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의료생협’이 환자 등친다
  • 문정빈 인턴기자 ()
  • 승인 2013.06.1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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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조합원 명부로 설립…인터넷에선 대행 서비스 광고도

영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가짜’ 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 병원(의료생협)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12년 9월 말 기준 전국의 의료생협 수는 290개. 문제는 의료생협 가운데 일부 유사 의료생협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의료생협은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생협법)에 따라 300명의 출자자와 3000만원의 출자금을 갖춘 법인이 지자체의 승인을 얻어 세우는 병원이다. 지역민의 자발적 참여로 만든 ‘주민 참여형 의료기관’으로 지역민의 건강 증진을 목표로 한다.

이와 달리 영리 목적의 유사 의료생협은 사무장 병원의 또 다른 형태다. 사무장 병원은 의료기관 개설 자격이 없는 사람이 의료인을 고용해 병원을 개설하는 것으로 불법이다. 최근 경찰에 적발된 사무장 병원 형태의 유사 의료생협 수는 34개다.

ⓒ 일러스트 김세중
설립 쉽고 운영비 적은 점 악용

유사 의료생협이 난립하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설립 절차가 간편하다. 일반 사무장 병원의 경우 의사가 그만두면 병원을 계속 운영하기 어렵다. 의사가 그만두는 순간 폐업 신고를 하고 다시 의사를 고용해 개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료생협은 의사가 그만두더라도 개·폐업 신고 없이 병원을 계속 운영해도 된다.

뿐만 아니라 운영비도 절감할 수 있다. 사무장 병원의 경우, 의사 월급이 많게는 1200만~1500만원 선이다. 그러나 의료생협의 경우에는 평균 500만원에서 70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인건비가 적게 드는 셈이다. 게다가 공정거래위원회가 2010년 전체 진료의 50%까지 비조합원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생협법을 개정한 것도 유사 의료생협 증가의 원인으로 꼽힌다.

조합원 300명에 출자금(조합비) 3000만원을 마련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조합비는 사무장 본인이 직접 내면 된다. 조합원 동의서를 받는 것도 별 걸림돌이 안 된다. 지역 주민들에게 동의서를 작성해준 대가로 의료비를 할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2월 서울·대전·충주·강원 등 전국 각지에 33개의 의료생협을 만들어 돈을 받고 팔아넘긴 병원 이사장이 경찰에 적발됐다. 그는 충북 제천의 낡은 건물을 이용해 의료생협 형태의 ㅎ요양병원을 만들었다. 그동안 의료생협을 만들어주는 대가로 한 사람당 2000만원씩 총 6억6000만원을 받아 챙겼다.

의료생협을 설립해주는 대행업체까지 생겨났다. 인터넷에서 ‘의료생협’ 검색만으로도 설립을 대행해주는 컨설팅업체부터 대행 법무사무소까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일부 법무사무소가 불법으로 의료생협을 만들어주고 있어 문제로 지적된다. ㄹ법무사무소는 인터넷에 ‘의료생협 설립을 대행합니다’라는 광고를 버젓이 낸 뒤 돈을 받고 의료생협을 만들어줬다. 이들은 출자금만 모아 오면 조합원 총회 등 설립 절차를 대행해주고 1000만원 이상의 수수료를 받았다. 이들이 만들어 준 조합원 명부가 여러 생협으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에 의료생협의 조합원 명부가 겹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서울 강서구의 ㅇ의료생협도 ㄹ법무사무소가 설립을 대행해준 경우다. 이 병원은 허위 조합원 명단 작성 혐의로 2012년 9월 경찰에 적발됐다. 이 병원의 조합원 명부는 300명이 넘어 서류상으로는 설립 조건을 충족했다. 하지만 경찰 수사 과정에서 실제 동의서를 쓴 조합원은 300명이 안 된 것으로 들통 났다.

의료생협 설립 대행업체 인터넷 홈페이지.
“의료생협 설립 요건 강화해야”

문제는 이들 의료생협이 설립 취지와 어긋나게 운영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영리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환자를 단순한 돈벌이 대상으로 여긴다. 이에 따라 미리 손익분기점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환자들을 진료한다. 치료 기간을 부풀리고 링거, 항생제 등도 과다하게 처방했다. 추혜인 살림의료생협 원장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일부 유사 의료생협의 항생제 처방률이 최대 9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베이트, 환자 알선 등도 관행적으로 이뤄졌다. 의료생협 병원에는 MRI·CT 등의 기기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를 악용한 유사 의료생협은 검사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환자로 하여금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한 뒤 리베이트를 받았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유사 의료생협 형태의 병원에서 실제보다 치료 기간을 부풀리는 일이 빈번하다”고 말했다.

보험사기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수익만을 목표로 하는 유사 의료생협과 허위 입원을 원하는 나이롱 환자의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보험금을 노리는 이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식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에 병원은 밥값, 주사비 등을 많이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허위 입원을 묵인해 주게 된다.

의료생협 설립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공정위는 조합원 500명에 출자금 1억원 이상으로 설립 요건을 강화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최봉섭 한국의료생협연합회 이사는 “의료생협 설립 문턱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유사 의료생협이 난립하는 것을 막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의료생협 설립 후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료생협이 본래 취지에 맞게 운영되는지 해마다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병민 대전민들레의료생협 전무는 “법적인 규제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 의료기관을 어떻게 지도·감독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방향이 제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사 의료생협 난립으로 의료생협의 취지가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최봉섭 이사는 “일반 국민은 의료생협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20년 동안 쌓아왔던 신뢰가 무너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선미 전주의료생협 전무도 “의료생협은 사회 속에서 잘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유사 의료생협 때문에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의료생협까지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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