이상민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안’(선행교육규제법)이다. 법안 내용은 직관적인 명칭 그대로다. 학교 시험문제를 통제하는 방안은 공교육정상화법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선행교육규제법에는 사교육에 대한 강력한 규제책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선행교육을 하면 바로 철퇴를 날린다는 말이다. 선행교육규제법 발의안은 일선 학원에서 선행교육이 이뤄졌을 경우 교육감 권한으로 등록 말소·교습 정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선행교육 조항 위반 사항을 신고한 이른바 ‘학파라치’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선행교육규제법에 대한 학원가의 반발이 거세다. 지난해 12월 학원총연합회가 대선 후보들의 학원 교육 지원 공약 수립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우린 안 될 거야”라는 피로감이 진짜 문제

이상민 의원과 함께 법안 구성에 참여한 안상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소장은 “박근혜정부식의 접근도 필요하겠지만, 사교육 규제 없이는 효과가 반감된다. 사교육에 끌려다니며 만신창이가 돼버린 아이들이 많다. 이 법안은 아이들이 더 피해보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한시적 법”이라고 법안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선행교육규제법도 환영받는 대책은 아니다. 당장 학원가의 반발이 심하다. 사단법인 학원총연합회는 2차에 걸쳐 8만5000명의 서명이 담긴 선행교육규제법 반대 서명부를 국회에 전달했다. 학원총연합회 관계자는 “예습·복습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공부의 기본이라고 배웠는데, 선행학습과 예습은 도대체 무슨 차이인가. 진도보다 한 달 앞선 내용을 예습하는 것조차 막는 법안은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학생의 자율적인 학습권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있다. 서울 소재의 한 일반 사립고에 재학 중인 박 아무개 학생(17)은 “중학생 때 부모님과 함께 선택한 학원에서 영어·수학 선행학습을 했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선행학습을 막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서울 종로구의 한 학원 원장은 “선행교육을 단속할 방법과 기준이 없다. 수학 같은 경우 교육과정이 세분화돼 있으니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국어나 영어는 어떤 기준을 세울 것인가. 수준 높은 소설을 중학생들에게 읽히는 게 여기서 말하는 선행교육인가”라고 반문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공교육정상화법과 선행교육규제법을 바라보는 교육 주체들의 시각은 비관적이다. 여기에는 교육 정책 자체에 대한 깊은 피로감이 드리워 있다. 전두환 정부의 과외 금지, 노태우 정부의 본고사 부활, 김영삼 정부의 초등학교 영어 교육 실시, 김대중 정부의 고액 과외 단속, 노무현 정부의 수능 등급제, 이명박 정부의 사교육비 절반 경감 공약. 이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교육과의 전쟁은 계속됐다. 결과는,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일관성 없는 교육 정책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 선행학습을 규제해서 사교육을 줄여보겠다는 박근혜정부의 청사진이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안상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소장은 “선행교육규제법이 환영받지 못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교육 정책에 대해서는 뭘 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한 학원 관계자는 “정작 상담을 받으러 찾아온 학부모들은 이런 법안에 큰 관심이 없다. 어차피 큰 변화는 없을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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